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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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큰 보람만큼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다. 이 세상 어느 작은 것도 거저 얻어지는 것은 없다. 하물며 자식을 얻는 일인데 어떤 어려움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우선 산고(産苦)의 고통과 그에 버금가는 입덧이라는 게 있고 그 과정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지금이야 문명이 발달되고 의술이 첨단을 걷는 시대니 그렇지는 않지만 옛날 어머니들은 댓돌 위에 신발 벗어놓고 아기 낳으러 들어가며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으니 목숨을 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대여섯은 보통이고 열 명 이상도 낳았으니 우리의 어머니들은 참으로 대단하고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 별난 입덧 때문에 주위 사람들까지 고생시켰다. 보통 한두 달 하는 입덧을 나는 첫아이 적엔 열 달을 했다. 특별하게 먹고 싶은 것도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물만 먹어도 토하는 바람에 심할 땐 의사를 왕진시켜 주사 맞고 때로는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였다. 모든 것에서 나는 냄새가 싫었다. 부엌에선 부엌 냄새, TV 화면에 나오는 음식을 봐도 그 음식 냄새가 나는 것 같고 심지어 선풍기 돌아가는 바람에서도 냄새가 났다. 길 가다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롤케이크를 보고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 후 다른 음식은 대부분 회복됐는데 롤케이크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먹지 않는다.
그때 옆에서 사람들은 입덧하다 죽은 사람은 없다고 했지만 워낙 못 먹으니까 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때쯤인가 한 가지 먹고 싶은 음식이 하필이면 친정에서 올케언니가 해주던 방울무(김장무 아주 어린 것) 솎아서 뚝배기에 끓인 된장찌개였다. 그때가 마침 김장무 배추 심어서 고만큼 자란 음력 7월이었다.
그 시절 부산에서 충청도가 어디라고 가당찮은 일이라는 건 알겠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온갖 음식을 생각해 봐도 오로지 먹고 싶은 건 그 된장찌개뿐이었다. 그것이라면 잘 먹을 수도 있고 힘이 날 것 같았다.
도저히 다른 수가 없었으니 어느 날 남편이 충청도 예산 친정집에 데려다주었다. 전국이 일일권으로 발전된 지금이야 서울에서 아침 먹고 부산에서 점심 먹는 일도 예사로운 일이고 자가용 없는 집도 없지만 반세기도 전 그때는 결코 쉬운 결정도 쉬운 일도 아니었다. 집에 도착하니 곧바로 올케언니가 그 음식을 만들었다. 나는 토할 걸 생각해서 방에도 못 들어가고 신발 신은 채 마루에 걸터앉아 간절히도 먹고 싶었던 그 찌개를 입에 떠 넣었다. 아! 바로 머릿속에서 맴돌던 그 맛이었다. 그러나 역시 토하는 건 마찬가지, 그래서 넘어오기 전에 빨리빨리 네댓 숟갈 떠먹고 뛰어나가 토하고 물로 입가시고 또 먹고 토하고 그렇게 하길 몇 번 반복했다. 그렇게라도 먹었다고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때는 부모님이 계셨으니 내게 얼마나 따뜻한 세상이었나. 딸의 임신 소식에 그토록 기뻐하시고 심한 입덧을 안타까워하시던 부모님이 오늘도 그립고 그립다.
그렇게 친정에서 추석 명절까지 지내는 동안 나의 별난 입덧은 우리 동네는 물론 옆동네까지 소문이 났다. 이 집 저 집에서 조금 색다른 음식을 하면 가져오고 옆집 시몬 엄마는 전에 내가 자기네 고추장이 맛있다고 했다면서 혹시 입맛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고추장을 퍼오기도 했다. 입덧이라는 게 원래 평소에 좋아하는 것하고는 상관없는 것 아닌가. 마음을 담아 보내준 것들을 맛있게 먹지 못해서 죄송하고 미안했지만 고마운 마음들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혼자 있는 남편 생각하면 언제까지 친정집에 머물 수도 없고 여전히 잘 못 먹으니 부산 집에 갈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즈음 사업하는 오빠와 직장에 매인 남편은 바빠서 하루 이상은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오빠가 장항선으로 천안까지 나를 데려가고 남편은 경부선으로 천안까지 와서 나를 인수인계해 가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부산 집에 와서도 입덧은 계속됐고 남편이 어느 날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게 뭔지 차라리 내가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내게는 지금도 그 끔찍한 산고보다도 입덧의 고통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심한 입덧 때문에 태아 건강이 걱정됐는데 뱃속에서 어떻게 실속을 차리고 3.4kg의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 주었으니 참으로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둘째 셋째는 조금 덜했지만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얻었다.
자식 하나 낳아 키우는 일이 말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렵지만 자식들로 인해 얻어지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에 비하겠는가. 요즘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봤으면 싶다.
나는 내 어머니의 자식인 것이 행복하고 내 아이들의 어머니인 것도 행복하다. 그리고 이 세상 어머니들 대열에 서 있는 것도 더없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