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11
0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김밥집에 등산객들이 줄을 서 있다. 일요일 아침이라 김밥을 사려는 사람들이다. 슬며시 뒤에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앞선 사람들이 많아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겠다. 바쁜 일이 아니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처지라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천등산은 높지 않은 산으로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긴 줄이 끝나고 앞에 서너 사람이 남았다.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년 여성 두 사람이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버스 시간이 급해서 그러는데, 앞에 서면 안 될까요.”
마침 앞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 뒤라 따라가려던 참이다. 지루하게 기다려서 짜증이 났지만 대답을 못 하고 서 있었다. 중년 여성은 내 앞에 서더니 돌아보며 웃었다. 고맙다는 뜻인지? 양보해 줄 줄 알았다는 뜻인지? 알쏭달쏭하다.
김밥을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조금 전 두 여성이 김밥을 물과 함께 배낭에 챙겨 넣으면서 귓속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자동차를 몰고 혼자 등산 가는 사람이면 좋겠다.”
“우리도 둘인데, 남자 둘이면 더 좋지!”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리며 김밥을 받았다.
“어디 가시는데요.”
“갈라산에요.”
“저는 천등산 가는데.”
김밥 가게를 나와 주차장에 가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그 여성들이 뒤따라왔다. 남자같이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이 조금 큰 소리로 어색하게 대답을 했다.
“진짜! 천등산 가요. 몇 사람인데요.”
파란 신호가 와서 몇 발짝 걸으며 따라오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시내버스 타고 갈라산에 가려는데, 자동차가 있으시면 우리와 같이 가시면 어떨까요.”
“저는 천등산에 가려고요. 갈라산은 지난주에 갔어요.”
그녀는 뒤따라오는 긴 머리 여자와 귓속말을 하더니 주차장까지 따라왔다.
“혼자시면 천등산에 같이 가요.”
같이 가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 듯했다. 세상일은 정말 모른다더니, 전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아내가 여고 동창생들과 크루즈(cruise) 여행을 떠나고, 혼자 등산 가는 것이 어찌 좀 허전했는데,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가 없어서 그러시는 모양인데, 같이 갑시다.”
내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꿰뚫은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시동을 거는데 짧은 머리가 조수석에 앉고 긴 머리는 뒷좌석에 앉았다. 얼굴과 행동, 옷차림과 말씨로 보아 40대는 된 듯했다. 자동차가 신호를 받느라 서다 가다를 반복하며 시내를 벗어났다. 복주여중을 지나 강변 도로에 진입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개골 앞을 달리는데 짧은 머리 여성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긴 머리 여성은 주로 대답을 하고 나는 운전에 열중하면서 귀는 두 여성에게 쏠려 있었다.
옥동 이마트를 지나 쭉 뻗은 4차선 도로를 달려 버스역과 기차역사가 보이는 곳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그녀들을 간혹 나에게 한두 마디 묻는 것 외에 두 사람이 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여자상업고등학교 동창으로 단짝이다. 안동에 살고 있으며 짧은 머리 이름은 선희이고 긴 머리는 남석이다. 성은 모르겠다. 선희의 남편은 우체국에 다니며 아들과 딸 남매가 있고, 남석이의 남편은 철도 기관사로 아들만 둘이다.
서의문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서후면 소재지로 가는 도로에 올랐다. 4차선에서 2차선 도로로 들어서자 차량 통행이 뜸하여 여유롭게 운전을 했다. 길게 이어진 실개천 위로 뻗은 철길을 곁눈질하며, 남쪽 산 밑에 다닥다닥 붙은 동네와 동네 앞에 펼쳐진 논과 밭도 훔쳐보았다. 간제 종택을 지나면서 조수석에 앉은 선희에게 말을 걸었다.
“갈라산에 가려다 천등산에 가게 되어 어쩌지요.”
“갈라산 가는 길에 아는 집 밤나무밭이 있어 밤을 주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안 간다고 했잖아요. 마음씨도 좋아 보이고 외로워 보여서 우리가 양보하기로 했어요.”
안동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성씨와 고등학교 졸업년도, 고향 등을 묻는다. 성씨는 집성촌이 많은 탓이고, 졸업년도는 나이와 동기들을 알기 위함이고, 고향은 어른들을 알기 위함이다. 두 여성과 나는 8년 정도 차이가 난다. 선희는 고향이 옹천 두산이고, 남석이는 풍산 만운으로 모두 안동 토박이다. 선희는 사교적이라 스스럼없이 묻는 대로 대답도 시원하게 했다.
선희에게 두문재를 아느냐고 했더니 호들갑을 떨며 수없이 넘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친정에 가면 넘는다고 덧붙였다. 월전도 신전도 석탑도 학가산도 옥산사도 잘 안다고 했다. 남석이는 만운지와 이개, 고속도로 밑 과수원과 신양, 신양지도 안다고 했다. 묻고 답하며 서로의 궁금증을 해소하다 보니 서후면 소재지를 지나 봉정사로 들어가는 길과 저전으로 가는 갈림길에 다다랐다. 선희의 친정 가는 길에 있는 두문재를 넘어 학가산과 신전을 드나들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옥산사는 몇 번 가봤어요.”
“어릴 때 엄마하고 몇 번, 친구와도 갔는데, 잘 아세요?”
“알다뿐입니까? 아름다운 추억까지 있지요. 주지의 딸 이름이 선희인 것도 아시겠네요.”
선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공부를 하려고 찾은 곳이 옥산사이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주지 스님과 연락이 닿아 절에서 머물기로 한 것이다. 옥산사 가는 길은 북후중학교에서 가파른 산길을 등산하듯이 무거운 배낭(등산가방)을 메고 올라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학교 앞 마을에서 올라가는 좋은 길도 있었다. 과수원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다가 숨을 몰아쉬며 잠시 돌아앉아 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학교와 농협 건물의 지붕이 보이고 옹천 장터가 멀리서 보였다. 봄이 시작될 무렵이라 참꽃이 피려고 가지 끝에 작은 꽃망울을 달기 시작했다. 메뚜기 이마 같은 산길을 오르자 길게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오더니 갈림길이다. 북쪽 방향은 두문재로 가는 길이다.
주지 스님과 통화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방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이미 쓰고 있다고 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출발할 때는 추워서 목수건까지 둘렀으나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니 윗옷을 벗어도 등에서 땀이 났다.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의 펀펀한 들판 같은 땅이 있어 시야가 탁 트였다. 농지로 따지면 쉰 마지기는 충분히 될 듯했다. 여기다가 절을 지으면 아주 큰 절이 될 것이다. 큰 나무 군락지에서 숨을 돌리는데 지형이 계단식 밭 모양이다. 살펴보니 밭둑 모양의 땅에 큰 나무가 여기저기 자랐다. 아주 오래전에 화전을 한 밭이 아니었을까? 오솔길을 돌아나오자 갑자기 눈앞에 우마차가 다닐 만한 도로가 나왔다. 아마 마을에서 올라오는 도로인 듯했다. 좋은 길을 두고 가파른 등산로로 왔으니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건너 조금 올라가니 옥산사 지붕이 보이고 저 멀리 약사여래좌상이 새겨진 큰 바위가 보였다.
일자 모양의 요사채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 가정집 같은 분위기이다. 마당에서 기침을 몇 번 해도 대답이 없다. 지고 온 배낭을 처마 밑에 내려놓고 산 위를 쳐다보았다. 서북쪽에 큰 바위가 지붕처럼 언덕에 기대어 있는데 바위 속에는 방 같은 공간이 있고 촛불을 켠 흔적이 보였다. 기도를 올리는 장소일 것이다. 밭둑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언덕 위 어설픈 돌계단 위에 약사여래부처가 약사발을 들고 바위에 붙어 서 있었다. 허리를 굽혀 삼배(三拜)를 하고 돌아서서 언덕을 내려다보니 조금 전에 본 바위 지붕 앞에 사람이 서 있다. 전화로 통화를 한 주지 스님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크지 않은 절이니 스님은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방에 배낭을 들여놓고 스님 방에 들어갔다.
“오시느라 고생했네. 여러 가지로 불편할 텐데.”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공부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조용해서 공부하는 데는 좋을 것이네. 약사여래불 옆으로 더 올라가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남씨의 제사와 연못이 나오고 조상들의 산소가 있다네. 나중에 심심하거든 올라가 보게. 운동도 될 것이니.”
스님의 딸 선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데 봉정사 입구 매표소가 보이고 주차장이 보였다. 주차장 옆에는 식당이 있고 식당 뒤에도 앞에도 주차장이 있었는데 식당 뒤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봉정사에 들어가는 매표를 구매하지 않고 논길을 따라가는 등산로가 주차장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건너다보며 논둑을 지나서 산으로 올라갔다. 선희와 남석은 묵묵히 내 뒤를 따랐는데, 계곡에 있는 찻집의 지붕이 보일 때까지 걸었다.
가을을 준비하는 떡갈나무와 잡목이 발걸음을 말리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산 위로 올라갔다. 큰 바위가 조금 전에 본 찻집과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곳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쉴 만한 곳을 살펴보니 펀펀한 곳에 묵은 묘가 잔디를 잘 키워 놓아서 지팡이를 꽂아 윗옷을 걸고 앉았다. 가방을 열어 사과즙을 꺼냈다. 선희는 옥산사의 선희가 궁금했는지 사과즙 봉지를 든 채 고개를 반쯤 들어 쳐다보았다.
“옥산사 선희는 몇 살인데요.”
“30년 전 일이니 쉰 가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머, 우리와 비슷하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민망했던지 하던 말이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선희는 열여덟이고 저는 스물여섯이었지요.”
주지 스님과 이야기하고 절을 둘러보려고 마당으로 나서는데 큰 방문이 열리더니 단발머리 소녀가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약사여래가 있는 언덕을 오르면서 눈은 부엌을 향했다. 부엌에 들어간 소녀는 여러 번 내려다보아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어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디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큰방으로 오시랍니다.”
큰방에는 밥상이 두 개 놓여 있고 방바닥에도 밥그릇과 반찬이 있었다. 스님과 내가 각자 밥상 앞에 앉자 소녀도 물그릇을 방바닥에 놓더니 밥그릇 앞에 앉았다. 촛불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산들바람에 흔들렸다. 숟가락을 들던 스님이 말했다.
“학생 옆방 사람은 집에 볼일이 있어 어제 가고, 보살은 며느리가 아이를 낳아서 산후바라지 가고, 대신에 선희가 며칠 전에 와서 밥을 하니 반찬이 없네!”
묵묵히 밥을 먹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나물이 씹혔다. 씹지도 뱉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는데, 스님이 눈치를 챈 듯했다.
“양하는 처음 먹겠지! 절에서는 자주 먹는 채소라네! 생강 맛이 조금 나지만 먹다가 보면 절간 사람이 된다네.”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는 선희를 촛불 사이로 훔쳐보느라 스님의 말은 귓전으로 들렸다. 긴 치마를 입어선지 무척 성숙해 보였지만 단발머리는 소녀 티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식사가 끝나자 물그릇을 밥상 위로 올려주는 선희의 손가락이 무척 가늘어 보였다.
지팡이에 걸어둔 윗옷을 벗겨 팔에 끼는데 뒤에 서 있던 남석이가 옷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보기에는 무뚝뚝해도 행동은 무척 귀여웠다. 선희는 그것도 질투라고 남석이의 등을 가볍게 쳤다.
“내 애인을 니가 가로채면 어쩌노?”
“머리채 뜯고 싸워야지요.”
웃자고 한 말인데 남석이의 볼이 빨개졌다. 큰 도토리나무 아래를 지날 때는 굵은 굴밤 한두 개가 파여진 길옆에 숨었다. 몇 개를 주워서 남석이에게 주고 또 몇 개를 주워 선희에게 주었다.
“갈라산에 갔으면 지금쯤 밤을 줍고 있을 텐데.”
앞장을 선 선희의 잔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산허리는 등산객들이 쉬다가 간 흔적으로 과일 껍질이 여기저기 보였다. 흙이 두둑하게 모였거나 풀이 누워 있거나 갈비가 모여 있는 것도 등산객들의 흔적이다. 소나무 사이로 정상을 쳐다보니 구름 위에 있는 듯했다. 천등산은 완전히 일주를 하려면 주차장에서 동쪽으로 20분 정도 올라가면 높은 산꼭대기가 나온다. 그 꼭대기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10분 정도 걸다 보면 지금 우리가 쉬는 산중턱이 나온다. 우리는 질러가는 코스를 택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산등성이지만 오르막이니 계속 올라가야 한다. 발목 높이의 파여진 구덩이는 비가 길을 따라 흘렀기 때문이다. 발목을 다칠까 조심조심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다. 길옆으로 삽주와 고사리 진달래가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 멀리 큰 소나무가 보이고 벤치에 몇 사람이 앉아 땀을 식히고 있었다. 여기저기 앉을 자리를 살피다가 마침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 학가산이 보이는 서쪽 방향의 벤치에 앉아 쉬었다. 물통과 삶은 달걀을 내놓으니 남석이는 커피를 잔에 부었다. 선희는 플라스틱 통을 꺼내더니 떡을 내놓았다. 푸짐한 간식을 먹으며 한마디씩 했다. 같이 오기를 잘했다며, 만나기를 잘했다며, 이런 인연도 없을 것이라며 한바탕 웃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뒷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우리처럼 앉을 자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수 년 전 추석 무렵 친구들과 이 천등산에 올라왔었다. 오늘처럼 의자가 없어서 진달래와 잡목 사이에 앉아서 간식을 먹었다. 물을 먹다가 컵에 남은 물을 버렸는데 풀이 불룩하여 헤쳐 보니 송이 냄새가 났다. 굵은 송이 옆으로 작은 송이도 줄을 지어 몇 개 있었다. 같이 온 사람들은 너도나도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를 헤쳐 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없었다. 송이 주인이 보면 도둑으로 몰리기 십상이니 어떻게 할까가 고민이었다. 먹고 없애자는 사람, 숨겨서 가지고 가서 식당에서 먹자는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먹자는 사람은 씻어서 먹자며 온수 물병을 내놓았다. 옆사람이 무릎을 딱 쳤다. 보온병에 물을 쏟아 버리고 숨기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송이 네 뿌리는 보온병에 무사히 숨겨서 내려왔지만, 등산 계획은 송이 때문에 허겁지겁 내려오느라 엉망이 되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과 우화루 뒤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이왕 왔으니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이 시간 여유도 있으니 좋겠다고 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밑에서 쳐다보면 무척 가파르게 보이나 올라가 보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정상은 묘가 있던 자리가 여기저기 파여 있고 큰 묘도 있었다. 부귀영화를 자손만대까지 누리려고 명당을 찾아 올라왔을 사람들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묘가 있다가 없어졌다가 또 여기저기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명당은 아닌 듯도 하고 명당인 듯도 했다. 북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옥산사에서 공부를 하던 어느 날이다. 남씨 제사로 가지 않고 옥산사 뒤 산등성이를 타고 서쪽으로 올라갔었다. 산은 점점 가팔라지고 오던 길로 내려가기에는 너무 많이 올라와서 계속 올라가기로 했다. 여기저기 길이 없어지다 이어지는데, 사람이 다닌 길인지 짐승이 다닌 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무섭다는 생각보다 정상까지 가보자는 생각뿐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른함을 이기고자 올라온 길이니 산이 끝나는 데까지 오르고 올랐다. 그리고 만난 것이 천등산 정상, 바로 지금 이곳의 서북쪽 바위 옆이었다. 넓은 바위에 앉아 땀을 식혔는데, 그 바위가 저 아래 얌전하게 30년이 지나도록 지키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지 않아 김밥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간식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땀이 마르자 하산을 하기로 했다.
천등굴로 가는 가파른 길은 여자들이라 어려울 것 같아 동쪽 길을 택했다. 고불고불 깊게 패인 길 때문에 나무를 붙잡기도 하고, 사람을 잡기도 하고, 지팡이를 잡기도 하면서 내려왔다. 내리막은 천천히 가는 것이 더 어렵다. 가파른 길은 조잘거리던 선희의 입까지 다물게 했다. 남석이는 손을 잡을 때는 가까이 왔다가 사람들이 올라오면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누가 보고 남편 아닌 남자와 손을 잡고 등산을 하더라는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느냐고 걱정이 늘어졌다. 선희는 남편이 이해하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며 스스럼이 없다. 남편도 초등학교 여자 동창들과 등산을 자주 간다며 자랑까지 했다.
태풍에 넘어진 고목이 길을 막은 지 오래되었다. 길을 막고 있는 나무는 작은 가지만 잘라 겨우 길을 트고 넘어진 그대로 몇 년째 썩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내려가자 개목사 지붕이 보이고 저 멀리 정상을 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우화루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들은 개목사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우리를 건너다 볼 것이다.
개목사 뒤에서 앞으로 내려와 마을로 통하는 큰길을 따라 절간 앞에 다다랐다. 바람이 부는 날씨라 앉아서 점심 먹을 장소를 찾던 중 절 안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이상한 기계음이 들렸다. 나무 위를 살펴보고 지붕을 쳐다보던 중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개목사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맞은편이 대웅전이고 대문에 붙어 있는 것이 요사채다. 승방 앞에서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스님! 스님, 계십니까?”
한참 후 옆방 문이 열리면서 보살이 얼굴을 내밀었다.
“앰프를 끄지 않아 삐 하는 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잠시 후 대답을 하지 않던 방에서 스님이 급하게 나오더니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앰프를 껐는지 기계음이 들리지 않았다. 스님은 부처님 앞에 놓인 무엇인가 정리를 하더니 대웅전을 나오며 우리들을 보고 합장을 했다.
“고맙습니다. 아침에 기도를 하고 앰프를 끄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합장을 하며 승방으로 들어가는 스님은 무척 편안한 얼굴인데 나이가 많아 보였다.
요사채 대문 서쪽은 승방이고 동쪽은 마루와 창고이다. 마루는 사람들이 쓰지 않았는지 쓰레기와 먼지가 가득 쌓였다. 손으로 대충 치우고 배낭을 열어 김밥을 꺼내었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시장기가 돌았으나 물병에 물이 없어 우물가로 갔다. 간이 상수도인지 수도꼭지가 있었다. 절이면 우물에 두레박이 제격이지만 푹 파인 돌그릇과 돌그릇 사이로 흐르는 석간수도 좋은 풍경이다. 아쉬운 대로 수도꼭지를 틀어 물병에 물을 받았다.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던 보살이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는지 바가지를 들고 수돗가로 왔다.
“보살님! 스님께서 아주 오래전 옥산사에 계셨던 안주지 스님이 맞지요?”
“옥산사는 모르겠는데, 안주지는 맞아요.”
앰프를 끄며 돌아서는 스님의 얼굴이 어디서 뵌 분이라 싶어 알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안주지가 아닐지도 모르나 실로 30년 만에 뵙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을 뵙고 싶은데요.”
“몸이 불편하여 누워 계십니다. 조금 전에는 어떻게 나오셨는지, 며칠째 곡기도 못 넘기셨는데.”
스님 방문을 열어보고 싶었으나 김밥을 펴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여 그냥 두었다. 김밥을 먹으면서도 생각은 안주지뿐이었다. 부처님께 예도 드리지 못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람이 불어서 허겁지겁 출입문을 나섰다. 대문 밖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은행을 조롱조롱 매달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서쪽 삼밭은 도라지를 심었는데 지금은 잡초가 우거졌다. 스님이 나이가 많아 농사를 짓지 못하는 듯했다. 남쪽은 습지로 옛날에는 연못이 있었던 모양이다. 논을 만들어도 충분하고 연꽃을 키워도 기름진 땅인데 물풀이 우거져 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과 우화루로 내려가는 길이 다시 만나는 곳이다. 뒤를 돌아보니 개목사는 침묵을 지키며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달래와 철쭉이 꽃은 어디 가고 가지만 무성하게 자라 길을 넘보고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쓰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다. 울룩불룩한 내리막 오솔길을 따라 걷는 동안 선희는 아예 내 팔을 잡고 매달렸다. 남석이의 친정인 풍산 만운과 만운지 주변 동네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나 저만치 앞서서 걸어가니 다음으로 미루었다. 봉정사 대웅전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과 일주문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솔잎이 떨어져 수북이 쌓인 소나무 밑에서 쉬기로 했다. 선희는 친한 척 내 옆에 앉아 사탕을 꺼내어 종이를 벗겨 주면서 ‘개목사 스님이 어딘가 많이 본 듯하다’고 했다.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옛날 옥산사 안주지 스님이라는 확신이 섰어요. 목소리까지 같아요. 승방 문을 열려는데 보살이 아파서 누워 있다며 못 열게 하여 다음에 뵙자며 돌아섰어요. 지금 올라갈 수도 없고 다음에 꼭 뵙고 싶습니다.”
선희는 아이들처럼 손뼉을 쳤다.
“맞아요. 옥산사 아래 동네에 친구가 살아요. 그 친구와 함께 옥산사에 올라간 적도 있어요. 어디서 뵌 분이라 했는데, 이제 궁금증이 풀렸어요.”
안주지 스님은 나를 무척 좋아했다. 어쩌면 사위를 삼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새벽에 일어나 법당에서 기도를 하고 요사채까지 돌 때도 꼭 함께하자고 했다. 잠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 예불에도 함께하자고 했지만 산에 나무를 할 때는 혼자 갔었다. 식사 때는 꼭 겸상을 하도록 선희에게 시켰다. 보살이 며느리 산후 바라지가 끝나고 절에 돌아와도 선희는 보내지 않았다. 선희가 남씨 제사까지 산나물을 하려고 가면 같이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보살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따라나서다가 스님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봉정사 지붕이 보일 듯 말 듯한 길은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망을 쳐 놓았다. 등산객들이 입장권도 사지 않고 주차장 앞 논둑으로 천등산을 올라와서 내려갈 때는 오래된 건물과 대웅전을 보려고 하니 막은 듯하다. 막아 놓은 철망이 어설퍼서 조금만 돌아가면 갈 수 있어서 토끼길이 반질반질하게 트여 있다. 오지 말라는 길을 표도 사지 않고 억지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멀리서 절을 보며 산등성이를 타고 30분 정도 내려가면 일주문이 나온다. 사실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길로 가면 10분 정도 걸려 봉정사에 도착할 수 있다. 대웅전에서 일주문은 큰 은행나무 언덕을 돌아가더라도 5분이면 갈 수 있다. 등산객들이 막아 놓은 길을 무시하려는 것도 질러서 가려는 것이다.
안주지는 절 아래 마을에 종종 갔다. 같이 놀 만한 친구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했다. 별일이 없으면 아침을 먹고 터벅터벅 산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간다. 주지 스님이 없으면 큰방은 선희가 뜨개질이나 바느질을 하고 나는 내 방에서 책을 읽거나 누워 있다. 가끔은 약사여래부처님께 올라가서 절을 하기도 하고 남씨 제사까지 가기도 하지만 선희는 혼자 가는 나를 좀처럼 따라나서지 않았다.
약사여래부처님께 합장을 하고 남씨 제사로 가려고 굽은 길을 돌아서 나오는데 바로 앞에 선희가 바구니를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혼자 산나물 하러 가요?”
선희는 돌아보지도 않고 유쾌하게 대답을 했다.
“왜요? 같이 가시게요? 공부는 어쩌고…, 하기야 공부하시는 분이 산에 놀러만 다니던데 뭐!”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자존심을 건드려 놓아서 기분이 나빴다. 하기사 선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공부가 되지 않아 아침부터 산을 오르기도 하고, 절 아래 마을에 가서 간식과 스님이 좋아하는 막걸리도 사서 들고 오기도 한다.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알고, 관심이 아주 많은가? 나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긴 치마로 풀잎을 쓰다듬으며 산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선희를 앞지르려고 빠른 걸음을 따라가자 그녀는 고사리를 꺾느라 옆길로 갔다.
“산나물 좀 가르쳐 주세요. 지금 꺾는 고사리는 알지만….”
입가에 미소를 가득 담더니 취나물을 뜯어서 잎을 앞뒤로 살피며 설명을 했다.
“비슷한 풀도 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큰일나요.”
나물취를 보면, 산치 싹을 보면, 도라지를 보면, 잔대를 보면, 뜯어서 바구니에 넣기 전에 설명을 했다. 선희의 설명보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는 재미로 열심히 듣는 척했다.
산나물을 배워서 한두 잎을 뜯는 동안 선희는 바구니를 채웠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아카시아잎 뜯기 게임으로 손목 때리기를 했다. 몇 번째 져서 손목을 맞다가 모처럼 이겼다. 가느다란 손목을 때리려고 잡으려는데 나물바구니도 버려둔 채 숲속으로 도망을 갔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앞뒤 가리지 않고 따라갔다. 싸리나무 사이로 뛰어가던 선희는 신이 걸려 벗겨지면서 넘어졌다. 바짝 따라가던 나도 함께 넘어졌다. 선희의 왼쪽 팔을 잡으려다 넘어졌으니 서로 껴안는 꼴이 되었다. 선희는 하늘을 보고 나는 선희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 넘어진 것이다. 급하게 일어나려던 선희는 내 가슴에 눌려 발만 버둥거렸다. 잠시 후 일어나서 옷을 털며 매무새를 고치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봉정사 지붕을 보고 걷기를 30분 정도, 일주문 지붕이 보였다. 일주문 앞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국화밭에서 국화잎을 뜯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남석이는 한 가지를 꺾더니 몇 개를 더 꺾었다. 아마 집에 가지고 갈 모양이다.
“꺾으면 안 돼요. 국화차를 만들려고 심어 놓은 거예요. 여기저기 빈자리에 밭이랑이 보이잖아요.”
“어머! 그래요? 국화차, 몇 번 먹어 봤어요. 꽃이 작아서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꽃인 줄은 몰랐어요.”
가을이 깊어지면 국화꽃도 피겠지만 아직은 작은 꽃망울이라 크기를 모르겠다. 일주문 앞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 매표소에서 자동차를 통제하느라 쇠줄을 쳐 놓았기 때문이다. 스님이나 특별한 관광객들은 통과시키겠지만 보통 사람의 자동차는 올라올 수 없는 모양이다. 잡초가 우거진 빈터에는 몇 아름이 될지 모르는 큰 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 아마 봉정사와 함께 태어나서 살고 있을 나무들을 쳐다보며 세월의 무한함을 생각했다. 30년도 더 전에 만났던 옥산사 안주지 스님을 만났지만 인사도 못 드리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무딘 세월은 좋은 인연도 지워지다가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다음 주에는 꼭 개목사에 가서 안주지 스님을 뵐 것이다. 그 세월의 이야기도 들을 것이고 또 할 것이다.
길옆 소나무 가지 사이로 명옥대의 바위와 정자가 보였다. 언제 들어도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맑은 물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그냥 가기로 했다.
매표소를 지나 선희와 남석을 기다리게 하고 자동차를 세워둔 식당 뒤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천등산은 서쪽으로 출발하여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개목사로 내려와서 봉정사 우화루로 가는 길과, 돌아서 많은 시간이 걸려 산등성이를 타면 국화밭을 지나 일주문 앞에 닿는다. 동쪽으로 올라가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간혹 있기는 있다. 산을 올라갈 때는 언제 돌아서 내려오나 했는데 벌써 내려온 것이 신기해서 산꼭대기를 쳐다보았다. 정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기 어디쯤이라고 생각하니 저 먼 곳을 어떻게 갔을까? 내가 걸어온 길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선희와 남석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지만 변변한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했다. 단지 선희의 이메일을 기억할 뿐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기억하려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이다. 그녀들도 내 자동차 번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기억하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다. 단지 선희는 자동차 네비게이션 옆에 연락처라며 자동차 검사장에서 준 전화번호 저장 고무판을 관심이 있다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헤어지면서 약속을 했었다. 다음 주에도 김밥가게에서 만나기로, 그리고 천등산에 오르기로, 개목사에 가서 안주지 스님을 만나기로,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아내가 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기 때문이다. 발목 인대를 다쳐 수술을 했다. 움직일 수 없으니 병원을 들락거리며 심부름도 하고 식사도 해결해야 하니 등산은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선희와 남석이는 김밥가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삐졌는지 아니면 연락처를 모르는지 소식이 없다.
천등산을 다녀온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밤늦도록 인터넷을 하다가 선희의 이메일이 기억나서 간단한 메모를 보냈다.
“잘 계시지요. 아내가 입원해서 연락을 못 드렸어요. 전화번호도 모르고요.”
다음 날 이메일을 열어보니 신기하게도 답이 와 있었다. 거기에는 내 전화번호도 기억하고 있다는 자랑까지 올라와 있었다.
“사모님이 입원한 것도 모르고 우리는 오해를 했어요. 김밥가게에 갔다가 실망만 하고요. 이제는 전화로 연락할 수 있도록 번호를 두고 갑니다.”
아내는 퇴원을 해도 목발 없이는 걸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개목사 안주지 스님 뵙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서 선희에게 낮 시간을 이용하여 전화를 했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통화를 하는데, 꼭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불륜을 저지르는 심정이 되어 가슴까지 뛰었다. 어렵게 선희와 천등산에 오르기로 약속을 하고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아내도 안주지 스님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밥가게 앞에는 선희와 선희 남편이 김밥을 사서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온 것이다. 김밥을 선희 내외가 샀으니 음료수라도 살 겸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운동 때 마시는 음료수 5병, 연양갱 5개, 과자 5봉지, 사탕 1봉지 그리고 막걸리도 1병 샀다. 개목사에 가서 안주지 스님을 뵙고, 만약에 아니더라도 주고 싶어서 넉넉하게 산 것이다.
주차장에서 실랑이가 있었다. 내 자동차로 가자고, 이번에는 선희 남편 자동차로 가자고, 다음에는 선희네 남석이네 우리 세 가족이 같이 가자는 결론을 내리고 선희 남편 자동차를 타기로 했다. 한 달여 전에 천등산 등산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안다며, 따져보니 고등학교 선배님이신데, 나이 많으신 분의 신세를 져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남석이네도 다음에는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고 한다. 아직은 세 가족이 만나 봐야 알 일이지만 어쩌면 등산계라도 만들 기세였다. 하기사 나이 차이가 있으니 불순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달도 더 지나서 개목사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다. 개목사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선희 남편이 등산화를 오랜만에 신어서 발에 탈이 났다. 절룩거리며 정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우화루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정상에서 내려온다면 개목사 뒤로 와야 하는데, 개목사를 건너다보는 길로 내려온 것이다. 그렇다고 개목사에 안주지를 뵙지 않을 수 없어 선희 남편은 소나무 밑에서 쉬게 하였다.
개목사에서 봉정사로 내려오던 길을 되짚어 가니 삼을 가꾸던 도라지밭이 왼쪽이 되고 습지인 연못 자리가 오른쪽이 되었다. 큰 은행나무는 단풍이 들었다가 떨어져서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셋이서 점심을 먹던 마루는 가을걷이를 하였는지 크고 작은 자루와 농기구, 빗자루가 흩어져 있었다. 그때는 앰프의 기계음이 인연이 되었으나 이제는 기계음도 들리지 않고 적막하게 풍경 소리만 간혹 났다. 요사채 승방에도 사람의 기척이 없다. 보살이 드나들던 방 앞에서 기침을 했다. 잠시 후 얼굴이 익은 보살이 문을 열었다.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에 앰프 때문에 들어왔던 사람인데, 스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보살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서운한 낯빛으로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돌아가셨어요. 버섯을 잘못 드셔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가셨다니, 그러나 확인은 하고 싶었다.
“옥산사는 모르지만 안주지는 맞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스님 아드님이 서후 면소재지에 살았는데…, 따님도 선희라고 있었는데 아시는지요?”
“맞아요. 아들은 지금 택시 운전을 하고 딸은 선희라고 서울에서 살아요.”
분명 옥산사의 안주지 스님이 맞다. 선희도 맞다며 낭패를 당한 사람처럼 표정을 지었다. 성은 물론 따님 이름도, 아들이 사는 곳도, 분명 맞는데 한 발이 늦은 것이다. 그때 확인을 하고 인사를 못 드린 것이 땅을 치고 싶도록 후회가 되었다.
버섯을 잘못 드셨다니 산생활을 그렇게 하시면서 독버섯을 몰랐다는 말인가? 지병이 있었는데 우연히 버섯을 드셨겠지!
한 번 만나는 것이 스님과 인연의 끝이라면 너무 야속한 일이다. 두 번을 허락하지 않는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야 할 인연은 아닌 듯싶어 세상사가 허무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생사라고 했는데, 안주지 스님과 인연은 거기까지인 듯했다. 그날 처음으로 만난 선희와 남석으로 인연이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서후에 산다는 아들도 기회가 되면 만나고 싶다. 더구나 서울에 산다는 선희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인연이 닿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