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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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민경이 마주 앉았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민경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를 힐긋 보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폐업할까 봐. 도대체 매출이 안 올라.”
“관두면?”
“굶어 죽기야 하겠어. 다른 거 찾아봐야지. 이제 패브릭은 진절머리 나.”
“뭘 할 건데? 여기서 계속할 거야?”
“여긴 월세가 감당이 안 돼. 싼 데 알아봐야지.”
가게 계약 갱신이 다음 달로 다가왔다. 계약을 연장하려면 월세를 올려줘야 한다. 지금도 월세가 부담스러운데, 민경이 폐업해 버리면 다음 달부터가 더 큰 문제다. 그렇다고 숍인숍에 섣불리 다른 업종을 채워 넣기도 부담스러웠다. 카페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업종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패브릭 공방이 카페 영업에 손님을 끌어들이는 역할은 톡톡히 했다. 특히 여자 손님들이 아기자기하게 진열된 패브릭에 이끌려 실내로 들어왔다. 그런데 구경만 하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패브릭 공방이 장사를 접은 공간에 다시 패브릭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경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민경이 폐업하겠다는 말만 꺼내놓고 소영을 데리러 음악 학원에 가야 된다며 일어섰다. 나는 어떻게 되겠지 하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민경이 패브릭 공방을 폐업한다는 현수막을 카페 간판 아래 달았다. 모든 제품을 50∼70% 세일이라는 카피도 넣었다. 덕분에 한동안 손님이 붐볐다. 카페도 함께 폐업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심지어 카페도 폐업하느냐는 문의까지 들어왔다. 카페 이미지가 나빠질까 걱정됐다. 폐업 현수막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을까. 민경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재고가 빨리 소진되기를 바랄 수밖에. 민경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테이블로 채울까. 아니면 아예 파티션으로 막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통유리창에 빗방울이 들러붙었다. 장맛비가 수시로 쏟아졌다.
승수가 민경의 저녁 식사로 김밥을 사 왔다. 민경이 함께 먹자고 카톡을 보냈다. 나는 승수의 행동이 신경에 거슬렸다. 카페에 손님이 없었지만 건너가지 않았다. 민경의 메시지가 다시 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문이었다. 그들에게 내 기분을 들킬까 봐 커피 두 잔을 만들어서 직접 들고 갔다. 승수가 흘끔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바깥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괜찮지? 역시 싸구려가 먹히네. 폐업하지 말까? 맨날 반값 세일 붙여 놓고.”
“많이 나갔어? 반값 세일해서 먹고 살 수 있으면. 그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
“더 이상은 싫어. 질려. 질려서 그만둘래.”
“민경 씨, 폐업하면 다른 계획이라도.”
승수가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 계획 없어. 우리 소영이 잘 키울 돈만 벌면 되는데 그것조차 잘 안 되네. 요즘 우리 딸한테 한심한 엄마야. 가게 정리되면 소영이 데리고 여행부터 다녀와야겠어. 그동안 정말 재봉틀 열심히 돌렸는데, 이제 해방이다. 당신들 부럽지. 난, 이제 자유다.”
민경의 푸념 섞인 농담을 들으며, 나와 승수는 묵묵히 김밥을 먹었다. 빨대로 커피를 휘젓던 승수가 민경을 바라봤다. 나는 그러는 승수를 힐긋 봤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 그가 카페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승수의 입을 지켜봤다. 어떤 말이 나올까? 왜 망설이지. 민경 씨.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정도는 표현하지 않을까? 궁금하다기보다 불안했다.
승수의 사진 작업실에 민경과 함께 놀러간 적이 있었다. 민경의 사진이 대형 액자에 담겨 한쪽 벽면에 걸려 있었다. 민경이 재봉틀 앞에 앉아서 에코백을 만드는 장면이었다. 목둘레가 폭 파진 검은색 반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재봉틀을 향해 수그린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위에서 잡은 각도였다. 먹이 사냥을 하는 고니의 목처럼 진지해 보였다.
민경이 재봉틀 일을 할 때, 필요 이상으로 어깨를 웅크렸다. 나의 눈에만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재봉틀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내면 카운터에 숨겨 놓은 볼록거울을 통해 민경을 힐긋 건너다보곤 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검은 고무줄로 무심한 듯 질끈 묶고 바느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한 번 더 시선을 주게 된다. 재봉틀 위에서 장사할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예술가의 퍼포먼스 같았다.
사진 속 민경은 무념무상, 아니 무방비 상태랄까. 물론 민경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은 아닐 거다. 승수가 공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포착했을 것이다. 민경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해 경계심이 별로 없었다. 그러한 민경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잘난 것도 없으면서 되게 자신만만한 사람으로 보였다.
나는 항상 자신을 점검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행여나 나의 감정이 행동으로 드러날까 봐 조바심내면서. 민경이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이지만, 그녀에게조차 터놓고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민경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이혼 과정을 중개하듯 자세히 털어놓았다. 참 속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왜 저렇게 주머니 속을 뒤집듯 까발리는 걸까 하고. 어떤 때는 저 푼수, 하고 속으로 욕을 하기도 했다. 민경은 그렇게 암울한 감정을 훌훌 털어냈다.
요즘 와서 민경이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자기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나름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 위해 더욱 자신을 뒤집어 털듯이 드러내 보였는지도.
얼마 전, 민경이 지나가는 말투로 자기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외할머니가 부잣집 난침모였다고. 외할머니의 바느질 솜씨를 이어받은 어머니는 원래 시장 안에서 한복집을 했다. 한 땀 한 땀 시간 단위의 속도로, 한 사람의 손에 의존하는 생산 공정으로는 아무리 바지런을 떨어도 가족들 생계를 꾸려 가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버지는 별다른 직업을 갖지 못한 채(불행한 과거이지만, 아버지는 배우 지망생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꿈을 무한 신뢰했다), 한복집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얼굴만 잘생긴 그저 그런 남자였다. 결국 한복집 하던 공간은 한정식 식당에서 감자탕집으로 거듭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민경이 식당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씩 민경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 음식 솜씨가 대단하다고 엄지를 치켜세워 주면 민경이 좋아했다. 원래 자신의 어머니 솜씨가 좋았다고. 식당을 하면서 ‘단짠’이라는 평균성의 법칙에, 민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침탈당했다고 했다. 그래서 민경은 평균적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했다. 민경의 현재를 보면 평균적인 삶에서 제대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민경이 패브릭 공방을 잘못 운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경은 패브릭에 예술혼을 집어넣으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에코백 속에서 새를 키우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그녀의 어머니가 어깨에 지고 온 짐을 예술로 승화시켜 보려고 했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다만 민경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방 정리가 끝나면 술 한잔하자고 하겠지. 절망감을 쏟아낼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시 태연하게 살아갈 것이고. 그러한 민경을 부러워하면서 질투하는 내가 한심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곁에 있어 때론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공방이 폐업된 지 한 달이 되어 갔다. 공방하던 공간에 아직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달 월세가 은근히 걱정됐다. 계약서대로라면 당연히 민경이 내야 할 몫이다.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월세까지 청구한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볼록거울을 통해 민경이 패브릭을 제작하던 코너를 살폈다. 텅 빈, 어둠만이 거울에 비쳤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민경이 함께 있을 때는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했다. 소영하고 여행 떠난다고 했는데, 행복한 여행이 되고 있을까? 민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소영이 하고 여행 재밌었어?
한참 지나서 답글이 왔다.
-여행은 즐거웠어. 소영이도 좋아했고. 카페 마감 맞춰서 나갈게.
-즐거웠다니 다행이네. 그럼, 이따가 봐.
-그래. 술 한잔하자.
민경이 카페 마감에 맞춰서 나타났다. 얼굴이 밝아 보였다. 나는 출입문에 걸린 팻말을 클로즈로 돌렸다. 민경이 백팩에서 버번 위스키 짐 빔을 꺼냈다. 여행 간 교토에서 샀단다. 내가 테이블 세팅을 하는 동안 민경이 공방 하던 곳을 둘러보고 테이블로 왔다. 우리는 토닉워터를 섞은 하이볼 잔을 부딪쳤다. 나는 짐 빔 위스키 특유의 풍미를 음미하면서 기다렸다. 월세 이야기가 민경의 입에서 먼저 나오길. 민경이 잔을 비우고 고갯짓으로 공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의 좀 오니?”
“별로.”
“잘 됐네. 저기서 나, 퍼포먼스 벌일까? 어떻게 생각해?”
“네 공간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면 내일부터 스튜디오 꾸밀게. 걱정하지 마. 카페 분위기하고 맞출게. 다른 곳 얻을까 생각했는데, 이곳도 괜찮을 것 같아서. 결국은 그렇게 싫어하던 것을 또 하게 됐군.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어. 나, 대학 때 누드 모델 알바했어. 그때 수입이 꽤 괜찮았거든.”
“몰랐는데. 언제?”
“교대 안 가고 미대 갔다고 우리 어머니가 버린 자식 취급했잖아.”
“그럼, 그것 한다고? 말이 돼? 나이가 몇인데. 우리 사십 넘었어.”
“나름 준비했어. 헬스장 다녔어. 몇 년 됐어. 최근에 근육 키우기 프로젝트 들어갔어. 보디빌더 알지. 그것 배워. 누드 모델도 체력이 필요한 직업이거든.”
“역시 넌, 나하고는 많이 다른 것 같아.”
“당연하지. 다른 개체인데. 요즘 승수 씨, 커피 마시러 와?”
“아니, 통 안 오네.”
“소심한 사람. 전화해볼까?”
민경이 나를 힐긋 건너다봤다.
“알아서 해. 관심 없어.”
나는 엉뚱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으래? 그럼 나중에 연락하자. 내가 다시 일 시작하면 뻔질나게 올 테니까.”
민경이 다음 날부터 출근했다. 며칠에 걸쳐 공방 하던 공간을 누드 모델 스튜디오로 바꾸었다. 카페와 스튜디오의 경계선에 통유리 벽을 세웠다. 커튼으로 카페 쪽의 시선을 차단했다. 큰 공사는 카페 마감 후, 야간에 이루어져 특별히 불편함은 없었지만 시각적으로 카페 공간이 축소되어 보였다.
스튜디오가 완성되자 민경이 승수를 불렀다. 그에게 명함 한 묶음을 내밀었다. 사진작가들 중에 누드 모델이 필요한 사람 있으면 소개하라고. 승수가 우울한 표정으로 명함을 들여다봤다. 명함에 누드 모델과 함께 작업 공간인 스튜디오를 대여한다는 카피가 들어 있었다. 민경이 스튜디오에 대해 설명했다.
“화가들이나 사진작가들, 누드 모델 부르면 비용 부담이 꽤 되잖아. 게다가 모델을 세울 공간도 마땅치 않고. 그래서 아예 스튜디오까지 대여한다는 거지. 필요한 작가들이 스튜디오로 직접 와서 작업하는 것으로. 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것보다 훨씬 안정감 있게 일할 수 있고. 일대일로 작업해도 되고, 그룹으로 와서 작업해도 돼. 모델 이용료는 인당 받을 테니까.”
말을 끝낸 민경이 승수한테 팔뚝을 걷어 보였다.
“헬스장에서 개인 트레이닝 받아. 봐, 근육 좀 생겼지. 나중에 보디빌더 대회 나갈 거야.”
“근육 키우는 것은 좋은데, 대회까지는.”
“못할 것도 없지.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됐어. 승수 씨는 고객들을 불러 모으면 돼. 아니 승수 씨가 먼저 날 모델로 찍어. 그리고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해. 이번 작업은 반값으로 해줄게.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농담 아니야. 이번에도 실패하면 난…. 하여간 실패하지 않을 자신 있어.”
승수가 민경을 탐색하듯 찬찬히 살폈다. 누드 모델을 바라보듯 눈을 가슴츠레하게 뜨고 한동안 응시했다. 민경도 진짜 누드 모델처럼 승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의 눈빛이 웃긴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카페 쪽으로 와 버렸다.
스튜디오 쪽에서 아무런 낌새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다시 스튜디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승수가 바깥으로 나갔다. 잠시 후, 카메라 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결국 일 벌이는군. 나는 어떻게 되었는지 민경에게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민경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대단하다는 부러움이 일었다.
스튜디오 쪽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증을 더 증폭시키는 것은, 아무튼 조용한 움직임이 감지된다는 것이다. 가보고 싶었지만 또,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후가 다 흘러갔다. 벌써 창밖이 어두워졌다. 카페 쪽에서 틀어 놓은 재즈 음악 사이로 가끔씩 셔터 누르는 소리만 들렸다. 카페 마감 시간까지 승수와 민경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퇴근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들어가기 싫었다. 근처에 있는 북펍에 갔다. 와인 한 잔을 시키고 가방에 넣어 다니는 소설책을 읽었다. 공방 자리에 차라리 북펍을 하면 어땠을까? 신경 쓰지 말자. 나와는 상관없어. 책이나 읽어, 하면서도 소설 읽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온갖 상상을 했다. 내가 만든 이상한 그림 때문에 밤새 뒤척였다.
다음 날, 찌뿌듯한 몸으로 출근했다. 민경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똑같이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어린아이를 질책하는 듯한 눈길로 민경을 바라봤다. 민경이 개구쟁이 소년처럼 하하거렸다.
민경의 누드 모델과 스튜디오 대여업이 카페 매출에도 도움이 되었다. 손님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손님 수가 많아졌다. 손님들 중에 스튜디오로 눈을 들이미는 사람도 생겼다. 커튼 안에서 펼쳐지는 뜻밖의 광경이 그들의 호기심을 발동시켰다. 민경 역시 프로였다. 작가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커튼 안을 흘끔거리는 여러 사람들의 관음증적 시선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도도한 시선으로 모두 맞받았다. 아니 맹한 표정으로 스튜디오의 팽팽한 공기를 완벽하게 장악했다.
무엇보다 민경의 복근이 나날이 탄탄해졌다. 나의 눈에도 민경의 육체가 아름답게 보였다. 비너스보다 더 아름다웠다.
민경이 모델 일이 없는 날은 그림을 그렸다. 패브릭이 도피처였다면 그림은 자기다움의 발현이었다. 민경이 이혼하고 한동안 헤맸다. 생계를 위해 패브릭 공방을 차렸지만, 장사에 열정이 없었다. 하지만 민경의 변화에 나는 아직 박수를 치지 못했다.
민경을 바라보는 나는 괜히 심기가 불편했다. 언짢은 감정의 기저에 무엇이 깔렸는지 어렴풋이 안다. 복합적인 것이 뒤섞였다. 솔직히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라는 것을 절감한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민경과 승수에 대해 두 사람 모두 별종이라는 비웃음을 입에 물고 있을 뿐이다. 민경과 승수는 큰 트러블 없이 전시회를 기획하고, 준비했다.
하루는 민경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카페 마감이 끝난 뒤, 나와 민경이 스튜디오에서 마주 앉았다. 코냑을 스트레이트로 연거푸 두 잔을 비운 민경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학에 다닐 때였다. 미술학원에서 데생 보조 강사를 했다. 어느 날 학원에 소속된 누드 모델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누드 모델에 이 전시에 의뢰할 시간이 없었다. 다급해진 학원 측이 민경에게 모델 제의를 해왔다. 그런데 그녀의 의사를 확인하기도 전에 모델의 등급에 따른 모델료부터 제시했다. 학원 측의 제안이 불쾌했다. 돈 몇 푼에 좌판에 올라앉는 기분이었다. 비참했지만 호불호를 따질 입장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보내주는 생활비가 항상 부족했다.
임시 모델 일이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하루는 누드 데생 수업이 끝난 뒤 수강생들이 빠져나간 교실 뒷정리를 하다가 그들이 그려 놓은 그림을 살폈다. 같은 포즈를 취했는데도 그리는 사람들의 스케치북 속엔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물론 수강생 개개인의 능력 차가 있었지만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그림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델이 겪고 있는 감정의 기복에 따라 근육의 선이라든가 명암이 달라져 있었다. 학원생들이 습작용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결코 대상화된 물질로서 모델의 몸이 아니었다. 화가의 감정과 모델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캔버스 위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감하는 공간이었다.
민경의 얘기를 들으며 벽에 걸린 누드화를 쳐다봤다. 민경이 자신의 누드를 그린 작품이었다. 배경이 어두운 숲이고, 누드의 가슴속에 새가 웅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가슴에 피멍이 얼비쳤다. 새가 가슴 밖으로 나오려고 살갗을 쪼고 있었다.
“새는 무슨 의미야?”
“음, 시선 처리는 어때?”
민경이 대답 대신 불쑥 물었다.
“한참 동안 보고 있으니까 갈등이 보이네. 감정이 굉장히 복잡해 보여.”
“그래? 너무 쉽게 그렸나.”
“왜?”
“넌, 항상 날 경멸하잖아. 별종이라고.”
민경이 웃는지 우는지 모를 큭큭 소리를 내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녀 혼자서 양주병을 다 비울 기세였다.
“소영이 픽업하러 가야지?”
“그 애도 지금 날 보고 싶지 않을 거야. 대신 좀 가줘.”
며칠째 소영이하고 신경전을 벌인다며 속상해했다.
민경의 말에 의하면, 소영이 제 아버지하고 살겠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사는 부산으로 가겠다고. 민경의 현재 경제력으로 자기 뒷바라지가 너무 힘들 거라고. 첼로 레슨비도 안 되는 양육비 대신에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아버지 집에서 살겠다고.
민경이 술 취한 채 그림을 그리고, 나는 소영을 데리러 갔다.
음악학원으로 가면서 소영에게 줄 도너츠를 샀다. 제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했다. 소영이 마중 나온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엄마 어디 아프세요? 하고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민경의 작업이 바빠서 대신 왔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더 묻지 않고 눈을 감았다. 집에 가서 시험공부를 또 해야 된다면서 좀 쉴게요, 했다. 아직 중학생인데 소영의 표정이 매우 성숙해 보였다. 어린 소녀라기보다 애늙은이 같은 태도였다. 나와의 긴 대화를 피하는 것 같았다. 나도 잠자코 운전만 했다. 아파트 현관문 앞까지 함께 가주고 싶었다. 소영이 극구 사양했다. 나는 소영이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보고 돌아서 나왔다. 소영이 나이 때는 다른 사람의 친절이 불편할 때도 있을 것이리라.
승수의 사진 전시회 오픈 날, 민경의 퍼포먼스가 계획되었다. 그동안 고객이었던 작가들을 초대하여 누드모델로서의 포즈와 보디빌더로서의 포즈를 취하기로 했다. 독립적인 몸의 존재감을 드러내 보자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그 사이 민경의 근육이 더욱 입체감을 드러냈다. 가슴, 배, 허리뿐만 아니라 등 근육까지 조약돌이 박힌 듯 동글동글 솟아올랐다.
전시회 오픈 날, 첼로를 배우는 소영이 연주를 했다. 붉은 천이 깔린 무대 위에서, 민경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개구쟁이처럼 웃다가, 꿇어앉아서 울 듯하다가,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화를 냈다가, 무너져 내리듯 털썩 주저앉아 양팔로 자기 가슴을 감싸 안고 애틋한 눈길로 내려다봤다. 때로는 해맑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온화하게, 그러다가 순식간에 차갑게 표변하는 민경의 표정에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퍼포먼스는 1부 2부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 민경이 누드의 예술성을 다양한 포즈로 표현했다면, 2부에서는 민경이 보디빌더 동작을 통해 관능적이고 건강한 육체미를 뽐냈다.
민경의 퍼포먼스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녀의 신체적 조건도 한몫을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흥분된 감정을 고조시킨 것은 무엇보다 민경의 큰 키와 흰 피부, 세련된 외모였다. 게다가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대는 근육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였다. 자신의 육체적 자산을 충실히 활용했다. 아니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린 것은, 어쩌면 민경의 폭발하는 욕망일지도. 주체할 수 없어서 분출되는 민경의 욕망이 관객들에게, 그들의 잠재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퍼포먼스는 민경이 돌아서서 등 근육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무대가 어두워지며 커튼이 닫혔다.
민경이 소영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잠시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소영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민경에게 소영은 어떤 존재일까? 민경과 소영이 포옹했다. 민경은 자신에게 보디빌더를 권유한 사람이 딸, 소영이라고 소개했다.
그동안 저런 끼를 숨겨 두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크게 박수를 쳤다. 나의 몸에 뭉쳐 있던 응어리들이 풀리는 듯했다. 제 잘난 맛에 도취된, 패브릭 공방에서 꾸부리고 처박혀 지내는 불쌍한 여자라고 치부했었는데….
민경이 전시회가 끝난 후, 며칠 동안 앓았다. 나는 전복죽을 사서 민경의 집으로 갔다. 민경이 해쓱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민경을 끌어안았다.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민경이 팔을 풀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출근하려고 했는데.”
“퍼포먼스 너무 멋졌어. 그런 끼 숨기고 여태껏 어떻게 살았니? 완전 광기던데. 연극배우 해도 되겠더라.”
“몰랐니? 고등학교 때, 나 오디션 보러 다녔어. 그러다가 우리 아버지 눈 밖에 나버렸고.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하고 연 끊고 산 것 후회돼. 이제 철드는 거지. 철들면 뭣해. 찾아가 용서 빌 아버지는 없는데.”
민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식탁 위의 휴지를 뽑아 눈물과 콧물을 훔쳤다. 히죽 웃고는 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맛있게 죽을 먹는 민경을 바라봤다. 군더더기 없이 솔직하다.
전시회의 영향인지, 민경의 스튜디오가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그녀의 그림 작업도 가속도가 붙었다. 카페 마감이 되어도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민경과 승수는 원래 대학 동기이지만 더 막역한 사이가 되어 보였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함께 웃지 못하고 겉돌았다.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나의 일상은 쳇바퀴 돌 듯했다. 카페 일이 재미가 없었다. 카페를 접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속내를 털어놓고 의논할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나이는 이미 지났고, 민경이 그나마 제일 가까웠다.
카페 마감 시간이 다 되었는데 민경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술 마시자고 했다. 함께 술을 안 마신 지 꽤 오래됐다. 나는 왜냐고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경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그녀가 키핑해 둔 양주를 꺼냈다. 샐러드에 드레싱을 뿌리며 속으로 카페를 접겠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민경에게 카페를 맡으라고 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나도 민경도 잠자코 술만 마셨다. 샐러드를 찍어 먹던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고 민경이 술값을 내겠다고 했다. 작품 한 점 팔았다고. 자기를 모델로 그린 누드화라고 자랑했다.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빈정댔다.
“완전 장사치군. 어떻게 자기 몸을 팔아. 아무리 장기까지 파는 시대라고 해도. 부끄러움이 없어.”
순간 갑자기 냉동실 문을 연 것처럼 민경의 눈빛에서 차가움이 훅 끼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입을 때리고 싶었다. 민경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잔 속의 술이 출렁였다. 나는 얼른 사과했다.
“미안해. 나쁜 의도로 한 것 아냐. 돈이 되면 뭐든지 팔려는 사람들 이야기야. …나도 요즘 고민 많아.”
사과의 의미로 나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했다. 민경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아니, 맞는 말 했어.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들 중에 한 명이야. 나, 돈 좋아하는 것 몰랐니? 너, 타인의 어설픈 광대짓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눈이 있네. 힐난할 줄도 알고. 숙맥인 줄 알았는데.”
“힐난은 무슨.”
“그런데 무슨 고민이야? 매사를 징검다리 건너가듯 꼼꼼히 확인하면서 사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는 인생인데 무슨 리스크가 있냐? 그러고 보니까 넌, 지금까지 고민 같은 것 털어놓은 적 없었어. 나를 네 친구로 인정한다는 거니?”
발톱 세운 고양이 같던 민경의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기가 돌았다. 나는 속으로 머뭇거렸다. 말실수 모면용으로 중요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를 털어놓기에 상황이 애매했다. 게다가 카페를 접겠다고 하면 민경이 어떻게 나올지. 카페 문제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대충 얼버무리고 일어나고 싶었다.
“당연히 친구지. 허민경, 넌 안 그래. 내가 말실수한 것 가지고 사람 코너로 몰지 마. 쫄았잖아. 미안해. 다시 한번 사과할게. 화내지 마. 내 고민은 지금 상황에서 이야기할 내용이 아닌 것 같아. 좀 더 생각해 보고 얘기할게. 술 한번 더 마시자. 오늘은 그만 일어나. 피곤하다. 쉬고 싶어.”
“그래, 그럼.”
약간 떨떠름하게 술자리를 끝냈다.
오랜만에 승수가 나타났다. 여자와 함께였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승수가 허둥대며 카운터로 눈길을 줬다가 여자를 데리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한참 후, 민경과 함께 세 사람이 카페로 옮겨 왔다. 카운터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들이 주문한 커피와 주스를 준비하면서 여자를 훔쳐봤다. 승수와 무슨 관계일까? 나와 민경보다 많이 어려 보였다. 여자가 웃을 때,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관절이 묻힐 정도로 손가락이 통통하다. 치즈 맛이 날 것 같은 윤기가 돌았다. 나는 승수와 심야 영화를 봤던 날을 떠올렸다. 소금에 절인 닭발 같은 나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촉감이 많이 다르겠지. 여자가 곁눈질로 민경을 흘끔거렸다. 경계하는 눈빛을 조심스러움으로 덮씌운 고양이 같았다.
“작가님, 누드 모델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에요. 너무 멋있어요.”
“네.”
여자의 말에 민경이 짧게 대답했다.
나는 음료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그들 테이블로 다가갔다. 승수가 나에게 애매한 눈빛을 보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
“어머, 새로운 모델이세요?”
순간 여자의 표정이 샐쭉해졌다가 살짝 웃었다.
“카페가 예쁘네요. 제가 모델로 보여요?”
나를 카페 주인 정도로만 여기는 말투다. 여자가 할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승수의 귀에 대고 재수 없어, 라고 속삭였다. 실제 말소리라기보다 입술 모양이 그렇게 보였다.
“아, 그것이….”
승수가 얼버무렸다.
티타임이 끝나고, 카페 밖으로 나가면서 여자가 승수의 팔짱을 꼈다. 카운터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에게 민경이 눈을 찡긋했다.
“마치고 한잔 할까?”
“그러지 뭐.”
나와 민경이 소주잔을 부딪치지도 않고 비웠다. 술맛이 더 썼다. 생각에 잠겼던 민경이 비운 소주잔을 털면서 하하 웃었다.
“우리 둘, 한꺼번에 의문의 1패 했네.”
“그러게.”
나는 대충 대답했다. 왠지 기분이 그랬다.
“원래 놓친 물고기가 더 먹음직스러워 보여.”
“모든 걸 먹는 것으로 해석해.”
“먹을 것이 걱정 없다면 최상급 아닐까?”
나는 화제를 바꿨다.
“지난번에 고민 있다고 한 것 기억나?”
“기억나. 뭔데? 심각해?”
“카페 접고 여행 갈까 했어.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어.”
“잘 됐네. 떠나. 말 나온 김에 갔다 와. 카페 접는 문제는 여행하면서 천천히 생각하고.”
“여행 떠나기 전에 부탁 있어. 내 누드 그려줄래?”
“누드를…? 그러자꾸나.”
스튜디오에서 민경의 지시에 따라 자세를 취했다. 몇 가지 자세 중에 선택하라고 했다. 올 누드도 되고, 란제리 정도로 가려도 된다고 했다. 나는 우물쭈물 망설였다. 시간을 주려는지 민경이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가운을 벗었다. 나를 싸매고 있던 누더기가 벗겨져 나갔다. 한참 동안 거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웃음이 실실 터졌다.
작업을 하는 동안 민경의 시선이 몸에 닿을 때마다 다시 옷을 입고 싶었다. 쑥스러움 때문이 아니다. 두르고 있던 철갑이 흐물흐물해지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캔버스 위에 나의 누드가 형체를 드러내자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졌다.
한동안 민경이 바빴다. 본인의 문제라기보다 소영이 때문이었다. 나는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소영을 데리러 갔을 때가 기억났다. 아픔이 많은 아이로 보였다. 자기 아버지한테 가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닐 것이다. 친질녀처럼 사랑하는 아이이지만, 민경에게 나의 생각을 말하지 못했다. 소영이 전학 보내주지 않으면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민경이 소영의 담임 선생하고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자와 사라진 승수가 궁금했지만, 소영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민경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누드가 완성되어 가던 어느 날, 나는 슬며시 털어놓았다.
“사실, 승수 씨랑 함께 밤을 보낸 적 있어.”
민경은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놀라지도, 눈을 치켜뜨지도 않았다. 눈앞의 대상을 확인하는 듯한 시선을 잠깐 보냈을 뿐이다. 나는 머쓱했지만 말을 이어갔다. 마음속에 가둬뒀던 것들을 쏟아냈다.
“늘 네가 부러웠어. 동시에 미워도 했고. 너처럼 살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못했어. 심지어 술자리에서까지 내 감정을 속였어. 욕망을 숨기려고 더욱 구도자 연하는 초보 수도승처럼.”
민경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앙금처럼 켜로 쌓였던 감정이 헤집고 올라왔다. 나는 끝내 울음이 터졌다. 민경이 붓을 든 채, 자세를 흩트리지 말고 끝까지 유지하라고 말했다.
누드화가 완성되었다. 민경이 그린 그림 속, 나의 가슴 한가운데 새가 날갯짓을 했다. 민경의 누드화에 갇혀 있던 새였다. 우리는 와인잔을 부딪치며 그림의 완성을 자축했다. 나는 그림 앞에 서서 민경에게 말했다.
“여행 간다. 이제 가도 되지?”
“승수 씨 올 때가 됐는데. 좀만 기다려 봐.”
놀라는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민경이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