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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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퇴고하는 과정에서 겹낫표를 써야 할 곳에 홑낫표로 잘못 표기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때 문득 문학작품에 문장부호가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삶의 문장부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하고, 인생은 퇴고의 연속이라고 하기도 한다.
지난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삶의 문장부호를 수없이 던지며 하루하루 전쟁을 치르듯 살아왔다. 다 늦은 나이에 글쓰기 공부를 하면서 정확하고 바른 문장을 구사하는 일 못지않게 문장부호를 정확히 사용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실감했다.
문장부호 중에서도 쉼표(,)와 마침표(.)는 그 모양새가 채송화 꽃씨처럼 작아서 얼핏 보면 서로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 작은 차이를 가볍게 생각하면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도 쉼표를 찍어야 할 때 마침표를 찍어 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게 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마침표를 찍고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경우가 있고, 쉼표를 찍고 누적된 피로를 풀고 더욱 힘차게 전진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지도 않고 이십 대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한창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나이에,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며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을 바꿀 수 없으니 내가 바뀌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을 떠났다. 낙후된 시골에서만 살다가 처음 본 도시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만 통할 뿐 외국이나 다름없는 낯선 곳에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야생이 되었다.
온갖 고생 끝에 겨우 자리가 잡히자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창을 열어 가고자 아이디어 상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땀과 지혜가 하나가 되어야 하기에 전문서적을 읽고 참고가 될 만한 내용은 따옴표로 가져오고, 인생 선배들의 성공 사례를 마음 깊이 새겼다.
오랜 준비 끝에 감동의 느낌표(!)를 불러오기 위해 낚싯바늘을 닮은 물음표(?)를 세상의 바다에 던졌다. 하지만 바닷물에 낚시를 던졌다고 누구나 고기를 잡을 수 없듯,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별한 재능도 경험도 없이 아이디어만 가지고 제품을 개발하려니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겼다. 개발하고자 하는 상품과 관련이 있는 전문가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지만, 진정성 있는 도움을 받은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아이디어를 도용당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처럼 내 꿈과 비전은 낚싯바늘 뒤에 숨어서 먹이만 빼앗아 가는 물고기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로 인해 무선전축과 핸드 가라오케, 요구르트 제조기(다용도 발효기)를 개발했지만 세 차례나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지난날 삶의 마침표를 찍으려고 했던 때를 생각하며, 고기가 잡히지 않아도 낚시를 바닷물에 계속 던지는 낚시꾼처럼 또다시 도전했다. 물러설 곳이 없으니 앞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창의력을 무기 삼아 금형 제작 비용도 안 되는 자금으로 경험과 신용을 밑천 삼아 삼 단계 바닥 냄비를 만들기로 했다. 이번에는 낚싯바늘처럼 끝이 뾰족하고 휘어진 물음표가 아니라 눈물방울 모양의 느낌표로 관련 업체를 찾아가 설득하고 도움을 청했다.
당시 우리나라가 IMF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던 때라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도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염치불구하고 금형 제작에서부터 포장용 박스 생산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거래했던 업체들을 찾아가 오랜 세월 쌓아온 신용을 담보로 사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들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평소 내가 너무 원칙만 따진다고 ‘장도칼’ 또는 ‘탱자나무 가시’라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적극 도와주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른 시일에 완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년 동안 45만 개의 제품이 팔렸다. 똑같이 내린 비에도 떨어지는 꽃이 있고 다시 피어나는 꽃이 있듯이,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불황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평생 갚지 못할 줄 알았던 그 많은 빚을 1년 만에 모두 다 갚고, 오랜 세월 그토록 소원이었던 상가 건물도 장만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신제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던 어느 날, 손윗동서와 친척 형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두 분 모두 한창 나이였고 평소에 존경했던 분들이라 충격이 매우 컸다. 그리고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왔던가 싶고, 인간의 삶이 참으로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무렵 나 역시 의사로부터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던 터라,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금까지 야심차게 추진해 왔던 만보기 신발을 개발하려던 계획을 모두 접었다.
이제 인생 황혼의 뜨락에 서서 글을 퇴고하듯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인생은 퇴고할 수가 없고 후회가 있을 뿐이다. 인생을 다 살아놓고 뒤돌아보며 후회하지 말고 중간 점검을 자주 해야 하는데 나는 앞만 보고 내달리기에 바빴다.
지금까지 지팡이를 닮은 물음표(?)가 내 삶의 힘이 되어 주었다. 이제 나도 새싹을 닮은 쉼표가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가을 나무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겨울 이불을 꿰매던 어머니의 돗바늘 모양의 느낌표(!)가 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문학작품에서 결미가 중요하듯 인생도 말년이 중요하므로 꽃씨를 닮은 마침표를 찍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