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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풀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은숙(도은)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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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함이 눈에 보인다. 활짝 열고 있는 귀는 끝이 쭉 빠진 모양으로 위로 솟구쳤다. 작은 얼굴에 비해 유독 귀가 크니 숲속의 무슨 소린들 듣지 못할까. 커다랗게 빛을 발하는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목덜미에서 꼬리 부분까지 뻗은 짙은 줄무늬가 예사롭지 않은 몸짓을 말해준다. 짧은 앞다리에 비해 제법 긴 뒷다리는 몸의 균형을 잡는 데 요긴할 듯하다. 털 속에 감춘 날카로운 발톱은 나무를 타는 데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터이다. 몸집보다 긴 꼬리를 세우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먹느라 한창이다.
스마트폰을 정리하다가 찾은 다람쥐 사진이다. 생김새며 천진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다람쥐를 바라보는데 불쑥 생각나는 게 있다. 그날 제주도 할머니에게서 사 온 도토리가루이다. 냉장고를 뒤지자 꽁꽁 묶어 둔 가루가 보인다. 제주도에 다녀온 게 지난가을이었으니 벌써 몇 달이 지났다. 묵을 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루를 양푼에 담는다.
우리가 제주도 한라산에 갔을 때는 가을이 절정에 다다른 무렵이었다. 가운데가 봉긋하게 솟아올라 완만한 곡선을 이룬 한라산 등마루는 멀리서 보면 꼭 삿갓을 닮은 형태였다. 제주의 숨은 비경 31곳 중 하나인 사려니 숲에 들어섰다. 울울창창한 나무 사이에 서자 가슴에 길 하나가 뻥 뚫렸다.
오솔길은 호젓하면서도 신비롭기까지 했다. 원시의 기운이 곳곳에 서려 자연의 속살을 마주하는 듯 살가웠다. 쭉 뻗은 길이 있는가 하면 에돌아가는 길, 촉촉한 흙길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골짜기에는 붉은 열매를 단 나무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작고 세세한 것들과 눈을 맞췄다. 숲이 주는 분위기에 이끌려 열매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곳에서 잠시 쉬는 동안 주위에 떨어진 도토리를 보았다. 수북한 이파리 사이에서 반질반질 빛을 발하는 도토리는 야무지게 여물었다. 실한 도토리 한 알을 손바닥에 놓고 살펴보았다.
그 작은 도토리에 떡갈나무 한 그루가 들어 있는 것이다. 열매가 떨어져 싹이 트고 비와 바람, 햇볕의 힘을 빌려 당당한 나무로 성장한다. 나무는 점점 지평을 넓히며 산을 만든다. 이렇듯 자연 발아도 있지만, 들짐승의 역할도 크다. 다람쥐나 청설모가 겨울 양식으로 숨겨 둔 도토리를 깜빡할 경우 이것들도 숲의 구성에 일조한다.
상수리나무에 붙잡혀 마음에 숲 하나 키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청량한 새소리가 적막을 흔들었다. 새소리에 호응하는지 나뭇잎이 일제히 나부끼고 생생한 향이 주위에 자욱이 깔린다. 캡슐처럼 숲의 영양분을 압축한 무수한 열매들이 햇볕에 반짝인다. 열매는 숲속 짐승들을 키우는 귀중한 양식이기에 이를 지켜보는 동물들의 눈도 빛을 발할 것이다.
작은 동물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듯 차례차례 눈을 맞추고 사라졌다. 다람쥐와 청설모는 그중 가장 앙증맞았다. 새까만 눈으로 양 볼 가득 도토리를 물고 나무를 오르내렸다. 다람쥐가 나무의 키를 재는 사이 구름이 잎사귀와 숨바꼭질하던 풍경도 여유로웠다.
사려니 숲을 얼마쯤 걸었을 때였다. 노점에서 도토리 분말을 팔던 할머니가 우리 부부를 불러 세웠다. 산나물, 도라지, 더덕, 버섯과 약초들이 앞에 펼쳐져 있었다. 마수걸이도 못 했다며 할머니는 물건들을 권했다. 말투로 보아 외지 손님들에게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할머니가 권하는 도토리가루 한 봉지를 샀다. 도토리묵 쑤는 법도 즉석에서 배웠다. 그날은 집에 도착하면 바로 도토리묵을 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냉장고 속에 넣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봉지를 풀어놓고 보니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과의 열매 모양이 눈에 아른거린다. 제주 할머니가 알려 준 대로 계량컵에 물을 부어 도토리가루와 비율을 맞췄다. 미숫가루처럼 풀썩이던 입자들이 물을 만나자 얌전하고 다소곳해진다. 지난가을 단단하고 윤기 나던 도토리, 그 둥근 캡슐 속에 압축되었던 숲의 이야기가 풀어지기 시작한다.
오후 내내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낸 후, 웃물을 따라내자 굴참나무와 떡갈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도토리에 담겼던 숲의 자전이, 단단히 잠겼던 말들이 와글와글 쏟아진다. 고운 가루가 물속 깊이 스며들자 숲의 향내가 강하게 진동한다. 새소리가 거품을 휘젓고 지나간다. 숲을 아우르던 바람과 바다로 나간 고깃배를 흔들던 태풍도 얼비친다. 풀숲에 떨어진 단단한 도토리 한 알도 보이고 눈빛을 빛내는 다람쥐도 떠오른다.
압축 풀린 숲이 또 다른 숲으로 이어지고 푸르게 우거진다. 집안이 안온하고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찬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시 한 편을 주걱으로 살살 젓는다. 반죽 안에서 풀럭풀럭 행간과 쉼표가 돌아간다. 휘젓는 나무 주걱을 따라, 둥글게 파문처럼 퍼지는 숲의 생애를 읽는다. 처음엔 밀크커피 색을 띠던 도토리 물은 점점 투명하게 변해 가더니 걸쭉해진다.
지난날의 천둥 번개와 숲을 북처럼 두드리던 소나기 소리까지 따뜻한 냄비 속에서 노곤하게 풀어진다. 한라산의 푸른 가슴에 안겨 산짐승들은 곤한 잠을 청했으리라. 바람은 가끔 해당화에 고운 빛깔을 입혀 주고, 빗방울은 금새우난초의 노란 절정을 깨웠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비자림 오솔길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우리 집 거실이 통째로 한라산으로 변한 느낌이다. 문을 열면, 갓 태어난 고라니가 엄마 다리에 기대어 홀로서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숲 하나가 풀어져 도토리묵이 되었다. 여린 이파리를 흔드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투명하고 아늑한 이 저항, 숲의 정기를 담았던 알맹이가 나긋나긋 부드러운 형태로 거듭났다. 소음 한 줄 없이 압축된 둥근 태양의 녹말이다.
남편에게 도토리묵 한 접시를 양념장과 함께 내놓았다. 묵은 싱그럽고 차가웠다. 매끈한 한 점을 간장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침샘을 자극하며 화르르 퍼지는 맛, 자연을 맑은 물에 우려낸 것처럼 환하다. 오직 물과 도토리만이 합일한 순하고 선한 맛, 그 뒤를 따라오는 한라산 풍경의 여운과 다람쥐와 청설모, 찌르레기의 여음, 모든 것이 모였으니 지금 한라산 사려니 숲은 향긋한 고요가 서말쯤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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