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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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윤이는 걷는 걸 좋아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혼자만의 작은 여행 같았다. 좁은 골목길, 오래된 담벼락, 그리고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가게 간판들까지도 소윤에겐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날은 뭔가 달랐다.
햇살이 유난히 따뜻했고, 바람은 풀잎 사이를 가르며 속삭이듯 불어왔다. 소윤이 조용히 걷고 있던 그 순간, 발끝에 무언가 살짝 얹히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낙엽인가 했지만, 움직였다. 소윤이 고개를 숙이자, 조그마한 털뭉치 하나가 힘겹게 발등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 너 뭐야?”
고양이였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듯 흐릿한 하늘빛 눈동자, 축 처진 귀, 가느다란 다리. 털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몸은 말라 있었다. 그런데 그 작디작은 입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는 놀랍도록 맑았다.
“찍.”
새소리 같았다. 너무 작고 가녀려서, 바람에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소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천천히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몸을 말고 소윤의 손바닥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그날 소윤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품 안은 따뜻했다. 가벼웠지만, 어쩐지 마음속 무게는 점점 더 깊어졌다.
“엄마, 아빠! 큰일 났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윤은 외쳤다. 엄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아빠는 신문을 보다가 안경 너머로 딸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 일이야?”
“고양이예요. 버려진 것 같아요. 너무 약해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엄마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다가와 소윤 품에 있는 털뭉치를 들여다보았다.
“소윤아, 이런 건 함부로 데려오면 안 돼.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빠도 일어나 다가왔다. 고양이를 본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고양이는… 책임져야 하는 생명이야. 잠깐 귀엽다고 데려왔다가 키우기 힘들다고 포기하면, 그 아이는 또 버려지는 거야.”
소윤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고양이를 다시 길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며칠만요, 진짜 며칠만. 병원도 데려가고, 밥도 챙기고,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결국, 엄마와 아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소윤은 고양이에게 작은 상자를 마련해 주었다. 상자 안에는 부드러운 수건을 깔고, 따뜻한 물을 담은 병을 넣었다. 그리고 고양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이 필요하겠지? 먼지… 어때? 처음 내 발 위에 내려앉았을 때, 정말 먼지처럼 가벼웠거든.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속엔 쏙 들어왔어.”
고양이는 대답하듯, 아주 작게 울었다.
“야옹.”
아주 가느다란 소리였다.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처럼 연약하고 조용했다.
그 울음소리가 소윤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작은 생명이 자신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따뜻했다.
다음 날, 소윤은 용돈을 털어 고양이 사료와 캔을 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와 밥을 주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매일 밤 먼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오늘 은지가 또 이상한 소리 했어. 길고양이는 더럽다나 뭐라나…. 난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넌 깨끗하고, 조용하고, 정말 착한 아이야.”
먼지는 조용히 소윤의 손을 핥았다. 그 부드러운 혓바닥이 닿을 때마다 소윤은 무언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비밀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갈수록 소윤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여전히 “이제 보내야 할 때”라고 말했고, 엄마도 “정들면 더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소윤은 점점 말을 잃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웃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먼지가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 몸이 떨렸고,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 먼지가 이상해요!”
소윤은 울면서 고양이를 안고 엄마 아빠 방으로 달려갔다. 잠결에 일어난 엄마는 놀라서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고, 아빠는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차 키를 들었다.
밤늦은 시각, 가족은 함께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수의사는 다행히 큰 병은 아니라고 했다. 과식을 했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 있다고.
그날 소윤은 대기실에서 조용히 울었다. 아빠가 옆에 앉아 소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어릴 때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어. 그런데 아주 아프게 떠나보낸 적이 있었단다. 그래서 다시는 안 키우려고 했던 거야.”
소윤은 고개를 들었다. 아빠의 눈가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너처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라면… 우리 가족, 다시 시작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소윤은 말없이 아빠를 안았다. 먼지는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며칠 후, 소윤은 가족회의를 열었다. 프린트된 자료, 고양이 돌봄 계획, 동물병원 진료 내역까지 준비해 왔다.
“먼지를 우리 가족으로 받아주세요. 제가 매일 밥도 주고, 청소도 하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아빠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엄마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지야,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해.”
소윤은 그날 밤, 먼지를 꼭 안고 잤다. 그 작고 따뜻한 몸이 이제는 더 이상 가벼운 먼지가 아니라, 무게감 있는 사랑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윤은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았던 생명이, 자신에게 가장 큰 용기와 따뜻함을 안겨주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