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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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오랜만에 아버지를 떠올리며 뭉클한 눈물이 치솟는다.
57년 전 66세, 너무 일찍 하늘나라 소풍 가신 그리운 아버지. 알뜰장에서 민어를 보는 순간 추억 소환이다. 1905년 음력 5월 경남 거창 출생, 전형적 경상도 사나이 아버지가 즐기시던 민어. 14살 나이에 고향을 떠나 배제학당을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한 엘리트. 경상도 사나이의 우직함은 어쩌지 못해도 경상도 사람답지 않은 아버지다. 성품, 언어, 식성, 생활 양식 전반이 시대를 앞서가시는 개방형 사고로 우리 가정의 든든한 대들보였다.
아빠 바라기 둘째 딸은 체형 빼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닮았다. 오랜 일본 생활로 기름지고 맵고 짜고 비린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담백한 맛 즐기는 식성까지….
삼복더위에 지친 기력을 회복시키는 고단백 식품 민어는 횟감, 찜, 튀김, 조림, 전, 채소와 함께 탕으로도 꼭 한번은 먹어야 할 여름 보양식이다. 아버지 최애 생선이니 생신상에 빠질 수가 없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전, 찜, 탕은 필수. 튀김과 횟감까지 준비하느라 땀 뻘뻘 흘리시던 엄마. 함께 준비하고 감사하며 맛있게 즐기시던 아버지 모습에서 진한 부부애와 따뜻한 가족애를 배웠다. 그 기억 속 민어를 손질 의뢰해 포를 뜨고, 남은 것까지 받아 들고 와서 의기양양 굽고, 튀기고 탕을 끓여 한 상 차려 놓고 추억 속에 잠긴다.
아버지는 내 삶의 버팀목이고 스승이며, 똥고집도 받아주는 자상한 아버지요 친구였다. 덕수궁을 비롯한 고궁, 남산, 명동, 백화점, 박물관, 전시장, 즐기시는 맛집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던 아버지. 일제에 항거하여 전기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신경통으로 고생하셨다. 잠시 D일보 도쿄 지국장, 해방 전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을 위해 교편도 잡고, 상경하여 함께 공부한 지인과 고급 도서 제본용 특수 제지 회사를 운영하셨다. 매사에 사리 분별 엄격하며 강직하셨던 아버지.
많은 회사 재정을 관리하시면서도 ‘회삿돈 보기를 돌같이’라 하신 청렴의 상징이다. 전후 1960년대 학비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할 때도 단호하셨다. 부부는 닮는 법,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못하는 엄마와 함께 자식들에게는 고지식하고 답답하여 불평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우리 집 사전에 돈을 빌리거나 외상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뜨거운 교육열과 투철한 교육관으로 우리 삼 남매에게 물고기를 나누어 주기보다 잡는 법을 가르치셨다. 신앙 유산을 물려주셨고, 기도로 본을 보이신 믿음의 아버지, 타인에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의 삶을 위한 자립심을 강조, 교육의 필요성과 인성 교육을 첫째로 여기신 분이다. 속 깊고 인정 많으셨던 아버지.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셨기에 딸이지만 빠져들었다. 누구에게도 자랑할 존경의 대상 부모님에 감사한다.
막내로 귀하게 크신 엄마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여자는 나중에 일을 하지 않더라도 일을 알아야 한다며 엄마가 부엌에 계실 때 딸들을 부엌으로 내몰고, 아침에는 한 밥상에 모이기 힘들지만, 저녁 식사 시간을 정하고 밥상을 딱 한 번만 차리게 하신 아버지. 가족의 대화와 친목을 위해서라지만 식구 다섯에 여러 번 상 차리는 엄마 수고를 덜게 한 사랑과 교육의 이중 효과다. 덕분에 시간 못 지켜 굶는 날 있어도 아버지가 솔선수범하시니 자식들은 절대 순종이다. 그뿐이랴, 저녁 설거지는 당연히 딸 둘의 몫으로 하기 싫어 서로 다투면 손수 하시던 분. 엄마가 힘들어하시면 장바구니 들고 나의 손 잡고 시장 보기, 손수 밥 짓고 반찬 장만하시며 아내밖에 모르던 아버지. 비웃는 친지들 아랑곳하지 않고 시대 의식 개선에 앞장서셨다.
S교대 입시에 실패하여 낙담시킨 불효녀 주제에 알량한 자존심 앞세워 진학 포기 선언한 고집쟁이 딸에게 ‘우리 집 사전에 재수라는 단어는 없다’고 선포하셨다. 교사가 꿈인 딸 위해 정보 수집, 나도 알지 못한 신설 3년 차 S사대 가정교육과 원서를 손수 접수하신 후 응시 여부 선택은 나에게 맡기셨다. 나를 귀하게 여겨야 남도 나를 귀하게 여긴다며 진학을 권장, 입학 후 적성에 맞지 않으면 편입 시험을 권유하며, 나의 미래를 열어 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병환 중에 계시면서 고집 센 딸에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둥글둥글한 삶을 강조하셨다. 수술하신 다음 날 원치 않은 대학이지만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두 손 꼭 잡아 주시며 ‘애썼다’고 등 두드리셨다. 일 년 뒤 예상치 못한 소천으로 경황 중 편입 시험 기회도 날아가고, 아버지의 부재로 닥쳐온 경제적 난관으로 친지들이 나에게 휴학을 강요했다. 하지만 휴학은 절대 안 된다는 엄마의 강한 의지와 고교 짝꿍의 배려, 학과장님의 국비 장학금 추천과 온갖 아르바이트로 버티고 무사히 졸업했다. 40년 교직 생활 후 정년퇴임하기까지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현재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부모님의 늦은 결혼으로 자식들 힘들게 한다며 대학 졸업하면 바로 시집보낸다던 아버지. 철두철미한 삶의 철학이 나의 생활 철학이 되었다. 아버지 같은 남자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던 나, 아버지 같은 사람을 찾지 못해 결혼 못한 딸을 하늘에서 지켜보시며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끝까지 지켜주지 못함을….
나의 삶에 든든한 영원한 멘토요 버팀목, 기도하는 아버지셨다. 딸 아들 편애 없고 큰소리 한 번 없는 화목한 가정에서, 유독 둘째 딸 바보 아버지 덕에 나를 ‘데리고 들어온 딸’이냐며 나무라시는 엄마의 불평도 웃음으로 감싸신 아버지. 자신의 꿈과 욕심보다 가족 사랑과 헌신적 희생의 상징, 나의 아버지가 오늘 유난히 보고프다. 오늘 밤 꿈에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