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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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어느 봄날 토요일 오후, 창 너머로 보이는 먼 산은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나른한 식곤증으로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요란한 전화벨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일본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모두 개인 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유선전화가 필요 없게 되자, 아내는 몇 달 전부터 없애 버리자고 했지만 내가 정신이 깜박깜박하여 휴대폰을 못 찾을 때 필요하고, 한 번 들으면 외울 수 있는 좋은 번호라 애착이 가서 그대로 두고 있었다.
합리적이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아내의 성미 때문에 이번 달 안에 유선전화는 우리 집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었다. 틀림없이 건강식품, 아니면 여론 조사용이겠지 생각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여보세요, 혹시 이한용 선생 댁인가요?”
“예, 제가 이한용입니다만….”
“혹시, 유숙녀 씨를 아시는지요?”
유숙녀란 이름에 나는 단잠에서 일어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고, 불길한 생각이 먼저 스쳐 갔다. 혹시 숙녀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나는 한때 그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 숙녀란 이름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다니….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몹시 궁금했다.
“아, 예. 그런데 숙녀 씨와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유숙녀 씨 딸입니다.”
전화기를 들고 난 한참 동안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숙녀의 딸이라면? 그때 숙녀가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는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숙녀에 대해서만 궁금했지, 그녀가 임신한 아이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그때 여고생이었고, 그 당시는 쉽게 낙태가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미래의 재앙이라며 은근히 낙태를 권장하는 분위기라 당연히 지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침묵의 시간이 몇 초 지난 후 저쪽에서 하는 말이 다시 들려왔다.
“한 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현재는 일본에 있습니다만, 업무 차 곧 서울로 갈 겁니다.”
“그런데,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H군 출신이라 해서, 혹시나 하고 같은 이름 파악 후 몇 군데 돌려봤습니다. 운 좋게….”
“그렇네요, 이 전화기는 이달 말에 반납 예정이었습니다.”
“이사를 하십니까?”
“아니오, 요즘 유선전화가 필요 없어서…. 언제 만나면 좋겠습니까?”
“말씀 낮추어 하셔도 됩니다. 다음 주 화요일 오후 2시, 서울 롯데월드타워 122층 서울 스카이 카페에서 뵈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곳으로 가겠소.”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나의 생각은 멀리 사라져 간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어릴 때 난 여동생이 있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아버지 형제가 남자만 다섯이었고, 나의 형제도 남자만 세 명이며 나는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집안에서는 성비율이 비교가 안 되게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많았지만, 마을의 인구 비율로 보면 240여 명 중에 남녀가 거의 반반인 것이 참 신기했다. 어머니가 우리를 키우면서 힘들 때는, 막내인 내가 여자아이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가 아마 다섯 살 때로 기억하는데, 어머니의 기대에서 벗어났다는 말로 들려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작은 슬픔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딸부자가 있었는데, 줄줄이 딸을 낳으면서 다음에는 반드시 아들을 낳겠다며 아들, 아들하다 딸만 아홉을 낳았다. 그 집 막내가 나와 동갑이었다.
물자가 귀한 시절 어머니가 시장에서 옷이라도 하나 사와 형제 중에 한 사람에게만 주면 그날은 형제들끼리 난리가 났다. 이럴 때 어머니가 빠지지 않고 막내인 내가 여자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마을에 사는 딸부잣집의 내 동갑내기 아이와 내가 가장 다른 점을 찾아보았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관심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아이는 당시 유행하던 단발머리를 했고, 소변을 볼 때 앉아서 누는 게 나와 완전 달랐다. 나는 한동안 그 애처럼 소변을 앉아서 누었고, 머리도 단발머리를 하겠다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졸랐다. 장난기가 많던 어머니는 나에게 단발머리를 해주었고, 소원대로 치마도 하나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형들은 여자동생이 하나 생기니 좋은지 부드럽게 대해 주었으며, 나로 인해 집안에 웃음이 훨씬 많아졌다. 그런데 연극 같은 일이 일찍 막을 내린 것은 할머니의 우리 집 방문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남아선호 시대에 아들만 다섯 명이나 두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던 분이었다. 그런데 아들 집에 와 보니 사내아이인 내가 여자아이 행세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몹시 나무랐다.
어머니가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는 모습에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어찌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그때만큼 할머니가 위대하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어머니를 호되게 나무란 것은 지금 생각해 보니 성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했던 것 같다. 이 일 후 어머니도 나의 행동을 일종의 시위로 생각했는지, 내가 여자아이라면 좋겠다는 말은 직접 하지 않았다.
형 둘은 비교적 공부를 잘했다.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웠으나 인근 도시인 M시를 대표하는 중학교에 합격하여 자취생으로 공부했다. 어머니는 막내까지 M시에 있는 학교로 진학시키지 못할 것 같다는 말과 나를 곁에 두고 농사일을 물려주는 게 좋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부모님은 형들과 달리 내 성적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꼴찌 정도나 면하면 다행이고, 은근히 성적이 안 좋기를 바라는 눈치도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 다닐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압박감 없이 편하게 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 긴 투쟁 끝에 부모님의 기대에 벗어나 나도 M시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해 1년 정도 둘째 형과 자취를 같이 했다.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할 무렵 형들은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더 큰 도시로 떠났다. 큰형이 대학 가면서 등록금을 내기 위해 논 한 마지기를 팔았고, 둘째 형이 대학을 갈 때도 또 논 한 마지기를 팔았다. 논 다섯 마지기 중에 세 마지기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소작농으로 남의 논을 여러 마지기 지어 주고, 벼 수확은 반으로, 보리 수확은 모두 가져왔다. 농산물 수입으로 형들 등록금 내기가 턱없이 모자라 소와 돼지를 키워 겨우 등록금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할 때 나는 부모님과 한마디 상담 없이 스스로 인문계를 포기하고 공고 기계과를 선택했다. 공고 1학년 때 형들이 모두 M시를 떠난 상태라 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 공고를 택하자 부모님은 내가 철이 일찍 들었다며 좋아하셨다. 자취방을 구하면서 어쩌다가 내가 다닐 학교보다 G여고에서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방을 얻었다. 당시 G여고는 교복이 세련되고 참 멋있게 보였다. 어머니와 자취방을 보러 몇 군데 다녔는데, 한 군데 대문을 열어 준 집이 여고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있었고 같은 방세에 방이 넓어 나는 그 방을 택했다.
입학식이 있던 날, 처음 방을 보러 갔을 때 문을 열어 준 그 학생과 통성명을 했다. 공교롭게 입학식이 같은 날에 있었고, 비슷한 시간에 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상대방의 교복을 보고 1학년 동갑내기란 것을 알았다. 촌티가 졸졸 흐르는 나를 보고 그 여자애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얘, 너도 일학년이구나.”
가늘고 진한 긴 눈썹과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고, 머리를 두 가닥으로 닫고 있어 단정하고 깜찍하게 보였다. 까만 교복에 깨끗한 흰 카라가 마치 백합 꽃잎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응, 너도 같은 학년이네.”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중학교는 어디서 다녔어?”
“M중.”
“공부를 잘했나 보구나.”
“그냥 보통은 했어. 넌 어느 중학에 다녔어?”
“난, 일본에서 다녔어.”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난 잠시 이해가 가지가 않았다.
“일본…?”
“부모님이 재일교포셔.”
“일본에서 학교 다녔는데, 한국말을 그렇게 잘해?”
“집에서는 모두 한국말을 해서 그래. 넌 이름이 뭐야?”
“이한용, 넌?”
“유숙녀.”
“이름 참 이쁘네.”
“고마워.”
일본에서 자랐다는 말에 내가 그 여학생에게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자취방의 주인이자 그 학생의 부모는 당시 20여 명의 직원을 데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요코라는 직물사업으로 돈을 잘 버는 것 같았다. 생산물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했으며, 여고생의 부모는 종업원 관리와 생산물 수출 등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1학년 때 여러 학교에서 온 친구들이라 친한 친구가 없어 난 수업을 마치면 집으로 바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집에 사는 G여고생도 성격이 온순하여 수업을 마치면 바로 집으로 왔고, 간혹 부모님이 운영하는 공장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으나,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여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고 교과서 외 간혹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으며, 지극히 평범한 학생으로 보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이야기, 독특한 괴짜 친구들 이야기,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 일본에서 학교 다니면서 있었던 일, 나는 내 고향 농촌에 대한 이야기 등 둘은 만나면 무수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같은 반의 친구 대부분을 숙녀가 알았고, 숙녀와 같은 반의 친구들 대부분을 나도 알았다. 나에게 반찬이 떨어지면 김치나 소고기볶음 같은 것도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정이 깊어 갔다. 그 여학생이 어느 날 내가 태어난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부모님 허락을 받고 우리는 외출복이 귀한 시절이라, 둘 다 교복을 입은 채 기차를 타고 H역에서 내린 후 십 리 길을 이야기를 하며 걸어서 간 적도 몇 번 있었다.
고1 가을에 처음 내가 숙녀를 데리고 고향 집에 가자 작은 마을에 화젯거리가 되었다. 옆집 촉새 아지매가 여학생을 보고 제일 좋아하며 멘트를 날렸다. 내가 촉새라 불렀으나, 그 집 여자들은 옛날부터 전통이 있었다. 조선시대 우리 고향에서 3대 문과를 했으면 명문가로 알아주는 데, 그 집은 마을에서 3대 야시(여우) 집안으로 통했다. 당사자들이 없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이 변별하기 위해 왕야시, 야시, 며느리 야시로 구분하여 불렀다. 우리 집에 자주 오는 촉새 아지매는 중간이라 그냥 야시로 통했다. 왕야시는 검은 머리털이 한 올도 없는 백야시이고, 며느리 야시는 C시에 살면서 한 번씩 아들과 함께 고향에 왔다. 나는 그때 사람은 환경의 영향만 받는 게 아니라,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 집의 터가 처음부터 야시터라서 야시가 사는 게 아니라, 여러 곳의 야시가 모이자 야시터로 변했을 것이라는 유치한 상상을 하곤 했다.
촉새 아지매가 뒷짐을 하고 나를 보면서 말했다.
“어디서 이런 참한 며느리감을 구해 왔노?”
숙녀는 이 말에 부끄러워했으나, 싫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숙녀를 처음 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동네에 사는 아들 여자친구 정도로 살갑게 대했으나, 속으로는 더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듯했다. 어느 날 한 번은 여학생을 보고 촉새 아지매가 또 방정을 떨었다.
“이 집은 막내아들부터 장가를 보내야겠네. 처자의 젖가슴과 엉덩이가 통통하고 튼실하여 아들딸 잘 낳겠다.”
부끄러움이 많은 숙녀에게 칭찬인지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 이런 말을 하는 촉새 아지매를 숙녀는 몹시 싫어했다. 내가 볼 때 숙녀는 날씬한 편에 속하고 가슴이나 엉덩이가 별시리 크게 보이지 않았었다.
2학년 1학기 아마 4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친구 몇 명이 주말에 J시에 벚꽃 구경 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는 것으로 봐서, 4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봄이었으나 장마처럼 며칠 동안 비가 오락가락하는 주말이었다. 나는 고향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피곤하여 집에서 잠자기를 택했다. 기온이 쌀쌀하여 얇은 이불을 덮고 잠이 깊이 들었던 것 같다.
잠결에 스르르 문이 열리는가 했는데, 갑자기 이불 속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나는 도둑인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숙녀였다. 내가 여자라면 아마 놀라서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숙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순간적으로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숙녀가 내 품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싫지가 않았다. 아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난 숙녀를 내 팔에 누이고 그녀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숙녀는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난 그때 고향 촉새 아지매가 숙녀의 가슴이 크다고 한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촉새 아지매가 입에 달고 다니며 자주 쓰는 말 중에 “나는 척 보면 삼천리고, 뚝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 하는 말이 귀에 생생하게 맴돌다 사라져갔다.
우리는 그날 이후 여러 차례 그런 일이 있었고, 난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 정도 고향 집에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2학기가 끝나갈 무렵 사고가 터졌다. 종례 때 담임이 내보고 잠시 교무실로 왔다 가라고 했다. 난 무슨 일인지 매우 궁금하고 긴장했다. 담임으로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대부분 집안에 초상이 나서 며칠 쉬고 오는 학생들이 있었다.
교무실로 가자 담임이 나를 교장실로 안내해 주고 나갔다.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보고 있던 교장이 일어나 소파 쪽으로 나온 후 앉으라고 했다. 아마 이야기가 길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언젠가 내가 다니는 학교 교장과 초등학교 동기란 말을 들었으나, 나는 그런 말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교장이 먼저 자리에 앉으면서 주저주저하며 서 있는 나에게, 턱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지시였다.
“아버지를 많이 닮았네. 아버지와 내가 친구란 것은 알제?”
“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네, G여고 유숙녀란 여학생 아나?”
순간 교장이 어떻게 내 여자친구 이름을 아는지 나는 매우 놀랐다. 교장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유숙녀, 아는 이름이제?”
“예, 그런데 그 애가 왜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왜 유숙녀란 이름을 교장이 알고 있는지. 교장의 얼굴에 약간의 웃음이 지나갔다.
“유숙녀가 임신을 했어. 너가 아기 아빠란 말을 했어.”
아, 전교생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나는 너무나 부끄럽고 현실이 싫고 죽고 싶었다. 앞으로 어떻게 친구들을 봐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교장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 집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온 후 대책을 생각해 보자. G여고에서 당장 둘 다 퇴학시키자 하고 있어.”
역사가 깊은 학교라 운동장에 오래된 나무가 많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나와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 아래로 갔다. 정문 밖으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썰물처럼 빨려나가고 있었다. 빨간 단풍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가을 하늘은 너무나 맑고 투명했다.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형들 보기도 민망할 것 같았다. 아기를 가지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수년을 노력해도 성공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몇 번에 덜컹 임신이 되었다니.
나는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구멍가게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바닷가로 나가 한참 동안 배회하다, 조용한 곳에서 빵과 우유로 허기를 쫓았다. 곧 통행금지 시간이 되자 갈 곳이 없어 공사장에 사용하기 위해 갖다 놓은 맨홀 속에 들어가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렸다. 4시간을 맨홀에서 보내고 통금이 풀리자 M기차역까지 걸어가서 고향으로 가는 첫 기차를 탔다.
집으로 온 날이 토요일이었다. 부모님은 벼 수확 시기라 들에 나가고 집은 비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방에 가방을 던져 놓고, 일을 돕기 위해 달려 나갔을 텐데, 온몸에 기운이 빠져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누웠다. 피로가 밀려와 정신을 잃고 잠에 떨어져 버렸다.
밖이 시끄러워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밤에 부모님께 아무런 말도 못했고, 일요일 밤이 되어 아버지께 간신히 교장선생님이 한 번 급히 만나자 한다는 말을 꺼냈다. 교장과 아버지는 초등학교 동기이고 해병대 전우라 일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들끼리 끈끈한 무엇이 있었다. 교장이 한 번 만나자 한다는 말에 아버지가 짜증 섞인 말을 했다.
“그 자식, 갑자기 술 생각이 났나. 이 바쁜 일철에 나를 보자고? 일 끝나면 내려가겠다고 해라.”
“아버지, 그게 아니고. 꼭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지가 나 대신 일을 해줄낀가? 군대 있을 때도 어찌나 눈치가 없고 고지식하던지, 내 아니었으면 고참들한테 맨날 얻어터지고 다녔을 꺼야.”
학교에서 존경받는 교장이 나로 인해 욕을 듣는다 생각하니 듣기 거북했다. 아버지는 계속 농사철이라 시간이 없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내가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고 고백했다. 무슨 사고를 쳤는지 묻는 말에 나는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묵비권의 행사가 왜 필요한지 난 그때 일찍 깨달았다.
아버지는 성격이 낙천적이었다. 평소 농사를 성실하게 지었으나, 다른 사람들처럼 집착하지는 않았다. 수확을 앞둔 어느 해 큰 홍수가 나서 곡식을 모두 포기해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다른 부모들은 며칠을 애통해했으나, 아버지는 하늘의 뜻이라며 빨리 잊어버리고, 평소 못 챙겼던 일가친척을 방문하고 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보고 천하태평이라며 마음에 안 들어했다. 아버지가 바깥출입을 싫어하는 것은 일 때문이 아니라, 외출복이 없어 더 짜증 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H역까지 가는 버스가 없어 집에서 일찍 밥을 먹고 나섰다. 기차역에 도착하자 통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H군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M시까지 통학으로 공부하여, 서울과 부산에 있는 명문고등학교와 명문대학에 많이 입학하여 H군은 옛날부터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다고, M시에 소문이 나 있었다. H군 출신으로 내 친구 중에 한 명은 3년간 전교 1등을 하더니, 서울에 있는 명문 K고에 들어가기도 했다. 일부 학생은 통학하면서 놀다가 완전 옆길로 빠지는 학생들도 꽤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기차 맨 뒤칸에 탔다. 아버지는 왜 자신이 학교에 가야 하는지 몹시 궁금해했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물었다.
“야, 아들! 무슨 일인지 알고 가야 나도 준비를 하지?”
“가보시면 압니다.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그 자식 고집 세네. 누구를 닮아 그래?”
“아버지 자식은 맞을 겁니다.”
“아니야, 아닌 것 같에. 이참에 검사 한 번 해봐야겠어.”
기차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 가까운지 그날 처음 알았다. 한 이십 리 정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정문에 도착하자 체격이 좋은 3학년 기율부 10여 명이 완장을 차고, 중앙에 3∼4미터 거리를 두고 두 줄 횡대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학생들이 그 사이로 지나가면 교복의 단추, 모자, 운동화 등이 규격에 맞는지, 동복의 경우 카라 등을 점검받으며 지나가야 했다.
아침에 아버지와 나란히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문제 학생임을 전교생에게 늘리 선전 홍보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소문이 났다면, ‘주인공이 바로 저놈이구나’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교생이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나는 갑자기 어깨를 짝 펴고 걸었다. 아버지와 나는 교장실로 바로 직행했다. 교장실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신호가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고, 아버지가 뒤따라 들어왔다. 교장이 아버지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어서 오시게, 이 친구.”
아버지는 교장이 내미는 손을 잡으면서 짜증 섞인 말을 했다.
“바쁜 일철에 왜 나를 불렀나?”
“아들 때문이지, 말 안 하던가?”
“무슨 말?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하네. 요즘은 공고에서도 묵비권을 가르치나?”
“아직 모르고 있는 가베? 한용이가 말하기가 곤란했나 보구나.”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놀라지 마시게, 잘하면 자네가 할아버지 되게 생겼어.”
아버지는 매우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교장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지나갔다.
“설마, 이놈이? 상대는?”
“G여고 여학생이라네.”
아버지는 그때사 감이 잡히는 모양이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학교에서 둘 다 퇴학시키자고 강하게 주장하여, 내가 입장이 곤란하게 되어 있다네.”
비 맞은 생쥐처럼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아버지가 쳐다보더니, 교장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퇴학만은 막아줘.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저 나이에 퇴학당하면 구만리 같은 인생 종쳤다 봐야 하지 않겠나?”
교장은 잠시 뜸들이다 입을 열었다.
“나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 봤어. 이 상황에 군에 지원하여 입대해버리면 왈가왈부하지 못할 것 같네.”
“그렇게 하지. 그런데 저놈이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교장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부전자전이겠지. 그 많던 자네 여성 팬들은 요새…?”
교장의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아버지가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어허, 그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게….”
아버지와 나는 그날 바로 병무청으로 가서 해병대에 지원서를 냈고, 한 달도 안 되어 영장이 나왔다. 그렇게 하여 나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육군에 입대하는 큰형보다 두 달 먼저 해병대에 입대했고, 내가 제대할 무렵 둘째형이 육군으로 입대했다. 나는 포항 훈련소에서 3개월 훈련을 마치자마자, 청룡부대에 배치되어 베트남전에 투입되었다.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받을 때도 생명이 위태로운 전장에서 나는 하루도 숙녀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베트남 다낭은 경치 좋은 휴양소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내가 주둔할 당시는 치열한 격전지였다. 옆에 있던 전우가 총알을 맞아 사라지고, 5분 전에 옆에서 껌을 나누어 씹었던 전우가 큰 부상으로 후방으로 실려가는 실정이라, 한 시간 후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부모님을 잠시 잊은 적은 있어도, 숙녀는 하루 종일 내 마음속에 있었다.
베트남으로 간 지 4개월 정도 되었을 때, 나도 왼팔에 총알이 두 발 지나가는 부상을 입었다. 총알이 동맥을 뚫고 지나가는 부상으로 피를 엄청 많이 흘렸으나, 급히 후송되어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병원에서 3개월 정도 병원 신세를 지다 베트남전 종전을 며칠 앞둔 시점에 의가사 제대했다.
제대하던 날 제일 먼저 자취방이 있었던 집을 찾아갔으나,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옛날 주인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물었지만, 아마 일본으로 갔을 것이다라는 희미한 말만 했다. 사업체가 있었던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향 친구 중에 G여고를 다닌 친구를 찾아내 2학년 반이었던 사람을 어렵게 탐문하여 숙녀에 대해 묻자, 일본으로 전학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 년 조금 더 지난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나는 숙녀를 찾는 것은 단념했으나, 마음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복학하기 위해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로 갔다. 복학이란 단어는 주로 대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지만, 나는 2월 초순에 고등학교 3학년에 복학 신청서를 냈다. 입대할 때 교장은 아직 그대로 재직하고 있었고, 2월 말에 퇴직이라 했다.
교장실에 인사하러 가자 교장은 친자식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친구 아들이나 고향 후배보다 해병대 후배에 더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첫 물음이 내가 해병대 몇 기인지 물었고, 자신이 한 첫 답변은 자기가 몇 기인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고 졸업생이 취직이 잘되어 졸업 전에 현장으로 스카웃되어 가긴 했으나, 대부분 2학기에 나갔다. 난 교장의 특별 배려로 3학년 1학기에 실습을 나갔고, 실습이 끝나고 바로 취직을 하는 바람에 3학년으로 학교에 수업받으러 간 적은 하루도 없었다.
취직하고 다음 해 설날 할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형제와 4촌들과 함께 성묘 갔다. 세배 후에 돗자리를 깔고, 쉬면서 우리 집안에 남자가 많은 이유를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조상의 묏자리가 의심이 갑니다.”
고조부와 증조부 내외 산소가 양지바른 묵정밭에 있었다. 내 하는 말에 모두 주목을 했다.
“이 밭이 옛날 고추밭이었거나 오이밭이어서 후손들이 자식을 낳았다 하면 아들이다.”라며 말하자, 할아버지는 웃으며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저 건너편 우뚝 솟은 잘생긴 산을 보거라. 저 산을 풍수에서는 안산이라 하는데, 뭐 같이 생겼느냐?”
내가 앞산을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산으로 외는…?”
“잘생긴 가지나 오이가 연상되지 않느냐?”
할아버지 앞이지만, 무의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전혀… 전혀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나의 반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풍수에서 뭐 같이 생겼다는 형상은 물론 중요하지 않지만, 여기에 오면 주변의 산들이 유순하여 기분이 좋아지니 명당이라고는 할 수 있지.”
그 말에도 나는 할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했다.
“명당이라면 음양의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왜 우리 집안에는 딸이 없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건 네가 장가가서 이쁜 딸을 하나 낳으면, 자동으로 해결되는 문제다. 우리 집안 징크스의 고리를 네가 멋지게 끊어 보거라.”
“예, 자신 있습니다, 할아버지.”
이렇게 함께 간 친척들이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전쟁터에서 험한 일을 많이 경험하여 웬만한 일에는 눈 한번 깜짝 안 하는 배짱이 생겼다. 직장에서 배운 기술과 평소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나도 아들만 둘을 낳았고, 딸은 가지지 못했다. 욕심대로 된다면 딸을 하나 가져 보는 게 내 소망인데 정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친한 친구 하나가 사업을 하면서, 갑갑할 때 단골로 다니는 암자가 한 군데가 있었다. 한때 사업이 너무 어려워, 하던 일을 그만둘 생각으로 암자에 있는 스님에게 가서 물었더니, 자기 말을 믿고 두 달만 더 버티라고 했다. 그래서 폐업을 미루고 한 달 정도 국내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놀았다.
겨우 한 달 정도 지나자 유명한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태풍이 남부 지방을 할퀴고 지나가자, 몇 년 벌 수입을 1년 만에 올려세운 친구가 있었다. 그 후 그 친구는 답답하면 그 암자에 상담하러 다녔다. 나도 따라가서 나의 운세를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스님이 하는 말이 전반적으로 맞았지만, 나에게 훌륭한 딸이 있을 팔자라는 말에 속으로 냉소를 날리며 매우 실망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걸려온 뜻밖의 국제전화를 받은 후, 며칠 동안 난 매우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죄책감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사실 부모님께 좀 서운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숙녀가 교복을 입고 집에 놀러 오고 할 때는 살갑게 대해 주더니,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는 아들 장래를 망쳤다고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여고생 부모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취할 때 그 집에서 먹는 반찬을 잘 챙겨 주어 고향에서 거의 반찬을 가져오지 않을 정도였으며, 직원들 주려고 사는 과일이나 빵도 잘 챙겨 주곤 했었는데, 딸 신세 망쳤다고 원망이 컸을 것이다.
사회의 구조와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는 사람은 그 자체가 극복하기 어려운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아내에게 혼사가 있어 서울에 간다고 둘러대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시간에 맞추어 롯데월드 서울 스카이 카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페가 500미터는 족히 될 아찔한 높이에 있어 서울 시내가 환히 내려다보였고, 밤이 되면 야경이 아주 멋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이 몇 명 앉아 있었고, 혼자 앉아 있는 젊은 여성도 보였다. 문자로 서로 무슨 색의 옷을 입고 나가겠다는 말이 있었지만, 나는 대번에 내 딸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일어나 인사를 했다.
“혹시 이한용…?”
“맞아요. 내가 이한용이요.”
“어렵게 생각지 말고 말씀 낮추어 하십시오.”
“혼자 나왔나요?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온다면서…?”
“이 자리에 나오고 싶지 않다고 하여, 저만 왔습니다.”
“어머니는 결혼하셨고?”
“아니요, 안 했습니다. 저 키운다고….”
“고생이 많았겠군.”
“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딸을 이쁘고 반듯하게 키웠군요. 결혼은 했고?”
“저요? 안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나이를 계산해 보니 적은 나이가 아니었으나, 자기 관리를 잘하여 날씬하고 세련미가 있었다. 뭔가 조금 생각하더니, 나를 보고 물었다.
“결혼하셨겠지요? 자녀는?”
“응, 아들만 둘 두었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 많은 집안이라 하더니…?”
“그 이야기를 들었나 보네. 직장은 있고? 경제적으로 힘들진 않아?”
“네, 일찍 변리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리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변리사?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지?”
“산업재해나 분쟁, 특허 등에 관한 일을 합니다.”
“전문직이군. 수입은 괜찮고?”
“월평균 수입은 한국 돈으로 2천만 원 정도 됩니다. 경제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들 둘은 뭐 합니까?”
“큰애는 공무원이고, 둘째는 자기 사업하여 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
내가 앉은 곳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검은 색안경을 끼고 간혹 이쪽으로 바라보며, 혼자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여인이 나는 직감적으로 유숙녀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학생 때 만나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린 좋아하고 사랑했다. 현재 이렇게 된 것은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닌데, 오늘도 지척 거리에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아드님 둘을 만날 수 있겠죠? 족보로 따지면 제 동생들이잖아요.”
“그럼, 자네 어머니가 참 현명한 여자란 것을 오늘 다시 알겠다. 임신했을 때 인구 증가는 장차 국가의 재앙이라며 산부인과에 가면 쉽게 지워 주었고, 미혼모에게는 약간의 위로금까지 주기도 했지. 그런데 너를 낳아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구나.”
“네, 어머니는 정말 훌륭해요.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깊은 신앙심이 있습니다. 미션 스쿨에 다닌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혼모라는 손가락질과 냉대를 받아가면서도 낙태를 못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렇다 치고, 자넨 좀 늦기는 하지만, 혼자 사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처음부터 독신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맞아. 어떤 일이든 조금만 때를 놓치면 성사되기가 어렵지.”
“만약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제가 좀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보다시피 사지가 멀쩡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니 어려움은 없어.”
“건강하게 잘 사시기 바랍니다. 언제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 특히 어머니한테 잘하고, 내가 먼저 일어날게.”
우리는 짧은 상봉을 하고 헤어졌다.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상상도 못했던 이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들 둘은 친구의 누나들을 잘 챙기고 누나가 있음을 부러워하는 것을 볼 때 쉽게 융화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내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다. 언제까지 가슴에만 담아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