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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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정리하다가 옛 추억의 사진을 발견하였다. 사진 프레임 안의 배경을 보니 1970년대부터 1980년대 고향 거리의 풍경이 촬영되지 않은 사진 프레임 바깥 풍경까지 뇌리에서 활동사진처럼 재생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적의 내가 기억하는 고현 거리가 떠오른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3.5㎞ 걸어서 등교하였다. 눈이 오는 날이면 고현항과 연접해 있는 산비탈 소나무에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눈이 소복이 쌓였다. 조용한 바다 물결이 어우러져 해변을 끼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올 때 보는 풍경은 마치 캔버스에 유명 화가가 그린 한 폭의 동양화 보는 것 같았다. 그때의 질척거리는 신작로를 행복한 마음으로 걸었던 것이 생각난다.
그 당시 거제도는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용틀임하는 때였다. 양대 조선소가 첫 삽을 막 뜨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기억된다. 아직은 부지 정지 작업하는 기초 단계로서 거제 경기에 영향을 주지 못한 고향 거리는 도시화되지 않은 시골 거리였다. 한내다리를 넘어 사거리를 거쳐 학교까지는 시내 흙먼지 날리는 도로를 지나야 했다. 현재 도시 재생 사업으로 공연장이 설치된 그 당시 명칭 ‘신현지서’가 있던 곳을 조금 지나 양씨주유소가 있었다. 양씨주유소부터 아래쪽 건물은 고려개발에서 매립한 신도시이다.
그때 있었던 추억의 건물들 첫 번째 건물은 김창숙 옷가게에 있는 곳에는 반씨잡화점이 있었다. 연이어 잡화를 파는 연초상회가 있었는데 트럭이 연초상회로 돌진하여 상점이 왕창 부서진 일도 있었다. 아버지가 사준 일제 ‘리코’ 시계가 고장 나면 고쳐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일광당, 내가 총각 때 양복 맞춤을 한 유 씨 성신 양복점, 거제도 선남선녀들의 선보는 미팅 장소로 이용된 “섬 다방”이 있었다.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 잊히지 않은 기억 두 가지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숙제해 오지 않았다고 매 맞은 일이다. 때마침 엄마가 학교에 와 수업받는 나를 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보고 있는 그때 작대기로 손바닥을 강하게 3차례 때려 손이 없어진 것 같은 통증을 준 초등 3학년 담임선생님이 운영하던 금정여관을 지난다. 영원히 못 잊을 아픔이다. 고현삼거리 우측 시작 건물은 현재 건축되지 않은 고현시장이 있었다. 그다음 위에 지금도 진하게 기억에 남는 가게가 있었다. 건재철물점이다.
군청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이 일은 내가 처음으로 교통사고를 낸 일이었기 때문에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하던 일이 밀려 저녁 늦게까지 근무하고 퇴근할 때의 일이다. 지금의 고현중앙로 고현시장 입구 현재 파리바게뜨 위치다. 그 당시에는 이곳이 건재철물점 가게가 있었던 곳이다.
시내의 도로가 흙바닥이라서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사거리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앞에서 택시가 우회전하면서 자전거 탄 나에게 헤드라이트를 비추었다. 그 순간 탁 하고 물체가 받쳐 내가 타고 가던 자전거가 넘어졌다. 택시 불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보니 어린아이가 우는 것이었다. 나는 사고를 직감하고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워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순간 목재철물 가게에서 어른이 뛰어나왔다.
“야 이노무 새끼야, 내 아들을 왜 치었나? 치웠으면 빨리 병원에 데꼬 가야지!”
소리치며 내 뺨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순간 눈에 별이 번쩍 튀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부지, 내가 뛰어들었어요. 그 사람 때리지 마세요” 하며 울면서 말했다.
곧 그 아저씨는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었다.
“예, 거제군청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밤늦게 일하고 가다가 자전거가 고물이라서 헤드라이트가 없고 앞에 택시 불빛이 나를 비춰서 눈이 부셔서 애가 뛰어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자 애 아버지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내가 택시를 못 부르고 있으니 자기 가게에 들어가서 전화를 해 차가 곧 사고 현장으로 와 당시 기독병원, 지금의 백병원으로 달렸다. 응급실 진료를 해 보니 상처가 없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의사가 결과를 알려주었다. 며칠 후 댁을 찾아보니 괜찮다는 말을 해서 다시 미안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정말 하늘에 감사한 마음으로 나왔다.
그 후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나의 눈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에 번쩍하는 별을 보게 한 그분도 연로하실 것이다. 지금은 그 가게를 아들이 운영한다고 한다. 가게 장소도 멋진 건물을 신축해서 옮겼다. 조선소 호황으로 거제에 건축사업이 짧은 기간에 폭주하자 건재상 장사가 잘 되어 부자가 된 것이다. 필요한 자재가 있을 때마다 방문해서 물품을 사는데 아들이 결재한다. 말투와 행동이 공손하다. 어렸을 적부터 인성이 착했으니 장성해도 사람이 참 착해 보인다.
인성은 타고나는가 보다. 나는 그 아들과 어렸을 적 사고를 잊지 않고 있지만 사고를 당한 아들은 기억에도 없는 일일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리고 사업이 더욱 잘 되어 사회에 베풂과 나눔의 일에 이바지하여 더욱 좋은 사회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 마음속으로 해 보았다. 사진을 보니 그때도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렵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 당시의 고현 시내 가게 거리는 정이 있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서 방귀만 뀌어도 이웃의 생활사를 알고 지내는 소박한 소도시여서 옛 고현 거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청춘을 불사르고 머리에 서리가 내린 지금 고현의 당시 옛 모습을 이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추억 사진의 등장인물은 같은 직종 업무로 연관된 일을 한 분이다. 이분은 경기도 수원에서 이곳으로 발령 받아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수년이 지난 지금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자기도 살기 어려울 때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어서 거제도 특산품이라도 보내 드려야 하는데 연락처를 모르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1981년도 고현 거리의 풍경사진을 보니 그때 내 몸에 풍기는 젊음의 뜨거운 열정이 고현 거리를 휘젓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