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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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광고를 비롯해 각종 포스터 도안에 인공지능 활용이 일상이다. 정보 몇 개만 주면 득달같이 시를 지어 주고 작곡도 하고 노래까지 불러 주는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사람과 달리 실수나 거짓말 따위 통하지 않을 거라는 AI가 믿음을 깨고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하고 실제 없는 정보도 만들어 낸다. 순수예술 활동만으로는 생활하기 어려운 예술인한테 강력한 대항마가 떡하니 나타난 기분이다. 예술 단체에서 심심찮게 <AI 시대를 맞이하여>라는 주제로 포럼을 열고 토론회도 활발하게 진행하는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임을 받아들인 것이리라.
지난해 내가 속한 단체에서 시를 비롯한 짧은 글을 챗GPT에게 주고 노래로 만드는 열풍이 일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뒤처질 게 뻔해 나도 슬며시 궁금한 게 있거나 책을 뒤져 자료 찾기가 귀찮을 때 활용해 보았다. 어느 날 내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하고 소개해 달라 했더니, 그럴싸하게 포장까지 해서 알려주었다. 그러나 도통 나답지 않아 지워버렸다. 또 사진을 주고 만화로 그려 달라면 일본의 유명한 지브리 스튜디오 스타일 또는 디즈니 식으로 몇 분 걸리지도 않고 치환해 준다. 재미가 붙은 사람들이 늘며 너도나도 미야자키 하야오 풍으로 그려진 캐릭터 하나 정도는 갖게 되었다. 모 문예지는 아예 AI 문학 신인상을 공모해 당선작을 내기도 했다.
이젠 누구나 작가가 되거나 작사가, 작곡가가 되는 시절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예술에 대한 욕망이 현실로 실현 가능한 세상이 됐는데 예전만큼 책을 읽거나 창작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적다는 거다. 읽지 않으면서 잘 쓰기를 바라며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풍선처럼 커지기만 한다. 고전을 읽고 철학적 사고를 통해 성숙해지기 위함이 쓸모없거나 뒤처진다 생각하며 시간을 쏟아붓지 않는다. 서점가에 한참 전부터 고전이나 철학서 내용을 발췌한 책들이 인기를 끌 때 마음 한켠에 빨간불이 켜진 것처럼 불안했다. 대하소설은 언감생심, 손바닥 수필이나 아포리즘 또는 브런치, 앤솔러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책들이 소비된다.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 청소년이 점점 늘어나고 문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는 오래되었다.
입시라는 관문이 턱 버티고 있었으나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 읽기가 좋았다. 독서 카드 칸이 꽉 차도록 대출받은 책을 쉬는 시간마다 짬짬이 읽었다. 내용 전부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긴 글을 완독했다는 뿌듯함이 내 안에 쌓였다. 독서는 당연한 일상의 한 부분이었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처럼 독서와 글쓰기는 한 몸이었다. 하지만 AI 앞에서 덜커덕 제동이 걸렸다. 문화가 변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산업화가 거침없이 진행되던 시절의 경이로움과 차원이 다른 변화란 생각이 든다. 진정 예술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이란 게 있을까. 늪에 빠진 듯 헤어나오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내게 남편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당신 그렇게 앉아 있기만 할 거면 이거 한번 읽어볼래?”
글을 쓸 리 없는 남편이 내게 건넨 건 A4 용지를 빼곡하게 채운 수필 원고였다. 내가 제목만 써 놓고 깜박이는 커서와 씨름 중인 걸 본 그이가 잠깐 기다려 봐, 해서 커피라도 내려줄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은 제목으로 쓴 수필 한 편일 줄이야. 어리둥절한 내게, “AI에 써 달랬어. 참고해” 한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때 드는 감정이 이런 건가 싶다. 남편은 ‘그깟 글 한 편 쓰는 게 뭐라고 오전 내내 컴퓨터 앞에서…’라고 말하고 싶은데 꾹 참는 표정이다.
빈 화면을 다시 한번 보고 그가 건네준 글을 읽었다. 문장이 거슬리지도 않고 교열도 바르며 주제에 맞게 교훈까지 얹어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글이다. 어떤 문장은 내가 썼던 건가 싶을 만큼 비슷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내가 당신 문체로 서정성을 담아 쓰랬지” 하고 내 생각을 읽은 듯 한마디 툭 던진다. 순간 나는 제목만 있던 화면을 깨끗이 지우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수 창작 세계까지 AI가 버젓이 내 행세를 하니 당황스럽고 힘이 빠진다. 글 쓸 때 챗GPT를 활용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며 능숙하게 기계를 다루는 걸 내심 뿌듯해하는 지인이 있다. 그렇게 얻은 글이 완전한 내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창작은 어느 선까지가 내 것일까. 글쟁이로 막 발을 뗐을 때, 모차르트도 아니면서 문장이 술술 풀리던 날이 있었다. 한 번도 자리 이탈하지 않고 원고지 20매 분량을 썼다. 소위 글발이 선다는 게 이런 거로구나 했는데, 천천히 읽어볼수록 낯익은 문장과 낱말들이 보였다. 내가 썼는데 내 것 같지 않은 의심이 더 나아갈 수 없게 했다. 수없이 읽은 타인의 시와 수필, 소설 등 딱히 특정해 불러낼 수 없는 작가 풍으로 써놓고 백 퍼센트 내 창작이라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한동안 모 소설가의 표절 시비가 회자된 일이 있다. 습작 시절 앞서간 문인들 글을 필사하며 익숙해진 표현을 자신도 모르게 작품에 쓰게 되었다고 해명한 기사를 읽었다.
카메라가 세상에 나온 후 회화 예술의 본질에 대한 담론과 혼란이 있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무리 정밀하게 실물과 똑같이 그려도 카메라를 능가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미술계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만 했다.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샘’이란 제목으로 떡하니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예술작품으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는 예술이란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했고, 이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다양하고 개성이 담긴 작품들이 등장했다. 팝아트란 새로운 장르도 생기고 사진과 그림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도 등장했다. AI가 생성한 글을 읽고 뒤샹이 떠오른 건 미술계가 겪었던 혼란 뒤에 상상의 세상이 넓어졌듯이, 문학판에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길 하나가 생겨난 느낌이다. 미답의 길이 어떻게 채워질지 큰 숙제를 받아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