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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않는 새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성희(이란)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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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을 받은 베이커리의 쇼케이스는 현란하다. 빨간 딸기로 장식된 하얀색 생크림 케이크, 달콤한 초콜릿을 잔뜩 한 입 베어 문 듯한 초콜릿 케이크, 커피 향이 은은한 모카 케이크, 푸른 빛깔의 말차 케이크, 그리고 한없이 부드러울 것만 같은 바스크 치즈 케이크까지. 소미는 입으로 가져가기 전에 먼저 눈으로 맛을 음미한다. 심호흡을 고른 뒤 쟁반에 유산지를 깔고 빵을 고른다. 소금빵과 베이글이 종류별로 놓여 있다. 모카 소금빵과 대파 크림치즈 베이글을 고른다. 선드라이 치아바타와 밤 패스트리도 하나 담는다. 무화과 크림치즈 깜빠뉴도 잊지 않고 챙긴다. 치즈 타르트를 고르고, 체리 몽블랑을 담은 뒤, 쟁반을 계산대 앞에 내민 후 바스크 치즈 케이크를 홀 케이크로 주문하고, 아이스 라떼를 추가 주문한다. 109,800원입니다. 계산을 마치고, SUV에 몸을 싣는다.
“참 특이해. 코디 시키면 될 일을 직접 와야 하니?”
운전을 하는 준하의 말을 무시한 채 검은색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벗고, 선드라이 치아바타를 한 입 베어 문다. 토마토의 상큼함과 바질 페스토 특유의 향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차가운 라떼를 한 모금 마신다.
“누가 보면 내가 너를 며칠 굶긴 줄 알겠다. 안 뺏어 먹어. 그러니 천천히 먹어.”
그 와중에도 준하는 소미의 신곡을 튼다. 그는 말이 많다. 하지만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결국 소미의 말을 따른다. 오늘 일정을 비우겠다는 소미의 요구에도 매니저는 별다른 말 없이 스케줄을 변경했다. 가수가 컨디션 조절을 못 하면 결국 리스크가 된다는 것을 준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큰 무리가 없다면 소미가 하고 싶거나 하기 싫다는 요구를 거부한 적이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 소미의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되어야 했다. 바스크 홀 케이크를 포함한 저 모든 빵이 오늘 중에 소미가 먹을 음식이라는 사실도 그중 하나였다.
창밖으로 한강이 흘렀다. 붉은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이 꿈결 같았다. 우유를 머금은 라떼는 커피의 쓴맛과 잘 어울렸다. 차가운 물빛과 따스한 하늘빛이 뒤섞인 풍경을 바라보며 소미는 지금 마시는 라떼를 떠올렸다. 베어 문 차가운 얼음 조각이 혀끝에 닿았다. 소미는 그것을 적당히 녹이다 아그작 깨물었다. 매니저는 소미를 굶기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소미는 자신이 매일 굶다시피 먹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베이커리 쇼케이스의 케이크처럼 소미는 보여지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미지는 소속사와 매니저의 관리하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적당한 일탈이 아닌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았다. 허용 가능한 적당한 일탈의 선 위에서 소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먹더라도 살은 찌면 안 된다’, 이 모순적인 원칙을 깨부수기라도 하려는 듯 소미는 베치아바타에 이어서 대파 크림치즈 베이글을 먹고 있었다.
배가 부른 것과 맛있는 것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배가 불러도 더 먹을 수 있는 이유이다. 소미는 자신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바스크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커튼을 젖히자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스프레소를 내려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소미는 자신이 카페인 중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먹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섭취한 모든 음식들을 결국 화장실 변기에 쏟아낼 것이지만 소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것과 현재의 체중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이 작은 행복이 부서지기 전에 움켜잡아야 한다. 소미는 다시 음식에 집중한다. 그리고 다시 브라운관에 비친 자신에게 집중한다.
‘나는 지금 정상인가?’
소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매우 이중적이다. ‘정상’은 비정상의 반의어일 수 있지만 동시에 ‘바닥’의 반의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미는 정상에 있기 위해 정상적인 것을 포기했다. 후회한 적은 없다. 그녀에게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변기에서 구토를 시작한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만큼 먹은 상태로 모든 것을 변기에 쏟아낸다. 예쁘고 아름답던 음식들이 위산과 뒤섞인 음식물의 조각으로 쏟아진다. 위를 비우지 않으면 다음 날 CF 촬영을 감당할 수 없다. 팬들 앞에서 부은 얼굴을 보이는 것은 프로가 아니다.
“요즘 가수는 노래만 부르지 않아. 너의 모든 것이 상품이야.”
준하는 닭가슴살 2∼3조각을 곁들인 드레싱 없는 샐러드를 건넬 때마다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매일의 일상이 사진사에게 찍히고 팬들에게 찍힌다. 어쩌면 그녀의 노래보다 더 먼저 보이는 것은 그녀의 이미지일 것이다.
“여자 가수의 수명은 길지 않아. 그 수명 다할 때쯤 연기자로 전향할 수도 있지. 그러니 어떻게 노래만 신경 쓸 수 있겠어? 요즘 연기자가 연기만 하니? 안 되는 인물로 운 좋게 조연은 될 수 있겠지만.”
저녁 대신에 마실 ABC 주스 한 잔을 내밀며 준하가 말을 이었다. 그는 무언가 미안해할 때마다 말을 길게 했다. 소미는 변기에 주저앉아 휴지로 입을 닦으며 그런 준하를 떠올렸다.
토하고 나면 속이 메스껍고 뒤틀린 듯했다. 온몸은 공기가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십여 분 정도 후에 소미는 세면대를 붙잡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지금 이 모습이 내일도 유지되어야 했다. 얼마 전에 본 뮤직비디오 속 모습이 새롭게 거듭나야 했다. 사람들은 싫증이 빠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뒤처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더욱 없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고, 팔릴 때 팔아야 하는 거야.”
하루 4시간 수면 후 새벽까지 촬영을 몰아붙일 때면 준하는 소미에게 에너지 드링크를 건네며 말했다. 상품 가치란 감가상각된다. 그렇게 열심히 팔아치운 덕분에 한남동에 한강이 바라보이는 집에 살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하녀가 아닌 공주를 우러러본다. 아이돌은 만인의 연인이며 우상이 되어야 한다. 소미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욕조 가득 아로마 향이 번졌다.
‘가난은 지옥이야.’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따스한 물에 몸을 담갔다.
잠실 주경기장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 그 사람들과 호흡하며 한몸이 된다. 소미는 가녀린 몸으로 커다란 무대를 종횡무진한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사람들이 환호한다. 가수로서 가수답게 설 수 있는 것이 콘서트이고 무대이다. 모든 가수가 서고 싶어하는 커다란 무대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선다는 것은 행운이고 축복이다. 소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의 리허설도 지치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므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그런 날이다. 이런 특별한 날에 그들은 소미를 만나기 위해 잠실로 향했다.
“보통의 여자는 한 남자의 사랑을 받지만, 가수는 여러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준하가 소속사의 활동 동안 남자친구를 만들 수 없다는 규정을 언급하며 말했다. 계약서 상에 ‘가수로서의 품위 유지’라고 다소 모호하게 설명된 부분을 구체적으로 알려준 것이다. 소미는 1분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서명했다. 자신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만으로 평생을 살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 꿈만으로 소미는 달려왔다. 하지만 무엇을 부를 것인가 묻는다면 소미는 답하기 어려웠다. 분명 소미에게는 취향이 있었다. 다소 대중적이지 않고 신념에 가득 찬 가수의 노래들. 하지만 소속사는 그녀가 무엇을 부를지 이미 결정한 상태였고 소미는 불러 달라는 곡을 시키는 대로 부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소미는 그 노래들을 받았을 때 다소 냉소적인 웃음이 스쳤다. 한 남자에 대한 짝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계약서에서는 남자 문제에 선을 긋고 부르는 노래는 한 남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에 관한 노래이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유혹한다. 소미는 잠실 주경기장에 가득 찬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순백의 드레스가 짧은 레드 스커트로 바뀌어 가듯 여자의 사랑은 순수에서 유혹의 단계를 향해 간다. 모든 사람을 유혹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소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이해했다. 켜짐과 꺼짐을 반복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녀의 사랑은 극과 극을 오갔다.
소미는 노래할 때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가정하고 몰입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팬이었다. 그 팬들은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다. 그녀의 노래가 그들을 사로잡을 때 그녀의 인기는 그에 상응하는 성공으로 보상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자신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들이 가져다 줄 선물과도 같은 가시적 성공인지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러한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면 팬들의 사랑이 그녀에게 유의미할까. 그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길가에서 기타 하나를 들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다 그녀의 노래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줄 것이 없는 팬 하나를 만났다면 오직 그 사람을 위해 노래할 수 있을까. 소미는 가수가 아닌 다른 길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엇보다 그녀는 가난이 싫었다. 따라서 가난한 팬도 싫었다. 가수라는 길이 화려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쩌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소속사에서 원하는 노래를 부르는 소미는 먹고 토하며 보이는 몸매를 유지하듯 이율배반의 줄타기를 쓰러질 듯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소미는 눈을 떴다. 언제 침대에 누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직 어둠이 머문 창밖을 보며 그녀는 아침이 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았다. 몇 해 전 있었던 콘서트의 열기가 아직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듯했다.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녀는 팬들과 사랑에 빠져 몇 해를 보냈다. 스포트라이트가 주는 열기는 관객의 호응과 함께 그녀의 심장을 터질 듯이 뛰게 만들었다. 그날, 콘서트는 만석이었고 그녀는 이제 월드투어를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콘서트에서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한강이 보이는 커다란 집도 CF나 TV 예능 프로그램 혹은 단막극의 카메라도 그녀의 내면을 채우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으로도 콘서트의 환호와 그녀를 향한 뜨거운 시선을 대체할 수 없었다. 그것 없이는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콘서트에 관한 꿈은 좋은 꿈인 동시에 악몽이었다. 깨어났을 때 콘서트의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꺼져 있기 때문이다.
소미는 불을 켰다. 새벽 3시였다. 세수를 하고 간단하게 메이크업을 했다. 그리고 인스타의 라방을 켰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몇백 명의 사람들이 접속했다.
‘언니! 보고 싶어요.’
자신을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다.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어요. 그러다 깼는데 ‘러브미’ 여러분들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여러분은 늘 제 곁에 있어줄 거죠?”
소미는 솔직하게 말했다.
‘영원히 사랑해요.’
듣고 싶었던 말이다. 소미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연인의 고백은 거짓말이라도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케이크처럼 영혼을 위로한다. 소미는 오늘의 일정을 러브미에게 알려준다. 그와 그녀들은 소미의 안녕을 바라며 소식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가 외롭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을 듣고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할 수 없는 소미는 라방을 한다. 그곳에서 소미는 자신을 사랑하는 팬들을 만난다. 이런 예약에 없는 만남이 팬과 소미를 연결하고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계산하지 않는 계산들’, 준하가 옆에 있었다면 아마 이런 말을 뱉었을지도 모르겠다.
라방을 마치고 토막잠을 잔 후, 알람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소미는 준하의 전화를 받고 그날의 일정을 확인했다. 검은색 레깅스와 회색 후드티를 입고 프라다 가방을 들었다. 가볍고 편한 차림이었다. 주차장 SUV에 몸을 실었다. 소미는 준하가 건넨 샌드위치 반쪽과 아메리카노를 받는다. 하지만 소미는 샌드위치를 먹지 않는다.
“너 그러다 속 망가져.”
소미는 창문을 열고 준하의 우려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 거울 속 얼굴선을 망치지 않는 것이 속이 망가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오늘 성수동에서 CF 촬영이 있죠?”
소미는 화제를 돌렸다.
“그래, 오후에는 신곡 연습이 있어.”
“이번 신곡은 어때요?”
“댄스곡이야. 여름에 어울리는 곡이라더군. 춤은 좀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죠. 언제 내가 선택한 적이 있던가요?”
“서운하다. 나는 늘 너를 최대한 배려하려고 애쓴다고.”
“알아요. 준하는 소미의 대변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네 건강을 생각해서 샌드위치 준비했잖아. 드레싱도 없고 로메인, 토마토, 삶은 달걀, 닭가슴살이 전부라고.”
“지겨워. 달걀, 닭가슴살. 말만 들어도 토할 것 같아.”
소미의 말에 준하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사랑은 어디에서든 시작될 수 있다.’
A사의 화장품 광고 카피였다. 이 말의 이면에는 따라서 ‘여자는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맨 얼굴은 메이크업으로 커버될 수 있다. 하지만 맨 얼굴은 평소에 관리하지 않으면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밖에 없다. 가장 근본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의 아름다움이다. 고가의 고농축 에센스 광고로서 적합한 타겟팅인 듯하다. CF에서 소미는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재훈과 같은 회사 동료로 출연했다. 소미는 야근 중에 맨얼굴을 재훈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그런 소미가 평소에 사용하는 화장품은 A사의 고농축 에센스이다.
“요즘은 20대 때부터 주름 관리를 한다더군.”
준하가 코디가 건넨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채 메이크업을 하는 소미를 향해 말했다.
“언니는 아무것도 안 해도 예뻐요.”
메이크업을 하던 주이가 말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이 몇 곳인데.”
소미는 주이를 향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신곡은 상큼한 과일 향이 느껴지는 곡이었다. 1집의 구애의 성공으로 여자는 사랑을 이루고 뜨거운 사랑에 빠져든다.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는 하와이가 예정되어 있었다. 월드투어가 끝난 시점에 새 앨범이 발매될 것이다. 소미는 헤드셋을 끼고 멜로디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악보를 보며 가사를 따라갔다.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였다.
“좋기는 한데 너무 특색이 없지 않아요?”
“역대 여름 노래들을 죄다 펼쳐 놓아 봐. 특별한 곡 별로 없어. 안전한 게 최고야.”
소미는 갓 짜낸 레몬즙처럼 준하를 쏘아보았다. 그가 프로인 것은 분명했지만 아티스트로서의 소미의 색을 단지 잘 팔리는 상품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한계라고 생각했다. 소미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잠실 주경기장에서 영원히 빛나는 보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발을 잘못 디디면 영원한 나락이라는 것쯤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늘 안전한 선택을 하는 준하를 밀어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소미는 자신의 바닥을 알고 있었다. 지금 있는 한남동의 빌라는 소속사 명의였고 메이크업과 의상을 포함하는 그녀의 가수로서의 품위 유지비는 소속사 측에서 하나하나 장부에 기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회사에 갚아야 하는 빚의 크기였다. 병원만큼 효과가 확실하지 않을 것 같은 A사의 에센스도 계약 기간 동안 여기저기 들고 다니며 사용해야 했다. 협찬은 사용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CF 속 소미는 A사의 화장품을 선택하지만 현실에서는 화장품 회사에서 이미지를 위해 소미를 선택한 것에 가깝다. 계약서에는 소미가 계약 기간 동안 지켜야 할 신의 성실 의무를 기재하고 있다. 만약 자신의 인기가 사라지면, 자신이 움켜쥔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팬덤은 그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이다. 그 후광이 사라지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팬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대형 소속사에 들어가서 그들이 만드는 이미지에 자신을 구겨 넣었다. 그렇게 맞춰진 물건이 가수로서의 소미였다. 프로 작곡가와 작사가가 만든 곡들은 실패할 확률이 적다. 자신의 취향은 다른 문제였다. 사람들이 바라보지 않는 취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촌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비주류다.
일정을 마친 소미는 K 피부과를 찾았다.
“자고 싶어요.”
의사는 소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하얀 액체를 주사했다. 그것은 검진이라기보다는 주문에 가까웠다. 그 비밀스러운 액체가 소미의 혈관을 타고 흘러 들어갈 때 느껴지는 편안함은 삶의 긴장감을 이완시켰다. 콘서트의 뜨거운 열기도 계약서의 차가운 조건들도 없는 안온한 곳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지옥이 될 것 같아 붙잡으려 애타게 손을 뻗어 달릴 필요도 없는 아늑한 정원과 같았다. 푸른 하늘 아래 소나무와 물길이 솟는 분수가 있고 빨간 장미가 가득한 곳이었다. 돌길을 따라 걸으면 맑은 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었다.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쉰다. 완전한 휴식이다. 소미는 장미의 꽃잎을 매만졌다. 검붉은 색이 화려했다. 하얀 구름에 꽃잎을 비춰보며 잔디에 누웠다. 풀잎이 다리에 닿는 감촉이 신선했다. 누워서 보는 하늘은 높기보다 정겨웠다. 아무도 없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 완전하게 채워진 느낌이었다.
“좋은 꿈을 꾸셨나요?”
의사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소미는 차분하게 답했다. SUV가 S 호텔 앞에 섰다. 소미는 차문 앞에서 망설였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돼.”
준하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말했다. 요새 여자 가수들 중에는 자신의 연애 사실을 숨김 없이 밝히며 그 또한 쇼의 일부로 삶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소미의 계약서에만 유독 품위 유지 조건으로 남자 친구가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그 이유는 소미가 계약을 체결한 후 얼마 뒤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지원받은 금액의 최소 수십 배의 돈을 배상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친 듯이 천국으로 향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소미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천국이 동전의 양면처럼 쓰디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호텔 앞에서 망설이는 것이었다. 아마추어처럼. 엘리베이터에서 스위트룸으로 향하는 꼭대기 층을 누른 소미는 숨을 고른다. 호텔 안에는 거액의 미끼로 그녀를 구입한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의 슈가 대디는 어떤가요?”
미국의 파티에서 유명한 프로듀서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양볼이 빨개진 소미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청교도의 금욕주의적 사상에 뿌리를 둔 보수적인 세력, 그 주위에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쾌락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곳은 성에 대해 자유로웠다. 금기시되는 마약조차 암암리에 퍼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볍게 슈가 대디를 언급한 것이다.
“그런 건 없다.”
준하는 말을 자르고 그녀를 다른 자리로 이동시켰다.
“그냥 던지는 말에 반응하면 안 돼.”
준하는 싸늘하게 말했다. 예쁘고 아직 인지도가 미미한 여가수가 미국의 대형 음반회사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했다. 후원자가 있을 것이란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떴든 뜨기 전이든 경험을 통해 스케일을 키워야 한다는 준하는 소미를 파티에 참석시켰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누가 너의 후원자냐고 음반 프로듀서가 물은 것이다. 하지만 슈가 대디는 순수하게 음악을 후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성을 담보로 한 거래를 의미하며 따라서 소미에 대한 비하를 담고 있었다.
일을 마친 소미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날 이후, 그를 만날 때마다 미국에서의 그 파티가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와의 만남은 전혀 달콤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쁜 것을 잊기 위해 더 나쁜 일을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소미는 호텔에 들어선 순간부터 가난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면 살기 위해 다시 일을 하러 나갔다. 어머니의 사랑도 아버지의 사랑도 없는 집에서 소미는 공부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모자란 남자라서 헤어진 것이다. 배운 것 없고 가난한 남자라서. 자식은 책임지기 싫은 존재라서 버린 것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탈출한 것이리라. 소미는 어머니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좋은 남자가 아니니까. 그런 어머니를 붙잡고 앞길을 막는 것은 나쁜 딸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소미는 생각했다. 쌀밥에 김치 그리고 계란후라이 같은 간단한 음식조차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물이 새 여름이면 곰팡이로 몸살을 앓는 집도 월세는 매달 지불해야 한다. 소미는 어머니처럼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겠다고 다짐했다.
월드투어를 마치고 새 앨범이 나왔다. 언박싱 영상에서 새 앨범에 미니 콘서트 티켓 응모 쿠폰이 동봉되어 있다고 말했다. 앨범을 많이 살수록 당첨 확률은 올라간다. 앨범 판매가 쉽지 않은 현실 속에 팬 한 명에게 여러 장의 앨범을 구매하게 하는 마케팅 방식이다. 소미는 팬들 중 누구에게도 여러 장의 앨범을 사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계산이 회사 측에서 이미 기획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러브미! 사랑해요!”
수만 명의 접속자를 확인하며 마지막 인사를 마친 후 소미는 초조하게 차트 순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의 팬덤 화력으로 쉽게 차트 상단에 진입하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미는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국내 차트 10위권 내에 진입하고 다시 1위를 차지하고 세계 차트도 안정적인 순위권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이다. 늘 하던 만큼 해야 한다. 혹은 이전에 이룬 것을 초월해야 한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 새로운 별이 뜬다. 그 별은 제2의 소미 또는 소미를 능가하는 무언가가 되기를 바란다. 그 가능성들이 어떻게 인정받든 소미가 이룬 것을 갉아먹으며 자라리라는 것은 명확하다. 인구는 한정되어 있고 떠오르는 별은 그 가운데 자신의 팬을 만든다. 팬은 유행하는 옷을 갈아입듯 좋아하는 가수를 바꾼다. 때로는 한 옷을 십 년 넘게 입으며 소중히 하는 사람처럼 지속적인 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새로운 것이 나오면 바꾼다. 소미는 잊히는 별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잊히는 것이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차트 하단에서 잠들어 있지만 누군가 그녀 위에 설 그날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뜨고 싶었다. 하지만 뜨고 난 후에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팔릴 때 팔아야 한다는 준하의 말은 정확한 듯 보였다. 어차피 가라앉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면 더욱 그러하다.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팔 기회를 엿보는 것도 중요하다. 연기자로서 자리 매김하라는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팬을 사랑하되 팬의 사랑을 믿어서는 안 된다. 소미는 차갑게 웃었다.
TV를 보는 사람은 크게 없지만 활동은 해야 한다. 개인 방송이 등장하며 공중파 방송의 시청률은 처참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가수 활동의 기본이고 돈이 되든 안 되든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소미는 공중파 방송사 몇 곳의 가요 프로그램에서 퍼포먼스를 했다. 야자수가 펼쳐지고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여름 해변에서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 남자 댄서와 호흡을 맞춰 춤을 췄다. 소미의 청량한 노래가 흐르자 러브미는 뜨겁게 환호했다. 무대를 마치자 전신이 땀에 젖었다. 소미는 가수가 편한 직업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겨울에도 민소매에 얇은 스커트를 입고 야외 공연을 해야 하며 한여름에도 고강도의 춤을 소화해야 한다.
“댄스곡 안 하고 싶어.”
소미는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더위를 식히며 볼멘소리를 했다.
“나이 차면 하고 싶어도 못해.”
준하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발라드 부를 때쯤이면 차트에서 내려오는 즈음일 거야.”
소미에게는 준하의 말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말처럼 무섭게 울렸다.
“소미야! 기부를 하자.”
준하가 건넨 말에 소미는 다소 놀랐다. 20대 중반의 소미를 두고 소속사는 이미지 메이킹에 고심하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사랑 노래만으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20대 후반에서 서른을 넘기는 시점이 오면 그런 노래는 필연적으로 다른 여가수에게 더 어울리게 된다. 지금 정상의 반열에 있지만 그녀의 인기를 장기적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자로서의 이미지보다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물론 기존에 그래왔듯 계약을 더 연장하지 않고 소미를 버리는 방법도 존재했다. 이런 고민도 어디까지나 기대 이상으로 소미가 커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부는 내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미가 물었다.
“착해 보이는 것이 나쁘니?”
준하가 되물었다.
“왜 착해 보여야 하나요?”
“좀 더 오래 노래하기 위해.”
그 둘의 상호 관계에 대해 소미는 생각해 보았다.
“세상에 불우한 사람들이 많잖아. 너는 그 사람들의 빛이 되고 싶지 않아?”
“그건 제가 꿈꾸던 일이에요.”
“그래? 그럼 그런 내용으로 작사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준하 씨 생각인가요?”
“정확히는 회사 기획팀 생각이야.”
소미는 자신의 이름으로 한국소아암재단에 1억 원을 후원했다. 신문에 기사화되고 선한 이미지가 더해졌다.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순간에 회사가 원하는 것을 한다. 한여름 사랑 노래로 한창 사랑받는 여가수가 선행을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런 선행은 소미에 관한 몇 년 후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난하고 병든 어린이를 돕듯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사랑 노래를 부르며 성공하기 어려워지는 어느 시점에서 소미는 자신의 이미지를 국민 가수로서의 프레임으로 옮겨가고 있을 것이다. 외연의 확장은 소미의 가수로서의 수명을 연장시킬 것이다. CF도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지닌 제품들로 취사선택했다. 소미는 잘나가는 가수였고 다가오는 여러 기회 중에 고를 수 있었다. 그런 제품 이미지가 소미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연예 프로그램 인터뷰에서는 환경에 대한 고민과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집에는 소속사에서 모아 놓은 환경 및 사회 관련 자료들로 가득했다. 소미는 활동 틈틈이 그 자료들을 공부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생기고 그 빛 속에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어.’
소미는 자신이 쓴 구절을 바라보았다. 그 가사에는 자신의 지난 시간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었다. 소비하고 소모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는 않을 것 같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그리고 또 자주 하기 싫은 일들을 감내해야 하는가. 아니 어쩌면 영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미혼모를 돕고 싶다고 했을 때 소아암 환자를 도우라는 회사의 지시처럼 모든 방향은 그녀의 의견을 묵살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노래 가사도 또 다른 전문가에 의해 각색될지 모른다. 그녀의 이름이 작사가로 기재되겠지만 보여지는 결과물은 처음 의도와는 사뭇 다를지 모른다.
‘성공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타인을 위한 것이야.’
소미는 생각했다. 한강이 보이는 집보다 푸른 잔디가 있는 정원 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하지만 소속사가 제공하는 집은 그녀의 취향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차원에 놓여 있음을 소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소미는 자신의 바른 손을 바라보았다. 몇 번의 자살 시도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녀를 올바르게 사랑했다면 없었을 흔적이었다. 원치 않는 아이가 생겼을 때 버리지 않고 키우겠다고 결심하는 어머니는 특별하다고 소미는 생각했다. 육아는 희생을 의미한다. 자기 몸의 양분의 일부를 내어 아이를 몸 안에서 열 달 동안 키운다. 낳은 후에는 그 아이가 온전히 한 사람의 역할을 할 때까지 책임을 진다. 소미는 그런 어머니가 그리웠다. 그래서 그런 어머니를 돕고 싶었다. 아픈 손가락 가운데 더 아픈 손가락처럼. 비 오는 날에 우산을 챙겨 들고 마중 나오고, 화려하지 않아도 평범한 도시락을 챙겨주는 어머니가 있다면, 커다란 집도 명품 가방도 필요치 않을 만큼 행복할 것만 같았다.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지 않는 어머니와 아내의 빈자리를 분노로 채우는 아버지가 아닌 좀 더 안온한 가정이었다면, 소미는 가수가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목에 상처를 내며 죽을 각오로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길이 아닌 길을 꿈꾸며 하고 싶지 않은 것들로 삶을 허망하게 채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내면의 모든 것을 물질로 치환했음을 알고 있었다.
“가사 괜찮은데.”
준하가 말했다.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봐. 요새 사람들이 기후 위기에 대해 말이 많으니까.”
“읽고 있어요.”
“라방 때도 가볍게 그런 주제로 이야기해 보면 좋을 거야. 참, 너 전에 나도 모르게 라방을 했더라. 최소한 문자라도 남겨.”
“알겠어요.”
소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 몰아세우고 있는 거 알아.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오늘 네가 아직 살아 있는 거야.”
“그럼 나는 언제 죽나요?”
소미는 예의 굳은 얼굴로 딱딱한 시선으로 준하를 바라보았다.
“너는 안 죽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소미는 카메라를 향해 기계적으로 반응하듯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은 작위적이지만 너무나 완벽했다. 준하는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1년에 수 센티미터씩 높아진다는 기사가 담긴 서류 뭉치로 가볍게 소미의 머리를 내리쳤다. 소미는 장난스럽게 준하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너희 집 곳곳에 카메라 달려 있어. 조심해.”
준하는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말을 던지며 현관문을 나섰다.
몇 달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케이지의 노란색 새에 대해 물었을 때 준하는 메신저로 카나리아라고 답했다. 회장님 선물이라는 답과 함께.
‘네가 외로워 보이셨나 봐.’
소미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방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의심이 있다고 해서 달리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미는 자포자기하듯 소파에 기댔다. 카나리아가 맑은 소리로 노래했다. 소미는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마치 숲 속에 있는 듯했다. 카나리아가 숲에 있다면 좀 더 자유로울 것이다. 이 넓은 빌라도 카나리아에게는 좁다. 더구나 케이지는 더욱 그러하다. 새는 오직 인간의 필요에 의해 케이지에 갇혀 있을 뿐이다. 소미는 몸을 일으켜 카나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모이를 주었다. 그 구슬프게 맑은 소리가 소미의 내면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비바람을 걱정하지 않아도 새는 새장 속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 자유와 맞바꾼 평화다.
가수가 되어 성공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누군가 소미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학예회 때 소미의 노래를 들은 동급생이 해준 이야기였다.
“너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어. 네 노래를 들으면서 울었어.”
그때 소미가 부른 노래는 댄스곡이 아니었다. 아주 슬픈 발라드였다. 어머니가 떠난 슬픔을 노래로 채우던 소미는 그중에 좋아하는 곡을 골라 무대 위에 섰다. 의상도 메이크업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무대 위에서기 위해 꾸미는 건 소미에게 사치였다. 하지만 화려하게 치장한 다른 아이들을 누르고 1등을 하였다. 소미는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말에 진로를 바꿨다. 부르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좋아했지만 자신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오디션을 보고 유튜브에 자신의 노래를 올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침없이 달렸다.
소미는 케이지 안으로 손을 뻗어 카나리아의 깃털을 매만졌다. 연역하고 부드러웠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가을밤의 바람은 조금 서늘했다. 날지 않는 새가 있다. 원래는 날 수 있으나 날 수 없도록 새장 안에 갇힌 새가 있다. 누군가의 벗이 되는 조건으로 새는 노래를 하고 모이를 받아 먹는다. 새가 새장에 익숙해지면 케이지를 열어 두어도 더 이상 떠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법을 잃은 것은 아닐 것이다. 떠나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익숙한 세상이 정상은 아니지만 이미 그 세상이 전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새장 안의 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 작은 감옥 안에서 소미의 벗이 되어 준다. 카나리아의 노래가 소미의 시간들을 켜켜이 채워 나가던 어느 날, 준하는 장난스럽게 소미를 향해 말했다.
“나 여자친구 생겼어.”
소미는 그 말이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아, 그래. 축하해.”
소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작사는 잘 돼?”
준하가 물었다.
“여자친구 이야기는 안 해줄 거야?”
소미가 되물었다. 가을 햇살이 한강 위로 맑게 부서지는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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