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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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 상자에 여러 색깔의 크레파스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심심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재미있는 놀이 할까?”
빨간색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뭐 할까?”
주황색이 얼른 말을 받았습니다.
“무지개 놀이 어때?”
노란색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무지개에 들어갈 색깔은 모두 밖으로 나가자.”
초록색의 목소리가 밝았습니다.
“넌 왜 이렇게 꾸물거리니?”
파란색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남색을 재촉했습니다.
“얘는 자고 있잖아? 보라야, 일어나 무지개 놀이 하자.”
멋쩍어진 남색이 보라색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무지개 놀이 하자구?”
보라색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다 모였니? 모두 7명이어야지?”
보라색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까지 세고는
“하나 모자라네. 누가 빠진 거야?” 하며 옆을 둘러보았습니다.
“쨘, 여기 있지롱!”
보고 있던 까만색 크레파스가 얼른 나섰습니다.
“무지개에 웬 까만색? 저리 비켜.”
모두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러자 보라색이 다시 세어 보았습니다.
“빨, 주, 노, 초, 파, 남,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나씩 짚어 가며 세었습니다.
“봐, 이번에도 여섯이잖아? 누가 빠졌지?”
보라색이 두리번거리자 다들 하하 호호 웃었습니다.
“일곱 맞아. 얼른 밖으로 나가자. 옛날 얘기에 아기 돼지가 자기를 빼고 세어서 하나가 모자란다며 자꾸 세었다고 하더니 보라색도 마찬가지네.”
“보라색은 아직도 잠이 덜 깼나 봐.”
떠들면서 일곱 색깔은 우르르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틈에 까만색 크레파스도 따라 나갔습니다.
“넌 왜 나와? 필요 없다니까.”
“저리 비켜.”
무지개에 들어갈 색깔들이 까만색을 확 떠밀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까만색은 시무룩해졌습니다.
“치,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고 나만 왕따 시켜.”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까만색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습니다.
“자, 차례차례 줄을 서자.”
맨 처음 빨간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아래 주황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아래 노란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아래 초록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아래 파란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아래 남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바로 그 아래 보라색이 위가 둥글게 동그라미 반을 그렸습니다.
다들 척척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 줄을 섰습니다.
알록달록 일곱 색깔 무지개가 다 만들어졌습니다.
“와, 됐다. 참 재미있다.”
무지개가 된 크레파스들은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 여기 와서 미끄럼을 타세요.”
“우리들이 예쁜 무지개를 만들었어요.”
크레파스 무지개들이 합창을 하자 저 멀리에 선녀들이 너울너울 춤추며 나타났습니다.
흰 구름을 탄 선녀들이 가까이 오자 까만색 크레파스는 심술이 났습니다.
“뭉개버리고 말 거야.”
까만색 크레파스는 검은 구름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으흐흐, 나는 악마다.”
검은 구름은 슬금슬금 무지개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확 덮어버렸습니다.
“앗! 무서워. 도망치자.”
무지개가 허둥지둥 흩어져 사라졌습니다.
검은 구름은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소나기를 한바탕 퍼부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무지개 색깔들도 모두 돌아와 있었습니다.
“아까는 심술쟁이 까만색 때문에 놀이를 망쳤어.”
“그러게 말이야. 신이 났었는데.”
“다시 날이 밝아졌으니 또 나가자.”
무지개를 만들었던 색깔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놀이할까?”
“예쁜 꽃밭을 만들자.”
“그래그래.”
무지개 놀이하던 색깔들은 우르르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귀여운 앉은뱅이 꽃을 피울 거야.”
보라색이 양지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는 귀한 서양란.”
남색이 예쁜 화분에 올라앉았습니다.
“나는 하늘색 코스모스가 되어야지.”
파란색이 울타리 쪽으로 갔습니다.
“어유, 내가 제일 바쁘겠다. 너희들 잎사귀를 다 만들어 줘야 하니까.”
초록색이 잘난체를 했습니다.
“그래, 잘 부탁해.”
여러 색깔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국화꽃을 만들 거야.”
노란색이 활짝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멋진 군자란 꽃으로 변해야지.”
주황색이 흙이 담긴 화분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왕비 같은 장미꽃송이로 피어나련다.”
빨간색이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꽃을 피워냈습니다.
빈 마당이 아름다운 꽃밭으로 바뀌었고 짙은 향기도 감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봄꽃부터 여름꽃, 가을꽃까지 모두 한꺼번에 피어났으니까요. 봄꽃밭도 여름꽃밭도 가을꽃밭도 아닙니다.
“뒤죽박죽 꽃밭이다.”
어느 꽃인가가 말했습니다.
“그렇긴 해, 그렇다고 우리 중에 누굴 빼냐? 봄을 뺄 수도 없고 여름을 뺄 수도 없고 가을을 뺄 수도 없고.”
“모두 한꺼번에 피는 것도 멋지지 않니?”
“새롭고 여러 가지 다 있고 좋잖아?”
“맞아, 4계절 꽃밭이네.”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하였습니다.
“4계절이 되려면 겨울도 있어야지, 나는 눈꽃 할 거야.”
언제 나타났는지 하얀 크레파스가 끼어들었습니다.
하얀 크레파스는 송이송이 눈꽃을 만들어 나뭇가지에 달았습니다.
“눈꽃까지 피니까 꽃밭이 더 눈부시다.”
여러 꽃들이 방글방글 생글생글 벙글벙글 웃었습니다. 잎사귀도 하늘하늘 손을 흔들었습니다.
왕왕 왈, 이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마당을 쩡 울렸습니다. 검은 개가 꼬리를 흔들며 나타났습니다.
“어? 까만 크레파스다! 까만 크레파스가 검은 개가 되어 나타난 거야.”
“맞아, 우리 줄기를 부러뜨리고 꽃밭을 망가뜨리려 왔나 봐.”
꽃들은 허둥지둥 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꽃밭은 다시 쓸쓸하게 빈 가을마당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니야, 얘들아, 아까 내가 너희들이 만든 무지개를 덮어버린 게 미안해서, 꽃밭을 지키려고 했던 거야. 누가 너희를 꺾어 가지 못하게 하려고, 개는 본래 도둑이 못 오게 집을 지키는 일을 하잖아.”
검은 개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옆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난 아무데도 쓸모가 없나 봐, 필요하지 않은 거야.”
검은 개는 힘없이 터덜터덜 돌아섰습니다.
한참 뒤, 꽃이 되었던 크레파스들은 전처럼 상자 속에 얌전히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크레파스 주인 슬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습니다.
“어머나, 검은 크레파스야, 왜 책상 밑에 혼자 숨어 있니? 별밤을 그리려고 했는데 검은색 네가 없으면 안 돼, 빨강별, 주황별, 노랑별, 초록별, 파랑별, 남색별, 보라색별을 더욱 빛내주는 게 바로 까만 밤이잖아, 어두운 밤일수록 별이 더 빛나거든.”
슬기의 이야기를 들은 크레파스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