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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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이 좁다. 태생적으로 협소한 구강 내에 어떻게든 비집고 나오려는 이빨 탓에 치열이 틀어지고, 악관절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 더불어 시작된 만성적인 통증은 발작적으로 종종 심해져, 나를 수십 분은 괴롭히고서야 잦아든다. 둥둥 떠다니던 산만한 정신을 육체에 지긋이 꽂아 놓을 정도만큼 아프다.
사랑을 알 나이에 자라며 그 아픔을 닮았기에 사랑니라 일컫는다고 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그럭저럭 마주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는 채웠으나, 직접 가슴에 품어보기엔 마음이 여전히 영 좁다. 영어로는 wisdom tooth, 지혜를 알 즈음에 나는 치아라고들 부른다지만, 어떤 알찬 깨달음을 담기에는 정신의 그릇 또한 좁다. 손톱만큼의 여유만 있었더라도 뚫고 솟아오를 길이 났겠건만, 발아하지 못한 사랑과 지성은 그렇게 묻힌 채로 썩어 들어간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흰 열매 한 알을 어떻게든 맺어낸 뿌리는, 미처 꺼내보이지 못했음을 원망하듯 신경을 갉는다.
사랑이 자라나 신체 일부가 되었으나, 그 아픔을 참지 못해 도려내 꺼내야만 한다. 써놓고 보자니, 일견 비극적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겨우 치아 한 개를 자기 연장(延長)으로 여기고,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에 슬퍼할 광인은 드무리라. 그것이 잉여인 주제에 아픔을 일으킨다면 더더욱 그렇다. 좌우간 인간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남는 것은 고통을 야기함이 자명한데, 이리도 좁은 잇몸을 타고났으면서 어금니를 세 개나 써 보겠다니, 애초에 과한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왕 그렇다면, 겨우 이빨 하나 뽑아놓고서는 고통의 근원이라도 적출해낸 양 만족할 일 아니리라. 내 비좁은 혼에 있어 한 사람분의 육체야말로 차고 넘치다 못해 무겁고 힘겨운 것이니 말이다.
다만, 쓴 약은 삼키기 어렵고 큰 수술은 두렵기 마련이니, 미리 상상하며 공연히 밤잠을 설치거나 몸서리치고는 하는 것은 내 정신이 변변찮은 탓이다. 내 혼이 어리기에 몸뚱이를 끌어안지 않고선 잠 못 드는 탓이기도 하다. 나마저도 실은 내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이 옹색한 골방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리라. 지금도 느껴지는, 턱이 서서히 돌아가는 듯한 이 꾸준한 통증이 내게 육은 그 본질에 있어 괴롭고 피곤한 것임을 집요히 상기시키고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내 빌빌대는 육신이 퍽 좋다. 수많은 가르침의 말들이 이곳 물질의 세계가 내 고향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으나, 어쨌든 나는 이곳 나름의 정겨움을 쉬이 거부하지는 못하겠다.
마침, 물질 대유행의 시대이기는 하다. 황금은 영원불멸성을 잃고 손때 탄 채로 숭배받는다. 형이하학의 빛에 눈이 멀어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된 이들은, 음(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밝히기만 하는 세상,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우주의 비밀을 드러내나, 도시의 불빛은 별들을 묻어 버린다. 치과의사가 들어낸 염증 난 잇몸 속, 외로이 썩어가는 뼛조각이 구강 라이트 불빛 아래 밝혀지고 제거되는 그때, 나는 적당히 미지근한 고통에 잠긴 채, 느긋이 천착해볼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가볍고 산만하기 그지없는 내 정신은, 누름돌 같은 아픔이 치워지자마자 금세 또 팔랑팔랑 부유하고 있을 것이 뻔하다. 날개 없는 것들의 부유는 더딜 뿐인 추락이다.
물론 모든 것은 리듬의 원칙에 따라 부침을 반복하는 법이니, 곧 모두들 손잡고 다시 정신에 골몰하는 시기가 오리라 나는 예상하고 있다. 상승과 하강, 번성과 쇠락, 그 국소적인 변화는 미세한 떨림과 같아서, 멀리서 바라보면 매끈한 선으로 보일 만큼 사소한 것이며, 그 선은 길게 늘어뜨리면 높은 봉우리와 깊은 구덩이를 그릴 것이나, 그 파동 또한 충분히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다시 미세한 떨림과 같을 것임을. 해서 참된 균형이나 중용은 그 자기 반복적 순환 과정의 매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당장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절망할 필요 없다는 소박한 믿음을 갖는다면, 그것만으로 흐름 전체를 달관할 대단한 능력을 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만은 흔들리는 대로 그럭저럭 편안해진다.
고통에서 해방된 정신은,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사유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아픔 없는 사고는, 일상이 강제하다시피 하는 직관을 단지 받아먹는 수준에 그치고는 하니 말이다. 통증에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루어지는 자못 간절한 묵상만이, 그 고통에서 유리되길 염원하고 있기에 진정 자유 지향적인 것이 아닐까? 그 고통이 육체의 것이든 정신의 것이든, 실로 그것에서 한 발짝 멀어진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이 걸어나가는 일임을 어렴풋이 헤아려 아는 것, 거기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다. 왜 걸어나가야 하는지, 왜 내던져야만 하는지, 왜 놓아주어야 하는지, 골백 번을 이해하더라도 실제로 그리 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공허할 따름이다. 고통은 증상에 불과하고, 그 원인은 무지와 태만일지니, 대증요법에 만족한 나는 막상 병근을 아예 뿌리뽑아버리는 일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비단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실은 겁이 나서 아직 치과에 가지 않았다. 통증이 조금 심해진다 싶으면, 집에 남는 진통제 한두 알을 삼키고, 그대로 사랑니가 있었는지마저 한동안 잊는다. 감각할 수도 없는 무엇의 존재마저 잠시 잊는다면, 그야말로 한시적 소멸, 작은 죽음일진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망각이라는 작은 죽음 덕에 살아 있음은 실로 죽음과 다름아니라는 자명한 진리를 잊고선 물질적 삶에 충실하고는 한다. 이런 식으로 방치하기만 한다면 악화하여 언젠가 돌이킬 수 없게 됨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곪아 부패하여 손쓸 수 없을 지경이 됨을, 가능한 한 빨리 이 가시가 독을 퍼뜨리기 전 뽑아내야 옳음을 당연히 알고 있으나, 어떤 상실과 변화에의 두려움, 그렇다, 그것은 우습게도 죽음의 두려움의 연장선이고, 나는 차마 밟기 두려워 망설이고 있는 꼴이다.
박힌 가시가 제 일부인 양 아파도 뽑지 않는 것은 우둔한 짓거리일 뿐이다. 잇몸에 박힌 바늘 하나 못 뽑는, 내 작은 턱보다도 한참 옹졸한 심장을 달고선, 궁극적으로 자신을 뽑아낸다는 큰일을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천성이 겁쟁이인 나는 이러니저러니 말만 많지만, 당장 치과에 방문부터나 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