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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전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메시지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수영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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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주변에서 노부모님이 하나둘 세상을 떠난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되었다. 아직 구순의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시지만, 이별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2월 초, 아버지께서 허리 통증으로 앉지도 못하시겠다며 누워 계셨다. 처음엔 일시적인 통증이라 여겼지만, 증상이 계속되어 결국 119 구급차를 불러 유명한 정형외과로 모셨다. MRI 결과를 확인한 의사는 놀란 얼굴로 즉시 내과 진료를 받아보라고 했다. 척추 통증이라면 정형외과일 줄로만 알았던 터라, 내과로 가라는 말이 낯설고 의아했다.
다음 날, 집 근처 종합병원에서 CT를 촬영한 결과 ‘급성 척추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담당 의사는 가능한 한 빨리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지만, 당시 의료계 파업으로 병상 부족이 심각해 연로한 환자를 받아 줄 병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진료받은 병원에서도 병실이 없다며 난색을 보였고, 간곡히 부탁한 끝에 겨우 저녁 무렵 입원할 수 있었다.
입원 후에도 고통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염증이 조금 나아질 무렵에는 폐렴과 장염이 번갈아 찾아왔고, 아버지는 점점 지쳐 가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매일 조용히 기도드리는 것뿐이었다.
“염증만이라도 다 낫게 해 주세요.”
그렇게 빌었다. 의사는 치료에 몇 달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지만, 두 달 만에 염증이 완전히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도 덕분이었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장기간 항생제 치료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음식도 잘 삼키지 못하셨다. 개인 간병인을 두었음에도 엉덩이에 손바닥만 한 욕창이 생겨, 결국 욕창 전문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했다. 의료진은 성실했고 치료도 전문적이었지만, 시설이 열악했고 공동 간병 체계는 충분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했다.
나는 매주 과일과 간식을 준비해 찾아갔지만, 아버지는 거의 드시지 못했다. 그저 욕창이 더 악화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어 더 쾌적하고 개인 간병이 가능한 병원을 찾기 위해 수소문했고, 마침내 경기도립 요양병원으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병원은 호텔처럼 깨끗했고 의료진도 친절했으며, 개인 간병이 가능해 아버지의 상태가 서서히 나아지는 듯 보였다.
그러던 5월 초, 부처님 오신 날을 며칠 앞둔 이른 아침,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족 모두 병원으로 오시라”는 말에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아버지께서 아침 미음을 몇 수저 드신 뒤 조용히 운명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날 언니와 남동생이 병문안을 다녀왔고, 나 또한 담당 간호사와 통화하며 “욕창도 다 나았고, 상태도 호전 중”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는 마치 잠든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로 누워 계셨다. 한 달 전만 해도 뼈만 남은 듯한 쇠약한 모습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는데, 마치 내가 매일 기도하던 대로 “아프지 말고, 주무시듯 편히 떠나게 해 달라”는 바람이 이루어진 듯했다. 욕창은 깨끗이 나았고, 얼굴은 예전처럼 온화하고 편안했다.
장례는 아버지께서 평소 다니시던 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기로 했다. 상조회사를 통해 모든 절차를 준비했고, 마침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이자 연휴의 시작이었던 덕분에 조문객들이 오기에도 수월한 데다 날씨마저 화창했다.
입관식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처음 마주했다. 생화로 장식된 꽃관 속 아버지는 고요하고 아름답게 누워 계셨고, 그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발인도 일요일이었고, 날씨는 여전히 맑았다. 아버지는 평소 당신이 지켜온 선산 가족묘에 조용히 봉안되었다.
장례를 마친 후 가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남동생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 2025년 5월 2일인데, 숫자를 모두 더하면 14야.”
그는 이어 장례식장 호실도 14호, 입관 시간도 14시였고, 화장터의 화로도 14호기였다고 말했다. 선산에 올라간 가족도 정확히 14명이었으며, 하산 후 식사를 마치고 출발한 시간도 14시였다고 했다.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된 ‘14’라는 숫자. 단순한 우연이라기엔 그 규칙성과 의미가 강하게 다가왔다.
문득 ‘14’라는 숫자에 담긴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불교에는 베트남 틱낫한 스님의 ‘14계율(Fourteen Mindfulness Trainings)’이 있다. 이 계율은 고통을 직면하고, 그 뿌리인 탐욕·분노·어리석음을 알아차리며,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보살의 서원을 담고 있다. 이는 곧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실천 지침이기도 하다.
생전에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이웃에게도 정성을 다하셨던 아버지. 풍수지리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불교적 삶의 자세를 중시했고, 이름 없는 사람의 묘소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간단한 제사라도 올리곤 하셨다. 그 삶 자체가 14계율의 실천이었는지도 모른다. 덕을 쌓으며 사신 아버지는 천수를 누리셨고, 고통 없이 평온히 세상을 떠나는 복을 받으신 듯하다.
운명하신 날짜, 요일, 날씨까지 자식들과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듯 조용히 떠나신 아버지. 반복된 ‘14’라는 숫자를 통해, 아버지는 “나는 고통 없이 편히 갔으니, 너희는 걱정 말고 마음 놓아도 된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 듯했다.
예로부터 “사람에게는 오복(五福)이 있고, 그중 하나는 잘 죽는 것”이라 했던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바로 그 복된 이별의 가장 아름다운 본보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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