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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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은 한 가족처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려견은 보호자와의 정서적 교류를 위해 함께 생활하는 개다. 반려견은 보호자와의 관계에서 서로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성 교육을 받아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산책, 반려견 놀이터 등에서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학습한다. 심리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도 반려견을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법·제도부터 일상까지… ‘사랑하는 존재’로 인정받는 반려동물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이다. 함께 사는 공간에서, 생일을 챙기고, 사진을 찍고, 병원을 찾고,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는 존재. 그렇게 사회는 ‘소유자’가 아닌 ‘보호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 같은 인식 변화는 제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동물 등록 의무화는 물론, 반려동물 장례와 보험, 유산 상속 같은 논의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려동물 전용 어린이집과 호텔, 유치원, 유모차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벽도 많이 남아 있다. 아파트에서의 반려동물 관련 갈등, 유기동물 문제, 책임 있는 보호 문화의 정착 등 ‘가족’이라 부르기엔 우리 사회가 준비되지 않은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반려동물을 단순한 애완이 아닌 ‘존재’로, ‘가족’으로 대하는 사회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 약칭: 개식용종식법〔시행 2024. 8. 7., 법률 제20195호, 2024. 2. 6. 제정〕을 제정했다.
이렇게 사회에서 반려견에 대한 사랑이 높아지는 반면 자기를 낳아 키워서 사회에서 훌륭하게 잘 살도록 해 준 부모나 조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현실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시(詩) 한 편을 기록한다.
조상님과 부모 모시기를 애완견 다루듯이/ 정성으로 모실 수는 없는 것일까?// 착각 속에 살아가는 개 애호가들이여/ 개 운동시킨다고 끌고 다니듯이/ 개 끌어안고 업고 다니듯이/ 부모 모시고 운동 다니면 안 되겠는가?// 개 아프다고 거금 들여 병원 다니듯이/ 부모 모시고 병원 자주 다니면 안 되겠는가?/ 개 이빨 닦아 주고 귀 청소 목욕시켜 주듯이/ 부모도 개처럼 관심 가져주면 안 되겠는가?/ 개똥 쌌다고 똥구멍 닦아 주듯이/ 부모 대소변 처리해 주면 안 되겠는가?// 늙은 부모의 손발은 이미 나무껍질이 되었고/ 허리는 할미꽃 되었어도/ 노인이란 말은 아름다운 훈장이요/ 얼굴은 언제나 마애삼존불상이다// 요양원은 현대판 고려장이니/ 부모 모시기를 개 다루듯이 모실 수는 없는 것인가?/ 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개에게 신경 쓰는 만큼의 절반/ 아니 십분의 일이라도 부모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말이다/ 개만도 못한 세상이 되었어도/ 한 번 더 부모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송낙인, 「부모와 조상」)
위 시를 읽어 보시면 현 사회가 부모나 조상을 어떻게 예우나 대하는가 알 수 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는 새끼 까마귀가 자라서 부모를 먹여 주듯,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되돌려 준다는 뜻이다. 새끼 까마귀가 성장하여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며 보답하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이처럼 반포지효는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잊지 않고, 커서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자녀를 칭찬하거나 격려할 때 쓰인다. 둘째, 가족 간의 사랑과 보살핌의 중요성을 일깨울 때도 사용된다. 셋째, 효도와 관련된 교육이나 윤리적인 내용을 전달할 때 활용되며, 특히 자식의 책임과 도리를 강조하고자 할 때 적합한 표현이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는 핏줄로 연결되어 있다. 부모가 자기의 살붙이들인 자녀들을 사랑하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양육하며 자식들 역시 자기를 낳아 키워 준 육체적 생명의 은인인 부모를 존경하고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부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초보적인 도리이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는 사랑과 존경, 양육과 부양의 관계로 나타난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양육이다. 부모들이 자기의 핏줄이고 살붙이인 자식들을 사랑하고 양육하고 교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 요구이며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도리를 지키는 것이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교양에 대한 책임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를 바 없지만 자식들을 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와 그들이 맡은 분야는 서로 다르다. 자식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어머니보다 엄했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기초한 봉건사회에서는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자식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절대 복종하도록 교양하기에 힘썼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간청할 일이 있어도 함부로 말하기를 꺼려했다. 옛날에는 아버지를 가리켜 엄친(嚴親) 또는 가엄(家嚴)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를 엄친 또는 가엄이라고 한 것은 아버지가 바로 엄격해서 가정에서 제일 어려운 분도 아버지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자식들이 어머니한테는 아무러한 거리낌도 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버지에게는 조심스럽게 말하였고, 심지어 아버지에게는 어렵거나 두려워서 간청하기를 꺼려했다.
이런 경우에는 어머니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청원하거나 어머니가 자식들을 대신하여 남편에게 청하여 해결해 주는 것이 상례였다. 아버지를 특별히 어렵게 여긴 것은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가정을 대표하고 아들딸들을 비롯한 모든 가족 성원들의 일체 언행까지도 도덕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들의 사랑은 아버지보다 각별하고 부드러웠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예로부터 각별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은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자기 몸에서 낳았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에 그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양하는 일을 거의 도맡아 한 것과 관련된다. 옛날에는 어머니를 가리켜 자주(慈主), 자친(慈親), 자당(慈堂), 노자(老慈), 선자(先慈) 등으로 부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 모성애가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 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전해 오는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가요 「사모곡」을 한 번 읽어 보기 바란다.
반려견을 사랑하는 분들이시여! 반려견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나를 낳아 키워 주신 부모님이나 조상의 은혜와 은덕을 좀 생각하여 십분의 일이라도 부모에 대한 생각을 갖는 시간을 좀 가져 보라는 뜻에서 제안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