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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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위를 맴돌던 손가락이 마침내 춤을 추며 타닥거렸다. 모니터에 하얀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텅 빈 공간이 채워지는 희열이 나를 들뜨게 했다. 창밖으론 희미한 햇살이 창틀에 걸린 먼지조차 반짝이게 만들었다. 한때는 작가, 그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가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숨 쉬듯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떠 따뜻한 커피를 내리고, 조용한 방에 앉아 글자들과 씨름하는 일상을 운명이라 느꼈다.
나는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래도 꽤 잘나간다는 사료 회사에서 영업직으로 7년을 일했다.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은 늘 허전했다. 작가의 꿈. 그 간절한 열망에 사로잡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동안 쥐꼬리만큼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서울로 상경해, 신림역 근처에 작고 낡은 오피스텔을 얻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기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허다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늘 든든했다.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지옥철이라 불리는 2호선에 몸을 싣고 인파에 휩쓸리는 경험은 서울 생활의 고달픔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빽빽한 고층 빌딩 숲과 숨 막히는 소음, 그리고 그 속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화려한 서울의 이면에는 분명 고달픔과 외로움이 숨어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도 나만의 빛을 찾아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방금 읽기를 마친 소설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의 고뇌와 사유가 느껴져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게 했던 책이다. 타인의 세계를 엿보는 즐거움, 그리고 그 안에서 나만의 깨달음을 얻는 기쁨. 독서는 나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읽는 즐거움만큼이나 쓰는 즐거움도 컸다. 머릿속에 떠다니던 모호한 생각들이 손끝을 거쳐 구체적인 형상을 갖출 때의 그 경이로움이란! 때로는 막막하고 힘겹기도 했던, 한 문장, 한 문단이 완성될 때마다 찾아오는 성취감은 그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해줄 만큼 달콤했다.
나는 이 일이 너무나 좋았다.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하루하루가 새롭고 의미 있었다.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기 작가는 아니었지만, 나만의 속도로 꾸준히 글을 쓰고, 독자들과 조용히 소통하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했다. 몇 번의 공모전에 탈락했어도 새벽까지 불을 밝히는 날도 많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기분이었다. 나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내어 누군가가 들어와 잠시나마 머물다 간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작가라는 직업은 충분히 가치 있었다.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을 느꼈고, 이 평온이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은 너무도 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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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오후는 ‘글밭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구립 도서관 한구석에 모여 서로의 습작을 읽고 솔직한 감상을 나누는 작은 모임. 나를 포함해 예닐곱 명 남짓의 작가 지망생과 작가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그 시간만큼은 글쓰기의 외로운 여정에서 벗어나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얻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위안에 다른 감정들이 조금씩 섞여들었다.
이번에 K 작가 단편 말이야, 와, 진짜 미쳤던데? 결말에서 소름 돋았잖아?
어휴, P 작가는 또 얼마나 늘었는지. 문장력이 아주 그냥 물이 올랐다니까.
합평 시간이 거듭될수록 나는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매번 나를 놀라게 했다. 기발한 상상력, 허를 찌르는 서사 전개,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는 유려한 문장들. 그들의 세계는 깊고 넓었으며, 그 안을 유영하는 인물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글과 비교하게 되었다. 공들여 쓴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글에 비하면 내 글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했다.
저들은 어떻게 저런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지? 나는 왜 저렇듯 활기차게 쓰지 못할까?
감탄은 이내 부러움으로 변했고, 부러움은 곧 질투의 독으로 스며들었다. 웃는 얼굴로 그들의 작품을 칭찬하면서도, 속으로는 시기와 자책이 뒤엉켜 속앓이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질투하며 고통스러워했듯 나는 동료 작가들의 빛나는 재능 앞에서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성공이 나의 실패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글자 하나하나가 나를 찌르는 비수 같았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책상에 앉아 하얀 화면을 마주할 때마다 무력감이 나를 덮쳤다. 아무리 애써도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제까지 써놓은 글들은 어설프게 유치해 보였다. 나는 정말 재능이 없는 걸까. 평생,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글만 쓰게 될까. 절망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답답했다. 작가로서의 나의 한계를 절감하며, 깊은 고뇌와 고통 속에 빠져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지만, 나의 내면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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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전, 유망한 신예 작가를 발굴하는 차원에서 대형 출판사에서 기획한 공모전 공고가 떴다. 푸짐한 상금은 물론, 파격적인 혜택까지 제시되어 창작에 목마른 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응모 기일이 두 달 남짓 남았다는 사실에, 그전에 써 놨던 초고 원고 중 가장 공들였던 작품 파일을 망설임 없이 열었다.
공모전에 어울리는 주제와 서사로 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하여 수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솟아나는 열정과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들떴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고,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선까지 수십 번 고쳐 가며 교정에 교정을 거듭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창작의 즐거움은 점차 고통으로 변해 갔다. 인물들의 관계는 엉성하게 꼬여만 갔고, 서사는 좀처럼 매끄럽게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이 나오지 않아 둔탁한 소리를 내며 책상을 내리치는 일이 잦아졌다.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고, 혀끝에 맴도는 쌉쌀한 커피 향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과연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깊은 회의감이 시커먼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고, 흡족한 마음에 작품을 출품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안해졌다. 출품한 작품을 다시 읽어보니, 눈에 보이지 않던 오타도 보이고, 문법에 맞지 않은 비문도 들어왔다. 여기서는 이런 대화를 넣을 걸, 묘사가 상투적이잖아, 클라이맥스가 너무 약해. 극적인 반전으로 결말을 맺었으면 완전 빵 터졌을 텐데. 아니, 브로맨스적 요소를 가미했으면 좀 더 흥미로웠을지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출품할 걸. 마감 3일 전에 망설임 없이 출품한 것이 후회되었다. 혹시나 마감 전의 출품작은 심사위원들이 괄시할 것 같은 생각에 미리 제출한 것이었는데, 나의 오판인가? 패착이었나? 미련과 후회로 매시간 심장의 벌렁거림을 감당하지 못하고, 고통의 심연 속으로 나를 마구 쑤셔 넣으며 흔들어댔다. 나는 그 속으로 더 깊게, 깊게 빠져들었다.
하루하루가 마치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둔탁한 소리가 귀에 울렸고, 이메일 알림이라도 뜨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함께 손이 덜덜 떨려 화면을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다. ‘글밭 모임’에서 동료 작가들을 만날 때면, 내면의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심지어는 대범한 척 행동했다. 속으로는 K작가는 어떤 주제로 작품을 냈는지, P작가는 또 얼마나 심오한 글을 썼을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모두가 겉으로는 평온한 척했지만, 서로의 눈빛 속에는 감출 수 없는 희미한 초조함이 스며 있었고, 그 미묘한 긴장감 속에서 괜한 자존심에 더 시건방진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시간에는 그 초조함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밤이 되면 나도 모르게 집을 나서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 없이 뱅뱅 도는 지하철 안에서 창밖의 황량한 도시 풍경은 마치 흑백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귀를 찢을 듯한 쇳소리와 진동이 온몸을 울렸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주 앉은 승객들은 저마다 이어폰을 꽂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거나, 친구와 깔깔거리며 통화를 하고, 어떤 이는 고단함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평온한 듯했다. 그러나 나만이 홀로 어둠 속을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과 초조함은 고통에 짓눌려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매일 공모전 홈페이지를 들락거렸고, 혹시나 스팸함에 들어가 있을까 싶어 메일함을 몇 번이고 새로 고침했다. 그러나 텅 빈 공지나, 애타게 기다리던 합격 메일 대신 도착한 건 그저 스팸 메일뿐이었다. 또한 당선자에게는 발표 전에 시상을 위해 전화로 알려주는 것이 문학계의 관례라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최 측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기다렸다. 끝내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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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공모전에 출품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상금을 거머쥔 적도 있었고, 상금 없이 상패만 수령한 적도 있었다. 단 한 번으로 끝나 버리는 시험과 같은 것도 아니기에 미련스럽게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떨어진 공모전은 잊고 새로 시작하자고 수백 번 되뇌었다.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손끝은 자판 위에서 미끄러질 뿐이었다. 머릿속은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고, 지난번의 실패가 검은 먹물처럼 번져 글자들을 지워버리는 듯했다. 마음처럼 쉽게 글이 써지지 않았다. 패배감과 함께 찾아온 무기력감은 텅 빈 화면만큼이나 막막했다. 손가락은 자판 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타닥거리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도무지 다음 문장을 이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 행위 자체가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어제까지 나를 지탱하던 열정이 한순간에 바스러진 기분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분명한데, 도무지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인물들의 관계는 뒤죽박죽이고, 서사는 엉성하게 꼬여만 갔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다. 글쓰기가 내게 주었던 즐거움은 온데간데없고, 실패와 좌절감만이 숨을 조이며 짓눌렀다.
한 문장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고통으로 머리를 뜯으며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비명을 꾹꾹 눌러 삼키며 텅 빈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날카로운 진동 소리가 고요한 방을 갈랐다. 핸드폰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떴다. K, 글밭 모임에서 나름 친하게 지내는 동료였다. 요즘 통 연락이 없던 터라 반가움보다 먼저 낯선 불안감이 스쳤다. 녀석은 늘 그랬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 나를 흔들어 놓곤 했다. 웬일일까 싶어 망설이던 손가락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최 작가! 나 드디어 사고 쳤다!! 이번에 공모전 대상 탔다!! 완전 꿈만 같아!!
공모전 대상. 머리가 띵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내가 간절히 바라며 가작이라도 붙여주었으면 염원하던 그 공모전에? K가, 대상을?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한순간 멍해졌다. 그리곤 진심으로 축하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시커먼 질투심이 물밀듯 밀려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렇지만, 애써 태연한 척 답장을 보냈다.
헐, 대박!!! 미쳤다.
김 작가!!!! 완전 축하한다.
진짜 네 글은 대상감이었어.
진즉에 탔어야 했어. 멍청한 심사관이 너무 늦게 알아본 거야!!!!
와~~~ 축하한다 축하해,
와~~~ 내가 시원하게 한턱 쏜다!!!!!
과장되게 감탄사와 감탄의 느낌표를 난발하며 온갖 축하 이모티콘을 섞어 가며 답장을 보내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책상에 내팽개쳤다.
대상이라니. 나는 여기서 한 문장도 못 쓰고 썩어가고 있는데….
축하한다는 문자는 보냈지만, 배알이 뒤틀리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나의 초라함이 K의 빛나는 성공 앞에서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느낌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축하한다는 말 뒤에 숨겨진 시기심과 자괴감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가슴을 찔러댔다. 한때나마 우리는 분명 비슷한 출발선에 서 있었다고 여겼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과 노력을 글쓰기에 쏟아부었는데, 왜 결과는 이렇게나 다를까. 그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재능의 차이일까, 노력의 부족일까. 아니면 그저 운의 문제일까. 복잡한 생각들이 뒤섞이며 머리가 저려왔다.
K의 글은 늘 심리 묘사가 분석적이고 문장이 재치 있으며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었다. 그뿐인가? 기발한 상상력은 말할 나위 없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읽을 때마다 감탄했지만, 동시에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그의 글이 빛날수록 나의 글은 초라해 보였고, 그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비웃는 듯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초조함과 동시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처럼 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이 나를 덮쳤다.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고통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 길을 계속 가는 게 맞는 걸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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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화면과 자판을 노려보며 한숨만 내쉬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자료 조사를 위해 인터넷을 뒤적이던 중, 우연히 ‘AI 스토리텔링 도구’라는 광고를 접하게 되었다. 호기심 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반으로 클릭했다. 간단한 키워드 몇 개를 입력하자, 놀랍게도 제법 그럴듯한 시놉시스와 인물 설정, 심지어 사건의 개연성까지 갖춘 스토리가 순식간에 생성되었다. 나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기계가 쓴 글이 얼마나 대단하겠어? 하지만 AI가 제시한 서사 전개는 내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풀리지 않았던 막막함을 단번에 해소해주었다. 꼬였던 실타래가 마법처럼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구나!
무릎을 탁 쳤다. AI가 보여준 방식대로 글을 써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막혔던 부분이 뻥 뚫렸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캐릭터들은 생동감을 얻었다. 작업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더 이상 고민하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AI에게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복잡한 서사 구성도 AI가 척척 해결해주었다. 편했다. 너무나도 편했다. 고통스러웠던 창작의 과정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잘 만들어진 기계를 조작하는 것처럼 쉽고 빠르게 글을 써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AI의 도움을 받는 것이 부정행위를 하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꼈다. 마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는 기분이었다. 귓가에는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것 봐, 이렇게 쉬운데 뭘 힘들게 끙끙거려? 네 시간을 아끼고, 네 고통을 덜어준다고. 훨씬 효율적이잖아? 인정해, 넌 혼자서는 안 되잖아. 재능 없는 네가 작가 행세라도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악마의 목소리는 내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열등감과 불안을 정확히 후벼팠다. 차라리 네가 무능하다고! 그러니 내 도움을 받으라고 조롱하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안의 작은 목소리가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건 네 글이 아니잖아. 네가 직접 느끼고 생각하고 고뇌해서 나온 글만이 진짜 네 영혼을 담을 수 있어! 지금 네가 쓰고 있는 건 겉만 번지르르하고 영혼 없는 껍데기일 뿐이야! 너는 작가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어! 이대로 무너지면 다시는 설 수 없는 거야.
선과 악, 안락함과 고뇌, 효율성과 진정성 사이에서 나는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AI가 내미는 편리함이라는 독배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라는 성배 사이에서 나는 미친 듯이 흔들렸다. 펜을 쥔 손은 AI 도구로 향하는 키보드 위에서 주저했고, 심장은 죄책감과 유혹 사이에서 미친 듯이 요동쳤다. 과거의 내가 머리를 짜내어 피땀 흘려서 썼던 글들, 한 문장 한 문장을 쌓아 올리며 느꼈던 희열과 좌절, 그 모든 과정이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던 시간을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걸까.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것이 내가 꿈꾸던 작가의 모습이었나. 타인의, 아니 기계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대로 AI에게 내 전부를 맡겨버리면,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인간이라는 내가 기계의 노예가 된다는 말인가. 진짜 나는 사라지고, AI의 그림자만 남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감 날짜의 압박, 다른 작가들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글쓰기 자체에서 오는 고통 앞에서 AI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했다. 한 번, 두 번…, AI에 의지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어느새 나는 AI가 만들어준 뼈대에 살을 붙이는 기계적인 작업만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쓴 문장인지, AI가 써준 문장인지 구분이 모호해질 때도 많았다. 나의 개성은 희미해지고, 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AI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완벽했고 시장의 트렌드에도 잘 맞았지만, 그 안에는 나만의 색깔, 나만의 철학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잘 팔릴 만한, 누구나 쓸 수 있는 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거울을 보듯 화면에 비친 나의 글은 낯설었다. 이건 내가 아니었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미 AI의 달콤한 유혹에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중독되어 너무 깊이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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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슬금슬금 내리던 어느 날,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K’라는 이름에 잠시 망설였다. K에게 한턱 쏘겠다는 약속을 쌩까면서 대상 수상 이후 그의 연락을 피했다. 몇 번의 진동 끝에 전화를 받았다. 나의 치졸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K에게 되레 너스레를 떨었다.
대작가님께서 어쩐 일? 요즘 많이 바쁠 텐데 전화를 다 주고?
무슨 바쁘긴, 별말을…, 최 작가 괜찮아? 요새 통 모임에도 안 나오고.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해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나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지방에 있는 본가에 다녀왔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K는 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러곤 작품 쓰느라 바쁘겠지만, 잠깐 만나서 낮술이라도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선뜻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며 망설이자, K는 나의 확답을 재촉했다.
최 작가, 순댓국 좋아하잖아. 혜화역 근처에 기가 막힌 맛집을 알아냈지. 상금 탔으니 우리 오랜만에 소주나 한잔하자고.
낮술?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AI가 제시한 다음 스토리 전개로 가득 차 있었다. 현실 세계는 AI가 만들어주는 완벽한 허구에 비해 너무나도 시시하고 난해하게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열 일 제쳐 두고 나갔을 것이다. 낮술에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만큼 잡기적 수다를 떨거나, 문학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뜨겁게 토론하며 소설적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기력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K의 끈질긴 설득에 못 이겨 결국 나는 집을 나섰다. 인간관계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작용했다고나 할까. 퀴퀴한 방 냄새와 달리,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2호선 지하철에 올랐다.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탔다. 거대한 빌딩들과 도로에 질주하는 차량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거의 한 시간은 족히 걸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허름한 순댓국집에 들어서자 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앉아 있던 K가 반갑게 손을 번쩍 들었다. 그새 안 본 K의 신수가 좋아 보였다. 늘 허름한 점퍼 차림이었던 그가, 노타이에 슈트로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나의 입성을 훑었다. 비록 낡긴 했어도 닥스 남방을 입고 나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순대 모둠 한 접시를 주문했다. 가지런하게 놓인 고깃점이 K의 번들번들한 얼굴처럼 보였다. K와 마주 앉아 벌건 대낮부터 술잔을 기울였다. 빈속에 서너 잔 알코올이 들어가자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야, 김 작가, 너는 좋겠다. 대상도 타고, 책도 내고, 나는 씨발, 씨발. 이게 뭐야…. 글도 안 써지고, 맨날 맨날 AI….
AI! 취중에 튀어나온 말. 그 순간 K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도 상대의 감정 표현에 잘 반응하였기에 나는 그의 낯빛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K의 손에 들려 있던 소맥이 가득 담긴 잔을 바닥에 떨어뜨려 유리컵이 박살 났다. 나는 당황해서 K를 바라봤다. 술잔을 떨어뜨려서 그런지 K는 이상하게 자꾸만 내 눈길을 피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더 신경 쓰여, 나도 모르게 K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그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나는 술이 확 깨는 듯했다. 절대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아차 하는 순간 겨우 한 마디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얼른 입을 막아 그 말을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기 때문에 아마도 K는 무슨 말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가슴이 뜨끔해져 말을 더듬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얼른 얼버무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었다.
아아아니 아아니, 나 나는 작가도 조좆도 아니야. 씨버얼! 재능이 없나 봐! 아무리 해도 안 돼! 그냥 글자 조합하는 기계 나부랭이지…, 좆같은 세상… 더럽다 더러워. 좆같다 좆같아.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급기야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마구 소리쳤다. 나는 이미 주정을 넘어 추태의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나의 치졸한 모습에 더 화가 치밀었다. K가 당황하며 나의 손을 맞잡았다.
최 작가, 왜 그래… 취했어? 그런 말 하지 마. 자네도 충분히 잘…. 자네만… 나도….
K는 핵심이 빠진 듯한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주절주절댔다. 그의 말은 더 이상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잘나가는 동료 앞에서 무너져 버린 나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창피했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추한 모습. 이게 지금의 나였다. 결국 K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술이 깨고 나니 밀려오는 극심한 수치심. 그럴수록 K가 더 부러웠다. 그를 부러워하는 만큼 내게 화가 났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K 못지않게, 아니 K보다 더 대단한 그럴싸한 소설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AI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어서 AI가 뱉어낼 다음 문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현실 세계의 연결은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AI와의 완벽한 협업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 훨씬 편했다.
나의 일상생활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AI 프로그램부터 켰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서 AI가 뱉어내는 글자들을 편집하고 붙여넣는 작업만 반복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능력을 잃어버리자, 세상은 의미 없는 소음들로 가득 찬 곳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아름다움도,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작가로서의 나도, 인간으로서의 나도,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맸다. 마침내 나 스스로 절망의 심연 속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나는 AI의 도움 없이는 단 한 문장도 쓸 수 없게 되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백지 같았다. 예전에는 세상을 관찰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한한 영감을 얻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복잡한 현실보다 AI가 만들어주는 잘 짜인 허구가 더 매력적이었다. 소설을 읽는 즐거움도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책을 볼 때마다 역겨운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혹시 AI가 쓴 거 아닐까? 아마 저 작가도 어쩌면 몰래 AI의 힘을 빌렸을 거야.
괜한 피해 의식과 함께 나는 다른 작가들의 글에서 기계적인 패턴을 찾아내려 애썼다. 문장부호 하나, 단어 선택 하나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훑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경탄했던 그들의 작품이 이제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알고리즘의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독서 모임 ‘글밭’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들의 글을 읽을 자신이 없었고, 그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나의 추락을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글쓰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의 상실이었다. 예전에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다듬고 고치는 과정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내 생각과 감정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해냈을 때의 희열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감각이 무뎌졌다. 그저 AI가 제시한 내용에 따라 기계적으로 자판만 두드릴 뿐이었다. 글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의미 없는 기호들의 나열에 불과했다.
밤낮이 바뀌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방 안은 먼지와 쓰레기로 가득 찼지만 치워야지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연락도 끊었다. 글 동료나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안부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할 기운조차 없었다. 아니, 그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AI에 잠식되어 버린 나를 등 뒤에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AI의 노예야. 귓속을 찌르는 듯한 수군거리는 환청에 귀를 막고 몸부림쳤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피폐하고 낯설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눈동자. 이건 내가 아니었다. 글을 쓰고, 읽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빛나던 예전의 나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작가로서의 실패, 인간으로서의 피폐함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7
불도 켜지 않고 컴퓨터 책상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더 이상 AI 프로그램도 켜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은 칠흑 같았고, 그 안에 비친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다. 푹 꺼진 눈두덩이, 생기 없이 축 처진 입꼬리, 며칠 밤낮을 새운 듯 기름진 머리카락. 거울을 볼 용기조차 없어 외면했던 나의 비참한 몰골이 검은 액정 위에서 유령처럼 떠다녔다. 저게 정말 나라고? 한때는 반짝이던 눈으로 세상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 있음을 느끼던 내가, 이제는 AI의 그림자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건가. 모니터 속 나는 나를 비웃는 듯했다. 네가 작가라고? 웃기지도 마. 너는 그저 기계의 노예일 뿐이야. 귓가에 환청처럼 울리는 비난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자괴감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진 거지? AI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남들의 시선에 갇혀 나 자신을 잃어가던 순간부터였을까? 지난 시간이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글쓰기의 기쁨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다른 작가들에게 압도당하고, AI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까지.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발버둥쳤던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건, 나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펼쳐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어떤 이야기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 빈 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고 싶었다. 텅 비어버린 가슴에 다시 뜨거운 창작열을 불어넣고 싶었다. 예전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머릿속에는 공허함만 가득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맴돌기만 할 뿐, 단 한 글자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나만의 문장, 나만의 목소리는 AI의 차가운 알고리즘 속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좌절감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한 고통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었다.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더 이상 존재할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모니터 화면 속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AI에게 나의 영혼을 팔아넘기기 전의 나는, 글 쓰는 기쁨에 도취했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느껴졌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잃어버린 이 공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래, 일단, 사라지는 거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나를 찾아 나서는 거야. 무모하고 절망적인 결론이었지만, 그것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짐을 꾸렸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낡은 수첩 한 권, 그리고 펜 한 자루. 미련 없이 집을 나섰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거대한 도시의 화려한 불빛들이 점점 멀어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곳에 더 이상 나의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8
나는 사라졌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던 한 인간이, 자신을 되찾기 위해 세상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자,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아니, 어쩌면 지금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폐허가 된 마음속에서 다시 피어날 작은 희망을 찾아, 낯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가 걷는 길의 저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움과 호기심이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