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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기 하나에 스민 역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왕식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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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열네 살, 아직 댕기도 풀기 전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땅은 소녀에게 사춘기보다 망국을 먼저 가르쳤다. 왜군의 발굽이 골목마다 짓밟고 다니던 나날, 정조보다 생존이 절실했고, 꽃보다 피난이 먼저 피어나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어둔 만주의 밤길을 걸었다.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짓밟히지 않기 위해, 눈물과 침묵을 등에 진 채 국경을 넘었다.

 

눈물도 국경을 넘고
숨결도 밤을 넘었다
소녀의 댕기 아래
민족의 슬픔이 매달려 있었다

 

그 길은 누구도 축복하지 않았다. 누구의 손길도, 이름도, 지도에도 없는 길. 그 길 위엔 수많은 딸들이 지워진 채 흘러갔고, 그 발자국마다 역사의 통곡이 스며들었다.

 

스무 해도 채 안 되어 어머니는 생명을 품었다. 혼례의 예도 없이, 한복 자락도 정리하지 못한 채, 젖을 짜고 밥을 지으며 아이를 키웠다. 신부 수업은 고사하고, 하루하루의 고단함이 바로 그날의 교과서였다. 조용히 일어나 어둠을 꺼내던 새벽, 그 품속엔 피로 새긴 민족의 숨결이 젖어 있었다.

 

등불 아래
떨리는 손으로 꿰매던 옷자락
바늘귀에 맺히던 침묵
그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다

 

밤이면 오래된 이불을 덮고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불현듯 잠에서 깨어 외할아버지를 찾던 그 목소리는, 결코 시간이 앗아가지 못한 공포의 잔향이었다. ‘만주’라는 이름에 한순간 눈빛이 흐트러지는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삶은 조용한 바람처럼 스쳤다. 어디에도 이름을 남기지 않았고,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몸으로 써 내려간 그 생애는, 잉크가 아니라 피로 써진 시요, 희생으로 수놓은 산문이었다.

 

쪽빛 댕기 하나
어머니의 입술에 매달려
말 대신 삼킨 시간들
잊지 못할 노을이 되었다

 

세상은 언제나 힘센 자들의 언어로 채워진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약한 자들의 침묵 속에 숨어 있다. 글이 아니라 눈물로, 말이 아니라 숨결로 기록된 이름들이 있다. 그 지워진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내는 일이, 이 시대의 진정한 문학이다.

 

어머니는 책 한 권 쓰지 않았으되, 그 몸이 곧 원고지였다. 삶이라는 칸마다 고통과 인내를 새기며, 붉은 손등에 살아온 굴곡들을 적었다.

 

어머니는 종이에 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삶 전체가 시였다
붉은 손등에 새긴 굴곡,
그 굴곡마다 눈물이 줄을 서 있었다

 

문풍지 너머 겨울바람이 지나가듯, 그 생은 어느 날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언젠가는 그 바람의 방향을 따라, 그 눈빛의 고요에 다시 닿고 싶다.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은 단 한 마디.

 

“아가야, 우리는
말보다 먼저 울었단다.”

 

그 한마디가 세상의 모든 사전보다 깊었다. 그래서 시마다 새기게 된다. 댕기 하나에 스민 민족의 기억을, 길 위에 핀 별 하나로 되살려,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과 함께 하늘에 띄워 보낸다.

 

이름 없는 꽃들아,
바람결에 다시 피어라
우리는 너희의 피멍을 기억하고
시로라도 그 눈물 닦으리니

 

역사는 피를 말린 자들의 기록이 아니다. 피를 토하고도 침묵했던 이들,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 댕기 하나에 운명을 싸매고도 조용히 걸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다.

 

오늘도 시를 매만진다. 댕기처럼 조심스럽게, 매듭 하나하나에 그 숨결을 묶는다.

 

이제야 안다
한 조각 댕기 속에
역사의 전율이 숨 쉬고 있었음을
그 매듭을 풀다, 울음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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