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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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 울타리가 유난히 돋보였다. 그해 5월이던가 하얀 탱자꽃이 분분하던 울타리 저쪽에서 작은 가위를 드신 아버지는 턱을 살짝 올리신 채, 이제 조금 열매다워지고 있는 포도송이를 고르고 계셨다. 아마도 더 실한 열매의 성장을 돕기 위한 가지치기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유난히 마당이 넓은 포도밭 그 집은,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깊은 우물이 두 개나 있었던 게 기억난다. 마당 넓이에 비해 길게 일자로만 지어진 주택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포도밭에 물려 있던 자두나무며 복숭아, 해를 거르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열리던 대추나무 열매가 넘쳐나 때로 어머니는 즐거운 비명을 흘리기도 하셨다. 유년의 집 좁은 골목길에는 아침이 되면 바닷물을 흠씬 뿌려 놓고 달아나던 새우젓 장수의 “새우젓 사려!”라든가 식전 찬거리를 유혹하던 두부 장수의 딸랑거리는 종소리, 또한 인삼 캐는 시기가 되면 유난히 골목길을 시끄럽게 달구며 아이들의 입맛을 유혹하던 호박엿 장수의 가위 소리, 고향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소소한 것들이, 더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쯤, 난생처음 이사라는 것을 했다. 유난히 골목이 깊은 새집은 포도밭도, 넘쳐나던 과일나무도 없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 있어, 그래도 여름철이 되면 오이며 호박이 열려 우리들 밥상에 오르곤 했다. 옆집과 경계를 가르던 담장은 내 키를 훨씬 넘던 접시꽃이 줄지어 피어나니 어린 내 마음에도 꽃빛 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물들어 왔다. 훗날 어머니는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작은 집으로 이사한 이유가 그때 도의원 출마에 낙선하신 아버지의 선거 빚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소연하듯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 4·19 학생 의거는 아버지를 도의회 의원으로 당선시켜 아버지의 정치 입문을 도왔다. 하지만 채 일 년도 넘기지 못하고 뒤따라 일어난 5·16은 우선적으로 지방 의회를 해산하였으니 아버지의 도의원 직책도 자동으로 상실되었다. 아버지는 정치계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동분서주하시더니 어느 날부터인지 차츰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멀어지셨다.
그런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도 늘 손님 같은 분이셨다. 조금은 낯설고 또 조금은 어려워서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이셨지만 어쩌다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이면 넘어져 들어온 내 무릎에 빨간 약을 발라 주시며 애틋한 눈빛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셨다. “공부 잘하거라. 너는 내가 서울 좋은 학교에 보내주마.”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녀들과 자주 소통하지 못하는 아버지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책의 말씀이 아니었나 싶다.
어머니는 깊은 잠을 이루시지 못했다. 자손 귀한 집안의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슬하에 사내아이를 두지 못했으니 근심은 갑절이 되어 늘 죄인인 듯 숨죽여 사셨다. 그러던 어느 겨울, 동생을 낳고 어머니는 안방에 누워 계셨고, 나는 찬바람이 부는 마당에서 홀로 줄넘기 같은 것을 하고 있을 때 대문 밖에서 누군가 이리 오라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셨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분은 삼십 리 밖 시골에 사는 외삼촌이셨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단 한 분인 오빠셨다. 외삼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낳은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를 물으셨다. 나 또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딸이래요.” 대답해 드렸더니 외삼촌은 아무 말씀도 없이 돌아서셨다. 그날 흰눈보다 더 하얗던 외삼촌의 두루마기 끝자락이 펄럭 바람을 일으키며 어머니 슬픔을 묻혀 떠났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은 늘 휘휘했다. 아주 먼 데서 오는 닭 울음소리,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바람 소리, 하지만 문 앞에서 곧 사라져 버리는 바람 소리는, 마치 닫힌 문 앞에서 미안한 마음으로 되돌아서는 아버지의 발걸음만 같았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날들은 점점 길어지고 기다리는 만큼 나는 우울해졌다.
그런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는 셰익스피어 전집 중 한 권을 내게 선물로 보내주셨다.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제목이 선명하였지만 여학교 시절의 나는 안타깝게도 내용을 읽기보다는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책꽂이 한쪽에 얌전히 모셔 두었던 기억이다.
겨울 하늘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다. 초가지붕 끝에 매달려 천천히 제 몸을 녹이고 있는 고드름을 잘라낸 아이들은 언 손으로 고드름 칼싸움을 하기도 하고, 얼음과자라도 되는 듯 오도득 소리를 내며 고드름을 바수어 먹던 유년의 기억도 이제는 아득히 멀다.
해마다 명절이 돌아올 무렵이면 동네 아이들은 모여서 장화홍련이나 콩쥐팥쥐 같은 연극을 해 보자며 골목길에 모여서는 배역을 나누고 머리에 책보자기 같은 것들을 쓰고서 연습한다고 소란을 떨곤 했지만 실제로 연극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어쩌면 유년의 그런 모의 자체가 연극이 아니었을까 싶다. 유년은 그렇게 조금씩 내 키를 세워 가고, 또 내 마음밭에 시라는 문학의 씨앗을 뿌리며 천천히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나는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특별히 문학적인 영향을 받을 만한 스승이나 선배도 없었으니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를 사 보며 어설픈 습작을 가지고 투고를 해 보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당선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학원』 잡지에서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던 몇몇 학생의 이름은 지금 문단에서도 익히 알 수 있는 분들이다. 어쩌면 『학원』은 내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시는 내 삶에 천천히 스며들어 왔다.
가을이 시작되던 햇살 좋은 오후, 나는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작은 사랑방 모임 같은 문학 동아리를 알게 되었다. 전화 통화로 길 안내를 받고 찾아간 그곳은 대여섯 분이 모여 문단의 특별한 어른들을 강사로 모시고 문학 강의를 듣는 작은 모임이었다. 하지만 강사로 다녀가신 선생님들은 문단의 큰어른들이셨음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그 문학 모임을 시작으로 시를 향한 내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하지만 시단을 향한 낯선 길은 나를 좌절케 하고 절망의 순간들로 주춤거리게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문학 동아리에 강사로 오셨던 성춘복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때로는 카페에서, 때로는 고궁의 벤치에 앉아 새로운 시작법을 배우고 습작함으로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여 시인이 되었으니 성춘복 선생님은 내 문학의 잊을 수 없는 스승이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선생님이 문득 그립다.
다시 갈 수 없는 길이 조금은 춥고 조금은 서러웠던 내 유년기였다면 멀고 아득한 길은 시의 길이라 하겠다. 아득히 먼 시의 길에는 푸른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이름을 다 불러 줄 수 없는 갖가지의 꽃들이 피고 지기도 하니, 나는 늘 비밀의 방 같은 시인의 삶을 살고 있음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