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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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이렇게 더웠을까? 이백육십삼 년 전 윤오월 스무하루. 복중 무더위 속에 작열하는 태양은 정수리에 꽂히고 바람 한 점 없었다. 개미 한 마리 얼씬 못할 삼엄함 속에 마당 한가운데 서 있던 뒤주 속 사도세자는 여드레 만에 운명했다고 한다. 고요와 적막이 감돌았을 창경궁 휘령전(徽寧殿) 앞뜰, 조선왕국 오백 년에 전무후무한 끔찍스러운 임오화변(壬午禍變)을 이 여름의 유난한 더위 속에 떠올린다. 아바마마의 죽음 앞에 말을 잃은 열한 살의 왕세손 이산(李뽁)과 어마마마 혜경궁 홍 씨의 오그라진 가슴을 그 무엇에 비견하리. 여름이 시작된다는 소서(小暑) 더위가 아무리 뜨거운들 그날의 참혹함만 할까.
오늘은 수필 교실의 야외 수업으로 서울 근교 고양시에 소재한 서삼릉 효창원(孝昌園)을 참배하는 문화 탐방의 시간이다. 수필가로 등단한 문우를 축하하는 모임을 겸한 점심 식사가 너무 길었나 보다. 한낮의 햇볕이 무척 뜨거웠지만 우리는 말없이 숙연하게 숲 사이로 난 긴 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원래는 한양 서쪽에 있는 3기의 능(陵)을 고양(高陽) 서삼릉(西三陵)이라 했다. 조선 11대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가 묻혀 있는 희릉(禧陵)과 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孝陵), 25대 철종과 철인황후의 예릉(睿陵)을 일컬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릉이다.
훗날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와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그 비운의 왕세자가 묻힌 소경원(昭慶園)과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무덤인 회묘(懷墓)를 비롯하여 왕세자나 후궁들의 묘원이 있다. 어디 그뿐이던가. 왕실 자손의 태(胎)를 봉안한 장소로 전국의 명당에 산재해 있던 왕실 가족의 태실(胎室)까지도 한데 모아서 줄줄이 열병하듯 세워둔 입구의 안내도를 보며 경악했다. 멀리 신라 시대부터 유래했다는 장태문화(藏胎文化)를 휘저어 놓은 민족의 한(恨)이며 시대의 아픔에 가슴 한구석이 붉게 달구어지는 듯 울컥했다.
오늘 여기 온 뜻은 일제강점기에 서울 용산에서 이곳 고양으로 이장(移葬)해 모신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효창원(孝昌園)을 참배하는 데 있다. 식민지 조선을 관할하던 총독부의 고관대작들은 왕실 묘역을 파헤쳐서 위락 시설과 골프장까지 곁들인 공원을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신성한 왕실의 능원(陵園)을 무참하게 병참 기지로 전락시키고 왕세자의 효창원도 파묘(破墓)되어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온전히 이룩하려 했던 22대 정조대왕 그가 누구인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무참히 살해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수많은 정적 틈에서도 살아남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비록 궁녀였지만 어린 시절 오누이처럼 의지하고 사랑했던 여인 의빈(宜嬪) 성씨가 낳아준 첫아들이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웠을까. 그러나 금지옥엽(金枝玉葉) 왕세자는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홍역마마로 이승을 떠났으니 하늘의 뜻을 어이하리. 슬픔을 달래며 자주 찾아볼 수 있도록 대궐에서 가까운 애오개 너머 용산 자락에 눕힌 지 얼마 후 만삭의 의빈마저 의문사로 아들을 따라갔으니 그 애통함이 오죽했으랴.
어미의 유언대로 백 걸음 사이를 두고 묻힌 모자는 이백여 년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서로의 넋을 기리던 슬픈 이야기는 날마다 밤마다 눈물처럼 흘러서 냇물을 이루어 한강에 이르렀다 한다. 오늘날에도 효창공원 동문 아래 애기능 샘〔泉〕에는 가뭄을 잊은 듯 작은 샘물이 솟는다. 물은 흘러내려 작은 소(沼)가 되고 슬픔이 고인 웅덩이마다 오월이면 노란 창포가 피어나서 꽃대궐이 된다.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나면 이어서 하얀 찔레꽃 향기가 골짜기에 그윽하다. 부들이며 개구리밥, 노랑어리연꽃, 애기수련 등 어여쁜 수생식물이 가득한 작은 연못은 얼마나 유정한 풍경인지 슬프고 아름다운 옛이야기가 오늘도 문득 떠오른다.
문효세자의 효창원 가는 길은 제법 멀어서 뙤약볕 아래 한참을 더 걸었다. 입구의 안내도 앞에서 회원들에게 이미 설명했건만 무참하게도 이장을 당하게 되었던 까닭을 되뇌었다. 그 옛날 용산 효창원에는 번듯한 홍살문(紅箭門)도 세워져 있었을 테고 왕세자였던 어린 아들의 영령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해 묘원을 조성하지 않았겠는가. 숲길이 다한 곳에 동그마니 서 있는 정자각이 우리를 맞는다. 왼편으로는 신도비(神道碑)가 우뚝 서 있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아바마마인 정조가 슬픔을 참으며 친히 비문을 썼다는데 그 곡진한 사연을 어찌 다 알아볼 수 있으리. 봉분이 있는 언덕을 향해 한편으로 비스듬히 난 돌계단을 올라갔다. 어린 세자의 모습처럼 조촐한 봉분 앞에는 문인석(文人石)과 장명등(長明燈)까지 모양을 갖추어 세워 놓았지만 몇 발자국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게 막혀 있었다. 허리 굽혀 참배하며 절을 할 공간도 넉넉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능원은 그 역사와 전통이며 규모가 대단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건만 오늘의 이곳 효창원은 많은 부분에서 아쉽고 안타까워 돌아오는 길은 쓸쓸함과 비애가 뒤섞인 기분이다.
마침 내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개최된다고 한다. 의장국으로 대회 진행을 위한 임무와 역할도 크겠지만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뿐만 아니라 보존과 보호에 관한 제반 협약이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이미 등재된 문화유산이라도 역사적인 고증(考證)과 함께 올바르게 보호되고 우리의 오랜 문화유산이 지구촌 온 세상에 바로 잘 알려지기를 염원하며 기도한다.
‘문효세자의 넋이시여 도와주소서. 아버지 이산, 정조(正祖)의 꿈을 온전히 이루고 염천폭양(炎天曝陽)에 뒤주 속에서 운명하신 할아버지의 한을 달래주소서. 우리 민족의 한과 흥(興)이 어우러져 오천 년 내려온 민족의 중흥과 발전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몸은 고양에 묻히셨으나 넋은 용산에 계실 듯한 세자마마께 하직을 고한다. 가을 햇살 밝은 어느 날 다시 찾아뵙고 애타는 마음으로 아바마마 정조가 친히 써 내려간 호곡(號哭)의 비문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