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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사과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은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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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모님. 조금 더 기다리실 수 있죠?”
“아니, 아니요…. 30분 후에는 진짜 무통주사 놔 준다면 서요!”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잘만 참았던 고통이 순식간에 칼날을 드러내며 뱃속을 헤집었다. 우는 걸로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진짜 모르고 한 소리였다. 사람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울게 된다는 걸.
“그럴 줄 알았는데 아직 진통 주기가 7분이에요. 덜 열렸어요.”
“보지도 않고!”
울컥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험한 말이라도 할 뻔했다. 나는 뜨거워진 눈으로 간호사를 올려다보았다.
온도로 색깔을 알 수 있다면 내 눈과 얼굴은 온통 붉을 터였다. 시뻘건 실핏줄로 눈의 흰자가 다 갈라져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전혀 보이지 않는지 간호사의 눈은 유리알처럼 깨끗하기만 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그 말똥함이 답답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기, 그래도….”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누웠다. 나가려는 간호사를 붙잡았다. 
“내진이라도 해주시면 안 될까요? 얼마나 열렸는지라도….”
내가 내진을 해 달라고 애원할 줄은 몰랐다. 눈앞의 간호사가 미운 건 사실이지만 내가 어느 단계쯤 와 있는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했다. 30분 전보다 단 1mm만 더 열렸다고 해도 그 희망에 기대어 참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모님.”
그녀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포기했다. 냉정히 들이키는 숨에서 ‘고려할 필요도 없는 거절’의 기색이 느껴졌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대로 나가버리는 문소리가 야속했지만 전문가의 판단이려니 하고 믿었다. 그 후로도 몸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몇 번 주기처럼 왔다 갔고 나는 남편을 부서질 것처럼 끌어안고 읍하는 비명을 내질러 내는 것으로 버텼다.
버티기.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임신은 내 계획에 없는 거였다. 피임을 철저히 한 것도 아니지만 나는 왜인지 금언처럼 그 이벤트를 배제하곤 했다. 그게 딱히 커리어라든지 경력 단절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그런 것에 크게 집착하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출산의 고통이 더 두려웠다.
하지만 내 이유를 들은 워킹맘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었다. 낳는 건 금방이야, 낳고 나서가 문제지. 그 말이 항상 따라붙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회사 일 힘들다는 것은 서슴없이 말하면서 몸을 찢어 출산하는 것은 꼭 별일 아니라는 듯, 또 그렇게 여기는 게 숭고한 일이라는 듯 말하는 것이 때론, 좀, 역하게도 느껴졌다. 물론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회가 강요하는 그런 감수성에 절대 속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생각했다.

 

“아기 머리 보이잖아!”
얼마 지나지 않아 귓가에 웬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들어온 의사의 목소리였다. 마치 시작 버튼 눌린 게임기처럼 간호사 너댓 명이 분주하게 분만실을 들락거기 시작했다. 커다란 조명이 번쩍번쩍 켜졌다. 무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의사는 화나 있었고 간호사들은 바빴다. 문득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간호사 얼굴이 보였다. 내게 진통 주기가 길다고 태연하게 말하고 나가버렸던. 저 간호사, 나한테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새도 없이 더는 못 버틸 고통에 잡아먹혔다. 시간과 공간 인식이 제멋대로 산란해졌다.
“산모님, 이번 진통까지만 참아 봅시다. 그다음엔 낳을 거예요. 힘 주는 법 알죠?”
의사의 본격적인 말이 들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 보고 잠깐 나가 있으라고 말하는 것도 어렴풋이 들렸다. 남편이 떠밀리듯 나갔다. 나와 눈이라도 한 번 맞추고 나가려는 모습이 보이면서도 안 보였다. 남들이야 어떻든 말든 나는 내 고통에 빠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밀려드는 고통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따끔거림과 함께 의사의 전초전이 이뤄졌다. 의사가 이제 힘을 주라고 했다. 나는 거친 비명을 지르며 뱃속을 밀어냈다. 간절한 의지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악다구니를 썼다. 다리가 벌벌 떨렸다. 두어 번 그랬을까. 드디어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하고 빠져나갔다.
“아이쿠, 요 녀석!”
인자해진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해져 천장을 올려다봤다. 막혀 있던 숨이 하염없이 입술 밖으로 흘러내렸다.
곧 남편이 들어왔다.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놀라웠다. 내게서도 웃음이 나왔다.
고통이 금방이라는 말은, 고통은 결국 지나간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결국 웃었으므로 금방 끝난 ‘기분’이 든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최소한 거짓말은 아닌 거였다.
그 순간 나는 공교롭게도 우신영을 떠올렸다. 퇴사하는 그날까지도 낳는 건 금방이라는 말을 남긴 그녀를.

 

2
내게 낳는 건 금방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주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나는 어정쩡하게라도 웃어 보였지만 우신영에게만큼은 웃어 주지 않았다.
우신영은 나보다 4살 많은 애 엄마 사원이었다. 처음부터 내 팀원인 건 아니었다. 코로나 시국에 해외 사업팀 몇 개가 아예 해체됐고, 그녀는 다른 팀에서 데려가지 않아 유일하게 이재민 신세가 된 사람이었다. 그녀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그녀가 가져온 포트폴리오를 보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일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팀장님, 제가 맡을 가맹점 리스트업했습니다. 내일 회의 때 보여드릴까요?”
우신영이 팀장실 문을 빼꼼 열고 물었다.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러워 하는 듯해서 그녀의 긴장을 좀 풀어 주고 싶었다.
“먼저 한번 볼까요?”
“아, 네.”
그녀가 눈에 띄게 기뻐진 얼굴로 들어왔다. 솔직히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나를 존중해 줬기에 안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 실무자로 같이 일했었던 기존 팀원들과 달리 우신영은 처음부터 나를 팀장으로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보고서도 아주 좋았다. 기존 방식과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왔는데, 첫 페이지부터 가맹점을 가나다순이 아닌 매출순으로 정리한 게 파격적이었다. 팀장 입장에서는 궁금한 정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깔끔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금방 파악을 다 하셨어요?”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가맹점을 특별히 더 신경 써야 할지 하는 것들을 충실히 조언해 줬다. 그날 대화에 따르면 그녀는 일본어를 전공했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다른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곳 상사와 금방 결혼하고 임신해 경력 단절을 겪었다. 8년이나 일을 못했는데도 전공을 살려 취직할 수 있어서 행복했는데 얼마 안 돼 코로나가 터졌다. 금방 끝날 줄 알았지만 그게 해를 넘기면서 팀이 해체되고 퇴사 위기에 놓였다가 겨우 살아남았다. ‘팀장님 덕분에.’
그리고 또 다른 정보들은…. 남편이 바빠 사실상 아기를 혼자 키우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대화를 화기애애하게 마무리하며 나는 말했다.
“아주 좋아요. 이렇게 여섯 부 뽑아서 내일 회의 때 함께 보시죠. 아, 그리고 스테플러 말고 그냥 클립으로만 철해 오시면 돼요.”
우리 팀은 스테플러보다는 클립을 주로 쓴다는 걸 귀띔해 주는 차원이었다. 나는 그 말이 그녀에게 가닿았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다음날에도 스테플러를 찍어서 들어왔다.

 

3
“정색이라도 해야 하나?”
말하면서도 그게 정색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말하는 사람이 의심하니 듣는 사람도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남편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그럴 것까지 있어? 클립이든 스테플러든 그게 뭐가 중요해. 일은 잘한다며.”
“그건 그렇지.”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뭘 더 설명하든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만 강조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마음먹고 다음날 출근했다. 그런데 또 아침부터 스테플러가 단단히 찍힌 보고서를 보자 짜증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스테플러를 고집할수록 원래 팀원들도 지독하게 클립을 고수했다. 난 클립이나 스테플러 중 무엇을 쓰라고 딱 정하거나 어느 것을 쓰든 상관없다고 딱 정해 줄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결국 혁찬이 밥 먹다 그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여자 도대체 왜 그래?”
“뭐가?”
나는 그때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도 팀장 입으로 직원 하나를 같이 험담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설렁탕 국물만 휘휘 저었다. 뿌옇게 올라오는 훈김을 뚫을 기세로 그가 말했다.
“뭐가? 진짜 뭐가 문젠지 몰라서 그래? 팀장님이 그 여자 보고 클립으로 철해 오라고 말하는 걸 내가 세 번은 들었어. 그런데도 스테플러를 고집하는 게 과연 우연일까? 머저리도 그쯤 말하면 알아들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내가 타이르듯 말하자 그가 더 흥분했다.
“그깟 사소한 것도 안 따르는 사람인 건 좀 ‘중요하지’ 않나?” 
혁찬은 오래 함께 일한 팀원이었다. 동갑인데 입사가 나보다 늦었다. 쭉 말을 놓고 편하게 지냈고 지금도 좋은 사이였다.
그는 내가 이직하면 운 좋게 바로 이 팀을 맡을 게 기정사실인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곧 이직할 계획이었다. 그는 내게 꽤 스카우트 제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여기서 1년 정도만 팀장 경력을 쌓고 떠날 생각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지켜봐야지. 아직 한 달도 안 됐어.”
“보고서도 끝까지 자기 것 고수하는 거 봐. 자기 보고서는 완벽하니까 바꿀 필요도 없고 클립을 쓸 필요도 없다는 거야, 뭐야?”
“말 나온 김에 보고서 그렇게 바꿔 보는 건 어때? 보기 편하던데.”
혁찬이 숟가락을 홱 내려놓았다. 그는 매사에 열정적이었다.
“이래서 벼슬 달면 변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할 줄 몰라서 안 했을까? 실무자 입장에선 생각 안 해봤어?”
“됐어. 그만해.”
그는 그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여자 때문에 우리까지 이렇게 피해 보잖아. 진짜 개 민폐라니까. 아니야?”
그냥 민폐와 개 민폐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상 나와 그의 간극은 영원히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단어에 동의를 요하는 질문에 나는 절대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엔 그저 오랜 공백기에 사회생활 요령을 좀 잃은 정도였다.
“팀장님은 너무 물렀어.”
내가 두 번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서야 직성이 풀린 그가 밥을 한 덩어리 퍼서 푹 집어넣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미 그때 우신영이 당하는 텃세가 만만찮으리란 것을 짐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팀장실 밖에서는 이미 혁찬이 사실상 팀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도.
그때 나는 현명한 팀장의 역할을 고민하기보다는 무안하지 않은 팀장의 역할을 고민했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정하고 있다. 이제 와서.

 

4
혁찬의 뒷담화는 계속됐다. 자리를 피해 보기도 하고 전보다 함께 식사하는 횟수를 줄여도 보았지만 대화할 기회만 있으면 그는 우신영 얘기를 꺼냈다.
어느 정도 걸러 듣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얘기들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야근을 그렇게 많이 한다고? 누가? 취합하는 박 대리가?” 
“아니? 우신영 사원이!”
혁찬의 대답에 나는 벙찐 표정을 다 들켰다. 그러니까 그의 얘기는, 우신영이 바꾼 보고서가 기존 매니저들이 쓰던 보고서와 달라서 주 1회 있는 임원회의 자료를 내기 위해 거의 매일 야근을 한다는 거였다. 다시 원래대로 바꿔서 내느라.
또 팀 회의에는 자기 방식대로 만든 보고서를 내느라 야근을 하고. 
그래. 자기가 만든 일을 하느라 자기가 야근을 한다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 싶으면서도….
“그래.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 하겠다는데 자기 혼자 그러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그렇게 쓸데없는 걸로 야근하고는 정규 업무시간에는 툭하면 연차 내잖아.”
그 비난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나도 들었다.
“어제도 갑자기 도곡점 못 가겠다고 해서 내가 땜빵했잖아. 나 같으면 야근할 시간에 애 병원을 미리미리 갔다 오겠다. 뭔 놈의 애가 아침 아홉 시마다 아픈 거냐고.”
“고생했어.”
“암행은 못 간다고 아예 팀원들한테 못 박아 놨다던데. 주말에 애 봐줄 사람 없다고.”
“뭐?”
우신영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팀원들이 왜 불만인 건지 알 것 같았다. 주말 암행을 아예 못 가는 건 곤란한 일이었다. 가맹점 관리하는 팀인데 불시에 점검 나가는 일을 못한다면 도대체 뭘 하겠단 말인가. 게다가 미리 약속을 하고 가는 정기 점검까지 펑크를 내는 건 점주들에게 민원 들어오기 딱 좋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주말에 애 봐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나야 애 보는 일이 어떤 건지 모르니 어렴풋이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평일에는 어린이집에 맡기면 되는데 주말엔 도저히 맡길 사람이 없다는 건가 싶었다.
“JP사업팀에 있을 때는 일본 출장도 전혀 안 나갔다던데? 이야. 일본 안 가는 일본팀원이라니. 회사 다니기 참 편해. 그치?”
“진짜야?”
“그래. 거기 팀장이 김상식이었잖아.”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심장이 돌연 쿵쿵 뛰었다. 김상식은 몇 년 전에 우리 팀에도 잠깐 팀장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외부적으로는 평판이 좋았지만 내부에서 보기엔 힘든 사람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팀원들을 힘들게 만든 게 몇 번이던가. 그때 요령 피우던 다른 팀원을 묵인해서 나와 혁찬이 독박 썼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울분이 올라왔다.
처음으로 팀장으로서 시험대에 선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제안했다.
“업무를 좀 더 떼어주는 건 어때? 가맹점 교육을 일괄로 맡으라고 하면 어떨까? 지금처럼 각자 챙기지 말고.”
“괜찮은데? 그것만 해도 우린 많이 줄어.”
혁찬이 의외로 반색했다.

 

다음 날 나는 내선 전화로 우신영을 불렀다.
팀장실 문은 투명한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 안과 밖을 서로 볼 수 있었다. 부른 지가 꽤 되었는데도 안 들어오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사무실 한구석에 뒤돌아 서서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까지 안 들어오는 걸 보면 무언가 중요한 통화려니 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하나하나의 행동들이 점점 참을 수 없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 흘끔거리는 시선을 봤는지 저쪽에서 혁찬이 불쑥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큰 덩치로 가려진 우신영은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새파래진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헐레벌떡 들어왔다.
“팀장님. 죄송해요. 통화가 길어져서….”
무슨 통화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 안 물었는데, 그녀는 기어이 해맑게 말을 했다.
“오늘 야근해야 할 것 같아서 시부모님께 부탁드리느라요. 병원도 좀 데리고 가주셔야 하고요. 그런데 애기는 할머니 댁 가기 싫다고 고집 부리구….”
그녀는 나와 사적인 얘기를 나눌 정도로 친해졌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려 얼결에 질문했다.
“애기가 몇 살이에요?”
“여덟 살이요.”
다시 황당해졌다. 누가 여덟 살을 ‘애기’라고 부른단 말인가. 난 이제까지 진짜 아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건 내 잘못이었다. 그녀는 분명 경력이 단절된 지 8년이라고 했으므로 자녀가 두세 살짜리 아기라고 마음대로 단정 지은 건 나였다. 그저 당연히 둘째도 있나 보다, 생각한 것도 내 잘못이고.
하지만 나는 하나를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애기’가 자주 아픈가 봐요.”
“네, 태어날 때부터 비염이 있어서요.”
나는 태어나서 크고 작은 비염 하나 안 달고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팀장님은 아직 없으시죠?”
“네?”
“아이요.”
“네.”
“나중에 낳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말 전쟁이에요.”
내 미래에 아기가 생길 거라고 확신하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애 엄마 대부분이 범하는 오류였다. 미혼보다는 기혼이, 둘보다는 셋이, 자식 하나보다는 둘이 좀 더 인생의 우월한 형태라고 믿는 오류. 그렇게 말하는 사람 치고 남편과 시댁 욕을 안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난 그들의 행복이 언제나 의심스러웠다. 전쟁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해외 출장 갈 일 없다고 약속하고 결혼한 남편은 맨날 해외로만 돌고, 몇 번 싸우다 포기했어요. 남편도 이젠 저보고 그만하라고 하더라고요. 자기가 한 말은 싹 잊고.”
그녀가 남편 욕을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펜만 돌렸다.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자기 멋대로 풀어놓으면서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가 고민하게 만드는 그녀의 무지함이 신물났다.
“솔직히 요즘은 제가 남편이란 게 있는지도 까먹는다니까요. 시차 안 맞는 나라에 가 있으면 두세 달씩 연락을 안 할 때도 있으니까.”
이 대목에선 좀 놀랐다. 그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낳을 때부터 혼자 낳았거든요. 산부인과도 다 혼자 다니고. 입덧에, 소양증에, 우울증도 심하게 왔었어요. 입원했다고 오늘 중 낳을 것 같다고 전화했더니 알겠다고 자고 있겠다고 하더라고요. 거긴 새벽이라구.”
“아니, 어떻게 참으세요? 전 못 참을 것 같은데.”
그러자 그녀가 자비로운 성인의 얼굴으로 말했다.
“그래도 애가 예쁘니까요. 팀장님도 낳아 보면 알게 돼요.”
나는 혀가 싹 떫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회사 다니니까 숨통도 트이고 얼마나 살 것 같은지 몰라요. 저는 지금 제 일을 한다는 게 너무 좋고 감사해요.”
“지금보다는 더 하셔야 할 거예요.”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말해 놓고 잠시 호흡을 골랐다. 회사가 당신 숨통 트이라고 다니는 곳이냐고 말할 순 없으니까.
“지금 우신영 씨 업무는 많은 편이 아니에요. 일단은 다른 팀원들 걸 조금씩 떼어 드렸지만 다른 업무도 드릴 거예요.”
“아, 그럼요. 그럼요. 저도 제 업무량이 적은 건 알고 있었어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구요….”
타이밍을 놓쳤다는 말을 잠깐 의심했지만 양손바닥을 떨며 허벅지에 문질러 닦는 그 애잔함까지 거짓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제대로 된 첫 사회생활에 긴장한 전업주부의 모습만 있었다.
“가맹점 단체 교육을 도맡아 해 주시면 어떨까 해요. 강의장 잡고 교재 제작하고 점주님들 참석 챙기고 그런 것들이에요. 분기마다 한 번씩 하는 건데, 한창 할 땐 바쁘겠지만 교육 당일엔 팀원들도 같이 도울 거고요. 교육은 평일이니까 주말 부담도 없으실 거고.”
“아…, 제가 주말엔 못 나온다고 말한 걸 전해 들으신 거죠? 죄송해요.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녀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다 쳐다봤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5
우신영이 처음으로 대강당을 빌려 교육을 열었던 날이었다. 연단에 올라간 강사가 마이크를 툭툭 치며 우리 쪽을 쳐다봤다. 마이크가 조용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우신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교육장에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시설팀에 전화해 봐. 여분 마이크 있는지.”
그때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우신영 사원한테 다 줬다는데요. 여분까지.”
팀원들이 흩어져 그녀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의 핸드폰은 계속 통화 중이었다. 하필이면 또 대강당을 빌렸다. 그 큰 강당에서 마이크 없이 교육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설마 하며 다시 사무실로 가 보았고 그녀는 놀랍게도 거기 있었다.
“우신영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예빈아, 엄마 지금 끊어야 해. 응, 통화 못 해. 할머니 말씀 잘 듣구….”
“우신영 씨!”
나는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아이한테 다 들릴 거란 걸 알지만 일이 먼저였다. 우리 권역 점주 중에는 대표의 오랜 고향 친구까지 있어 더 조심해야 했다. 본사의 작은 실수도 놓치지 않고 트집을 잡는 사람이라 지금까지 혁찬이 노련하게 관리하고 있던 점주였다. 공든 탑에 흠이 가게 생긴 거였다.
“그럼 어떡하라구. 엄마 일해야 되는데….”
“우신영 씨! 마이크가 없다고요!”
내 외침에 우신영은 오히려 안도한 듯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뗐다. 손바닥으로 자기 핸드폰의 마이크 부분을 가리더니 내게 사람 좋은 입 모양을 해 보였다.
“마이크 세팅 다 해놨어요. 저 애기가 아파서 잠시만….”
“고장이 났다니까요! 당장 전화 못 끊어요? 본인 업무면 시작부터 끝까지 거기 붙어 있어야지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때 누군가 문을 세게 열고 들어왔다. 거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봐도 혁찬이었다. 등 뒤에서 나타난 그는 냅다 우신영의 핸드폰을 뺏어 바닥에 콱 던져버렸다. 우신영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내 심장도 떨어질 뻔했다. 그가 위압적으로 긴 팔을 뻗어 문을 가리켰다.
“당장 올라가요.”
“혁찬 씨, 너무 흥분하지 말고….”
“놔 봐, 지금 이수점 점주 시동 걸었는데 책임질 거예요? 그 사람이 큰소리치기 시작하니까 점수 낮은 점주들 이때다 싶어서 한마디씩 난리잖아! 20분 늦었으니 알바생 시급을 보상해라, 점수를 원위치해라, 본사도 늦으면서 점주가 늦으면 점수 깎을 거 아니냐! 어?”
마지막 반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우신영도 비슷한 심정인 것 같았다. 그깟 마이크 고장 난 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애한테까지 들리게 이럴 수 있냐는 듯 원망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지금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을 수 없는 이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정말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승진을 앞두고 이수점 관리에 각별히 공을 들였었던 혁찬으로서는 분노하는 게 당연했다.
우신영은 여전히 발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답답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이때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이런 씨발! 내가 말했지. 이 여자 개민폐라고!”
육아와 일이 병행이 안 되겠구나, 하는 절망.
“혁찬 씨, 그만해. 올라가서 조치하면 되는 일이야. 진정해.”
“지금 욕하신 거예요? 저도 더는 못 참아요. 그깟 마이크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 좀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텃세 심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 아니죠!”
“뭐? 좀스러워? 당신은 이 업무 하나 맡은 것도 못 해서 팀을 좀먹고 이 지랄이야?”
나는 아직도 안 움직이는 그녀에게 진절머리가 나 버렸다.
“우신영 씨, 마이크 여분 줘요.”
“안 들려? 마이크 여분 어딨냐고 묻잖아!”
“아, 제 자리에 있다고요!”
이제는 그녀도 화를 냈다. 나는 마이크만 챙겨서 곧장 나가고 싶었다.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 두 사람 때문에 더는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크를 집어 드는 찰나 분명히 보았다. 강사의 차량 번호가 쓰인 쪽지를. 사내 시스템에 주차 등록을 해 주러 잠깐 내려왔으리란 사실을. 하지만 그들에게서 손을 떼어버리고 싶은 내 움직임이 더 빨랐다.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애가 때맞춰 딱딱 아프고 뭐 그러는 줄 아냐구요!”
우신영이 그 자리에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와서도 이해받지 못했다.
“그러게 왜 굳이 그 사람한테 업무를 더 줬어? 안 그래도 야근하는 사람한테.”
“그럼 일은 미혼이거나 애 없는 사람만 해야 해? 애 키운다고 이거 빠지고 저거 빠지면 도대체 회사를 왜 다니는 거야?”
“오죽하면 그렇게라도 다니겠어? 우리 팀 윤 주무관은 애가 열 살인데 아직도 힘들어 해.”
“당신은 철밥통이니까 속 편한 소리나 하겠지!”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와 결혼해 사는 동안 맹세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내가 보는 편의가 훨씬 많았다. 집안일이나 가끔 정수기 점검 때문에 연차를 내야 하는 일 같은 것들은 언제나 남편 담당이었다. 그런 일에 고맙다고 말할 타이밍도 다 놓쳤는데.
남편이 차분히 말했다. 그는 기분이 상했을까.
“네가 요즘 너무 날서 있는 것 같아. 사정 봐서 좀 배려해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다른 팀원들이 피해를 보잖아.”
“그것도 전해 들은 말이잖아.”
말문이 막혔다. 사과하려던 생각이 금세 사라졌다. 한 조직의 팀장인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정을 배려해 주면서도 야근 한 번 한 적 없었고 고과에 불이익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의 너른 여유에 반한 건 사실이지만 그 여유가 때로는 숨 막혔다.
“성인군자 나셨어.”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 봐. 혁찬 씨 입장에선 예민할 수밖에 없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미리 쳐내고 싶은 거 아니야?”
“그럴 사람은 아니야.”
“확신할 수 있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은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6
그로부터 한 달 뒤 우신영은 퇴사했다. 퇴사하면서도 나에게는 악감정 없다는 듯 작은 선물을 책상에 놓고 갔다. 작은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 가진 팀장님♡ 예쁜 애기도 낳아 행복한 가정 꾸리시길요.

 

정말이지 웃어주려야 웃어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퇴사자에게 주는 금일봉만 어색하게 건넸다. 우신영과의 인연은 그걸로 끝났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정체 모를 미안함은 조용한 모기 소리처럼 주기적으로 나를 맴돌았다.

 

그로부터 세 달 뒤 나는 임신했다.
화장실에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에 남편이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나는 멍해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달에 생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져 테스트기를 사온 참이었다. 두 줄을 보는 순간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임신했어.”
“뭐?”
“나 이직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그쪽이랑 계약서만 쓰면 되고 혁찬 씨한테도 다 말해 놨단 말이야.”
“지금 그게 문제야?”
“도대체 언제 된 거지? 말이 안 돼. 테스트기가 틀릴 수도 있으니까 내일 병원에 가 봐야겠어. 아니야. 아예 병원도 안 가는 게 낫나? 몰랐다고라도 할 수 있잖아.”
노란 불빛의 사면초가에 갇힌 기분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남편이 계속 문을 두드려댔다. 나는 이직에 대해 빠르게, 그리고 나에게 가장 손해가 안 될 쪽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일단 혁찬에게 씻을 수 없는 민폐였다. 그럼에도 회사에 남아 있느냐, 쫓기듯 이직하느냐, 묻는다면 답은 하나였다. 임신한 상태로 이직을 해버렸다가는 이도저도 아닌 신세가 될 게 뻔했다. 커리어라는 게 이 순간 이토록 간절해질 줄은 몰랐다.

 

7
입원실로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까 그 간호사였다. 아까 일은 다 잊은 듯 사무적으로 들어와 내 체온을 재고 링거 줄을 매만졌다.
“신생아 면회하시겠어요? 힘드시면 오늘 쉬고 내일 보셔도 돼요.”
“갈게요.”
마우스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꿰맨 부위가 불에 덴 것처럼 따가웠다. 나는 아이를 낳자마자 남편의 도움을 받아 누운 채 일을 하고 있었다. 37주에 양수가 터져 회사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출산휴가를 냈다.
“괜찮겠어?”
“아까 제대로 못 봤어.”
그뿐이었다. 모성애라고까지 이름 붙일 건 아니었다. 그냥 내가 낳은 결과물을 한 번은 들여다봐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의 부축을 받아 신생아실에 도착했다. 신생아실 간호사가 플라스틱 침대에 아기를 싣고 나왔다. 50cm의 붉은 아기가 유리창 하나를 두고 우리 앞에 놓였다. 나와 남편은 잠시 말을 잃었다.
“너무 작다….”
“응.”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작은 아기였다. 남의 신생아를 볼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 작은 게 가슴을 들썩거리고 입을 우물거렸다. 채 트이지 않은 눈은 갓 태어난 생명체라는 걸 티 내듯 물기로 번들거렸다.
또 눈물이 흘렀다. 연약한 존재가 살아보겠다고 꿈틀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 한가운데 영구한 바늘이 박힌 듯 아리었다.
“미쳤나 봐. 나 아까부터 왜 이래….”
아까 혁찬과 통화한 후부터 나는 수도꼭지처럼 툭하면 눈물이 나는 상태였다. 임신 소식을 전한 날부터 그는 여덟 달 내내 냉랭했고 나는 허수아비 팀장처럼 지냈다. 축하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축하를 해 주지 않으니 ‘개 민폐’라고 여기고 있으리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여덟 달 내내 그의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애썼었다.
“자연스러운 거야. 참지 말고 울어.”
“됐어. 애도 아니고.”
“흘려듣지 마. 산후 우울증 잘못 오면 평생 간다잖아.”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무서웠는지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지다 못해 회색으로 변했다. 꼭 쇳덩이가 달궈지는 것처럼 큰일 날 것 같아 나는 아휴, 아휴, 어떡해, 작은 탄식만 반복했다.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거 아닌가요?”
“신생아들 다 이래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답변은 들었지만 더 울리면 안 될 것 같아 그만 가겠다고 했다. 신생아실 커튼이 다시 쳐지고 침대 바퀴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때까지도 아기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나 아닌 누군가의 건강이 걱정됐다. ‘완벽한 건강’이 아닌 이상 죽는 날까지 저 존재의 건강이 걱정될 것 같았다. 그건 8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똑같을 것 같았다.
“들어가자.”
남편의 부축에 의지해 발걸음을 돌렸다. 천천히 돌아왔다. 입원실 앞에 아까 그 간호사가 여전히 서 있었다. 우연인 줄 알고 묵례하고 지나쳤다.
“저기, 산모님.”
그녀가 선뜻 말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나는 아까의 야속함이 다시 떠올라 또 눈물이 났다. 이제 와서 뭘 하려는 거며,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아까는 죄송했어요.”
그녀는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쓱한 눈을 본 것보다 거기에 더 놀랐다. 내가 차마 하지 못한 것이었고 이제 와서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정말 ‘못’하는 거냐고 물으면, 사실 번호는 저장되어 있으니 언제든 하려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네. 괜찮아요.”
나는 그녀의 용기를 진심으로 높게 여기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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