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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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가 어버이날이네. 그날 엄마 산소 갈까?”
동생이 쫑알거리며 나를 쓰윽 쳐다본다. 그러자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두 자매는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한참 후 무엇이 생각났는지 동생이 “언니, 내일이 아버지 기일이네. 내일 다녀오자” 한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아버지 기일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부모님 산소를 가려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사과 하나, 배 하나,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인절미, 소주 한 병, 포 하나, 그리고 접시며 필요한 몇 가지를 챙겨 아버지와 엄마가 누워 계시는 속리산 근처 선산으로 달려갔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참 안됐어, 고생만 하시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동생 말에 공감하며 어느덧 산허리춤에 계신 부모님께 도착했다. 부모님께 인사도 나누고 생전에 좋아하시던 커피도 올려 드렸다. 산소 주위에 있는 잡풀을 손으로 뽑으며 부모님을 생각했다.
헤아릴 수 없는 큰 마음, 감히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저 가슴만 먹먹하다. 어느 누가 그랬던가. 부모님이 돌아가셔야 모두 효자 효부가 된다는 말. 살아 계실 때에는 모르고 내가 외롭고 힘들 때 생각나는 부모님. 내 설움에 내가 운다는 말이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옛말들이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 이제 우리도 부모님 나이가 되다 보니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효녀가 되나 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하며 둘이 마주 보며 겸연쩍게 웃어본다.
그리고 내 어릴 적 이야기도 풀어본다. 어느 해 봄이었던가. 언니랑 나물을 캐러 바구니를 옆에 끼고 논두렁 밭두렁을 깔깔거리며 나물을 찾아 헤매었다. 냉이며 달래, 쑥을 정신없이 캐느라 나는 언니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참 후 언니가 보이지 않아서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언니를 발견하고 뛰었다.
“언니!”
목청 높이 부르며 언니 쪽으로 달려갔다. 어릴 적에는 숨도 쉬지 않는 듯 앞뒤도 볼 것 없이 왜 그리 열정이 남아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몇 발자국이나 뛰었을까. 난 악 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논두렁 풀 사이로 아카시아 나뭇가지를 뾰족하게 깎아 놓은 곳에 그만 발을 찔리고 말았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뛰다가 발이 고무신과 함께 박혀 버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봐도 박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아주 옛날 1960년 중반 때 일이다. 내 나이 6∼7세쯤 되었을까. 얼마나 아팠던지 지금도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는다. 고무신발 속에는 어느새 흥건하게 피가 올라왔다. 소리소리 지르며 울고불고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있을 때 언니가 달려와서 내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니 뽑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어느새 신발 속에는 피가 난자하고 엄마는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나를 업은 채로 집으로 달려가셨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옆집 아주머니를 부르시며 당황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시절에는 병원에 가려면 십 리를 가야 했다. 우리 마을엔 차도 없고 십릿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던 두메산골이었다. 나의 크나큰 사고 소식에 시골 마을이 시끌벅적했던 것 같다. 엄마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발을 움켜잡고 나를 안고 펑펑 우셨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쩔쩔매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애 죽인다며 아랫집 아주머니는 장독대로 가시더니 된장을 한 움큼 내 발바닥에 덥석 올리시고 엄마는 입고 있던 메리야스를 쭉 찢어서 다리에 동여매셨다. 팔팔 뛰는 나를 여러 사람들이 잡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피도 멈추고 발바닥이 감각이 무뎌진 건지 기절을 한 건지 정말 치료가 된 건지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아픔도 조금 진정된 듯했다. 그 시절 이 방법이 최선이었는지 난 모른다. 지금 내가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내 발바닥 흉터를 번쩍 들어 보이며 부모님 산소에서 오랜만에 동생과 그때를 상기하며 수다를 떨었다. 엄마도 그땐 그 방법이 최선이었을 거라며 웃픈 얘기를 이것저것 풀어냈다.
산에서 내려와 보은시장을 들렀다. 시장에는 선산을 다녀오면서 의례적으로 순대국밥집을 부모님 살아계실 적부터 같이 들렀던 곳이다. 우리 가족의 추억이 있는 곳, 그리워서 오늘도 들러 본다. 음식 맛은 그대로였고 부모님은 우리에게 추억과 그리움과 사랑만 남겨 놓고 멀고 먼 곳으로 고단했던 긴 여행을 마치고 그렇게 떠나셨다.
우린 점심을 맛있게 먹고 길들여진 다음 데이트 코스 속리산으로 향했다. 익숙함에 편안했던 동생과의 동행길, 다음에는 큰언니 작은언니도 함께하길 마음먹어 본다. 부모님들과 추억 그리고 나와의 만남이었던 오늘, 먼 훗날 오늘이 고스란히 남아 또 다른 추억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