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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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노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간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새벽인데도 그치지 않았다. 더 강하게 뿌려져서 길가의 가로등은 희미하게 빗속에 묻혀 버렸다. 새벽녘의 밝음과 동시에 잠에서 깨었다. 출근을 위해 빵과 우유로 아침 끼니를 해결하고 출근하기 위해 나섰다.
비가 멈췄다. 비에 젖은 정원에 빨강, 노랑, 핑크, 흰색 색색의 꽃들이 피어서 어우러져 있다. 빗물을 먹은 잔디도 살짝 부는 바람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문을 나서자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이름이 ‘서윤’이라고 했다. 왠지 모르게 눈빛은 멍한 느낌을 일으키며 지적인 눈빛이다. 입술은 두툼하면서도 입가에는 검은 점이 한층 요염함을 풍기게 하고, 눈썹이 조금 올라간 신경질적인 용모이지만 콧날이 오뚝한 섬세한 용모다. 시원한 듯한 이마가 차가운 인상을 자아내고, 눈은 뚜렷한 쌍꺼풀로 동그란 눈동자는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웨이브 한 긴 머리칼이 여자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는 옆집의 그녀는 같이 출근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런 그녀가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같이 있다. 아니, 동거 중이라고 했다.
요즘은 일찍 일어나느라고 날마다 피곤하다. 일찍 자면 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밤마다 무슨 약속이 그렇게 많이 잡히는지 모르겠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옆집 그녀, 서윤 때문이다. 얼마 전에 알게 되어 눈인사했던 옆집 서윤을 회사 로비에서 만난 이후로 우리는 같이 출근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남자 친구와 동거하고 있다는 걸 고백한 게 지난주였다. 나는 10년 가까이, 이혼남인 홀아비라는 걸 진작 이야기했기 때문에 내심 썸 씽 스페셜을 한껏 기대했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허겁지겁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뛰어온 남자 친구랑 동거한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세상 무섭다. 갓 스무 살 넘어 보이는 그녀가 남자랑 동거하고 있다고 하니 아이러니하다. 하긴 요즘같이 아무나 대학 가는 세상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일하는 그녀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안이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겠고, 소녀 가장일 경우도 있고 뭐 기타 등등의 사유로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그건 아닌 것 같다. 하고 다니는 모양새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찍어 바르고, 풍기는 이미지도 좀 놀았던 여자라는 생각은 처음 볼 때부터 했었다.
강릉이 고향이라는데 사투리를 거의 안 쓴다. 가끔 가다 용어 선택에서 서울 사람이 잘 안 쓰는 말을 해서 고향을 넘겨짚어 맞췄지만, 그것만 빼고는 그냥 강남에서 길 가다 가끔 볼 수 있는 준 킹카 수준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매끄러운 웨이브 진갈색 머리칼. 얼굴에 화장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잘 스며들어 있는 뽀얀 메이크업. 한창 생리 중인 듯 시커멓게 칠해 놓아 푹 들어간 눈두덩. 선명하게 치켜 올려진 눈썹. 칼로 잘라 놓은 듯 뚜렷하게 그려진 번쩍이는 입술. 그뿐일까, ‘왜 이렇게 브래지어가 작지’라고 투덜거리며 솟아오른 통통한 유방. 그 통통한 유방이 매달려 있기에는 안쓰러운 듯한 호리호리한 허리. 그 모든 걸 팽팽하게 감싸고 있는 하얀 니트 나시. 그 하얀 나시보다 더 하얀빛을 내며 드러난 동그란 어깨 등등. 어린 여자를 앞에 놓고 어느 자식이 재미있게 해주리라는 마음이 들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서윤이 동거한다고 말한 후부터는 출퇴근 길이 재미가 없어졌다.
동거하고 있는 남자가 스물한 살이라고 한다. 군대 갔다 온 대학생이라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듣고 보니 내 아들도 군에 갔다 와서 대학교에 다닌다. 10년 전 이혼할 때 아내가 아들을 양육하기로 하고 이혼했다. 지금은 연락도 없다.
서윤의 회사가 빌딩의 14층과 15층을 쓰는 중소기업이고, 나는 개인 사업으로 18층에 조그마한 12평의 임대 사무실에 직원 4명이다. 직원들은 9시까지 출근하는 사무실에 보통 때 나는 사장으로서 10시 정도에 출근한다. 옆집 서윤을 만나고부터는 8시 반까지 내 회사 빌딩에 도착한다. 내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곤 한다.
그래도 20살 넘게 차이 나는 여자애랑 같이 출퇴근하는 재미에 빠져서 나이트라이프는 좀 포기하더라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지니게 된 게 다행이라고 나 스스로 격려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임자 있는 몸이라고 튕긴 이후에는 시간도 아깝고, 차에 태우고 다니는 게 조금 더 드는 기름값도 아깝다.
뭐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 차이도 크고 젊은이랑 같이 잘 살고 있는 그녀한테 아빠뻘인 아저씨가 들이댄다고 안 먹힐 거 뻔하니까 괜히 기분이 나쁘다. 게다가 내가 그녀 남자 친구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날마다 동거 중인 남자 친구 이야기를 꺼내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역겹다.
그녀 남자 친구도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살아왔단다. 그리고 아버지는 회사 운영하는데 아예 연락도 없단다.
이혼, 그렇다. 아내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10년 전, 여느 날처럼 아내가 퇴근해 와 저녁 준비가 한창이다. 나는 이런 시간이 제일 좋았다. 11살인 아들은 학원에서 아직 오지 않을 시간이지만 아내가 오늘의 특별한 요리에 대해 설명하면서 밥상을 차리는 그 시간이 항상 정겨웠다. 그리고 어쩌다 모자라는 찬거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뛰어나가 반찬을 사 오기도 하고, 서로가 마주하면서 밥상을 받기 위해서 저녁을 차리다 남은 설거지를 도와주기도 하는 그런 흐뭇한 시간은 나만의 기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보, 두부가 모자라, 좀 사다 줄래?”
“오케바리!”
나는 아내에게 어떤 종류냐고 묻고는 츄리닝 바람이지만 날듯이 아파트 현관문을 나섰다. 아직까지 조금은 쌀쌀한 날씨에 코트를 걸쳐야 하기도 하지만 나는 단걸음에 달려갔다 올 생각에 운동화 짝을 끌고 나섰다. 언제나 아들에게는 운동화를 꾸겨 신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나는 이럴 때면 으레 운동화를 꾸겨 신고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앞의 계단을 내려서는데 급한 마음이었는지, 그만 나는 한쪽 신발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그 신발을 도로 신으려고 발을 뻗으면서 돌아앉는 순간, 쾅! 하는 충격과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정신이 좀 들어?”
나는 온몸이 뻣뻣한 느낌에 싸여 눈을 떴다. 코끝을 맴도는 냄새와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 병원인가 싶다. 입도 잘 움직이질 않고, 나는 그제서야 온몸으로 느껴지는 전신적인 통증에 입을 뗐다.
“여기가 어디야?”
“어디긴, 병원이지?”
“병원?”
아내는 눈물이 글썽한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하지 말라며, 아내는 나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떨어진 신발을 신으려고 주저앉은 그 짧은 순간에, 차를 빼려고 뒤로 후진하던 승용차의 뒷범퍼에 부딪혀 바닥에 고꾸라졌다는 것이다. 정통으로 엉치뼈와 허리 부위를 다쳐서 의사는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다고는 했지만, 아파트 입구였고, 다행히 속력을 별로 내질 않았던 고로, 그만하기를 다행이란다.
옆에는 사고를 냈다는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체조로 균형 잡힌 몸매처럼 청순함과 함께 성숙한 여인 같아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사고를 낸 박시원이라고 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차를 뺀다는 것이 뒤를 보질 않아서 그만….”
아내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가 남편과 다투고 홧김에 나가다가 흥분해서 미처 뒤를 보질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누운 채로 눈인사만을 했다. 얼굴을 보니 반상회에서도 몇 번 본 얼굴이었다. 그녀 남편이 변호사라고 하던 것 같던데…. 아, 언젠가 동 아파트 모임 때 힐끔힐끔 나를 보다가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 그녀는 한쪽 눈을 깜박이며 윙크해 왔던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무척 당황해했었다.
“…….”
“큰일 날 뻔했더라고요. 이 모든 걸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특히….”
박시원이라고 하는 그 여자가 ‘특히’라는 의문의 말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영민은?”
박시원이 나가버리자 아들 생각에 그제야 영민을 물었다.
“걱정하며, 울고불고들 했지 뭐. 자기, 4시간 동안 넘게 정신이 없었던 거 알아? 나는 머리라도 다쳤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다고. 검사는 일부만 했는데, 머리에는 이상 없다나 봐. 영민은 내일 학교 가기 때문에 엄마가 데리고 집으로 가셨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아내에게 회사 직원 집에 전화 넣으라고 일러 주었다. 전화기의 단축 번호를 알려주고, 당분간 회사에 못 나갈 것 같으니 사소한 업무 처리를 하라고 당부했다.
그제서야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또다시 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떠 보니, 일반 병실로 옮겨와 있었다. 2인실이었고, 아까보다는 조용하고 정돈된 느낌이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때, 아내와 함께 담당 의사와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들어왔다.
“김석현 씨? 정말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어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으세요?”
나는 허리와 엉치뼈 주위가 아파 제대로 누울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
“아, 그 부위는 조금 있다가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야 되기 때문에 통증이 있으시더라도 조금 참으세요. 사진을 찍기 전에는 진통제를 원하시는 만큼 드리질 못합니다. 양해하세요.”
나는 왜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의사는 아내를 돌아다보았다.
“말씀 안 드리셨어요?”
의사가 아내에게 말했다.
“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그러셨군요. 외견상으로는 별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아까 실려 오셨을 때, 발가락 촉각검사에서 반응하시는 것이 좀 문제가 있어서요. 검사 후에 다시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의사가 나가고, 촉각검사가 무어냐고 아내에게 물었다.
“그게, 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 일시적으로 이런 사고 후에는 허리를 다쳤기 때문에 하반신의 신경계통이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나 봐. 검사를 자세히 해보아야 알겠다고 하시는데, 검사를 다시 하기 전에 정신이 들면 꾸준히 발가락을 움직여 보라고만 하셨어.”
나는 아내에게 이불을 좀 걷어 보라고 했다. 저 밑으로 발가락이 보였고, 의사의 지시대로 발가락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뜻대로 쉽사리 되질 않았다. 평소에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던 발가락들이 반응하질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실망이었다.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도 역시 불안한 눈초리로 발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일시적이라잖아?”
퇴원하는 날이었다. 또 다음 날 아침부터 아내는 아들 영민을 학교로 보내고, 박시원 그 여자에게 전화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창피하지도 않은지, 간밤의 이벤트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오늘 새벽에는 발기되어 사정까지 했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해댔다. 그리고는 의사 만나러 간다면서 집을 나섰다. 서너 시간이 지난 후, 아내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이 뭐라셔?”
“당신 증상이 심리적인 충격에서 오는 심인성 가성임포일 수 있대. 그게 무엇인고 하면 당신이 다친 부위가 허리이다 보니, 허리를 다시는 못 쓰면 어쩌지 하는 심리적인 압박으로 성행위를 겁내게 되고, 나아가서는 하반신의 일시적인 마비까지 올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서 어제 일도 말씀드렸더니, 아주 좋은 시도라면서 다른 것도 해보라고 하셔서 말이야.”
“다른 거라니?”
“이를테면, 막혔던 하수관을 뚫으려면 물이 내려가는 압력보다 쎈, 그거 이름이 뭐였더라, 옳지, 뚫어펑으로 해야 그 막힌 곳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처럼 보다 한 단계 높은 충격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 여자에게 부탁 좀 하려고.”
“그 여자라면 사고 낸, 박시원? 무슨 부탁을?”
“당신은 잠자코 있어 봐. 내가 생각한 게 있으니까.”
나는 아내의 의중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도중에 나는 자꾸만 다리가 쥐가 나는 것처럼 찌리찌릿한 느낌이 오는 것이었다.
이게 나아간다는 신호인가? 나는 아내에게 말도 하질 않고 휠체어에 앉아서 하루 종일 발가락을 움직이려는 의지를 혼자 속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아내는 평소보다 오랜 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준비했고, 아들을 학원에서 바로 장모댁으로 실어다 나르느라 조금 늦은 저녁을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글지글 고기를 굽고, 오랜만에 술도 준비한 것을 보면 아내는 신이 났는가 보다. 저녁밥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갈 무렵에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가 문을 여는데 현관에는 사고 낸 박시원이 하얀 블라우스와 몸을 감싼 긴 스커트 차림으로 과일 선물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박시원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아내는 감사도 전할 겸,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한다. 나는 어서 들어오라고 말하고는 우선 거실로 안내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박시원에게 나는 예전보다 아주 좋아졌다고 인사로 건넸다.
저녁밥 먹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우리 셋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잊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는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식사가 끝나자 술자리로 변했다. 나도 오랜만에 육류 고기와 함께 술을 먹었던지 별로 취하지도 않고, 소주를 세 사람이 5병 넘게 비웠다.
서로가 이제는 술도 먹을 만치 먹어서인지 거의 야자의 분위기였다. 설거지를 여자 둘이서 하니 순식간에 치워지고, 세 사람은 거실에서 커피잔을 들고 마주 앉았다.
아내는 커피를 반쯤 마실 때 소파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여보, 나 술을 너무했나 봐. 잠깐만 누울게.”
눈 감긴 채로 말한 아내가 고개에 힘을 잃고 쓰러지자, 박시원이 아내를 부축해 침대 위에 눕히고 나왔다.
“저 사람 때문에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별말씀 다 하시네요.”
“저어 박시원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궁금한 게 뭔지.”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특히’라 하셨는데, 내 몸에 ‘특히’가 뭔지요.”
특히에 관해서 물었지만, 박시원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부끄럽지만 말씀드리죠. 의사가 다친 허리로 인해서 성 발기불능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어요. 저로 인해서 발기불능이면 큰일이잖아요. 한참 왕성한 나이에. 그래서 ‘특히’ 그것만은 책임지겠다는 거였어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아니에요. 어떡하든지 정상으로 돌려놔야, 내가 편해서 그래요.”
그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박시원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니 기분이 좀 그러했다.
그녀도 변호사인 남편이 있고, 10살 정도의 딸이 있다고 아내로부터 들었다. 그런 그녀가 술의 취기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나를 바닥에 끌어내어 바닥에 눕게 했다.
“뭘 어떻게 아시려고요.”
“확인해야겠어요. 그냥 치료받는다 치고, 제가 하는 대로 가만 계시기만 하면 돼요.”
박시원은 내 하의를 벗겨 내고 내 몸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말아 올라간 스커트 사이로 드러난 뽀얀 피부가 내 눈에 사로잡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나는 심장의 피가 멈추는 것만 같아, 의도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내 몸이 이러니 반항할 수가 없어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아내와 짜고 한 수작 같았다. 아무튼, 결과는 사정되었다. 발기불능이 아닌 정상적인 발기의 사정이었다.
박시원은 기쁘다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이 계기로 아내 몰래 발기 훈련이라는 핑계로 박시원과의 관계를 자주 맺었다. 아니, 박시원이 더 적극적인 것으로 빠른 회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자, 회사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었다. 나는 끝내고 싶은데 박시원은 전화해서 만나자고 한다. 그만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면 집에 쳐들어오겠다고 해서 만나주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텔로 향했다.
이 짓을 자주 갖게 되자, 아예 내연관계로 돌변해 버렸다. 그런데 이 길은 길지 않았다. 박시원 남편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아내도 알게 되었다.
박시원이 자신의 남편한테 교통사고의 다친 몸을 책임지라는 나의 협박에 발기되지 않는 성추행과 폭행당했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 숙이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남편과 딸이 있는 가정을 가진 박시원이었다. 한 가정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거짓말대로 그렇게 했다고 해버렸다. 그러자 박시원 남편은 나를 협박과 폭행, 성추행범으로 경찰에 고소했다.
교도소 3개월 복역하고 나오니, 아내는 창피해서 더는 같이 살 수 없다면서 이혼을 요구해 왔다. 나도 잘한 것이 없어 아내의 요구에 이혼해 주기로 했는데, 아내가 아들과 같이 살아야 하니 이 집을 두고 나가란다.
아들을 위해서 아내의 요구대로 집을 나왔다. 소위 쫓겨났다. 이혼 이후부터 나 홀로 살아야 했던 10년 전, 내 이혼의 기억이었다.
오늘도 일찍 서윤을 태우고 출근한다. 어젯밤에 동거 중인 남자친구와 싸웠다는 둥, 남자는 왜 그러냐는 둥 이것저것 할 말도 많다. 하긴 한창 말이 많을 나이다.
“남자친구와 살고 있으면 부모는?”
“부모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혼했어요.”
“응? 미안.”
“아니에요. 엄마가 바람났다나, 피웠다나. 그 바람에 엄마하고 사느라고 대학도 못 가고 취업했어요. 사장님은 돌씽이세요?”
“응, 돌씽.”
“여자 없어요?”
“있어.”
“있어요? 어디 누구예요?”
“서윤이, 너.”
남자와 여자에 관한 얘기면 조금씩 야한 쪽으로 몰아가려고 말을 붙여줬지만, 이번 주엔 그냥 그러냐며 무심코 들어준다.
출근길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카 오디오 라디오에서 나오는 정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에 그녀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자기 혼자 신나게 떠들다 말고 무언가 동의를 구하는데 뭘 물어본 건지 모를 땐 그냥 뭐 그럴 때도 있다는 식으로 받아주었다.
남녀관계라는 게 참 묘한가 보다. 싸워서 헤어지는 남녀는 있지만 싸워서 헤어지는 애완동물은 없다. 남녀관계는 서로 말도 통하고 마음도 통하고 몸도 통하는데 세상 어느 애완동물도 말이나 마음이나 몸이 통하는 경우는 없다. 아니 더러 있나? 더러 역겨운 야동 보면 그런 게 있긴 하다.
아무튼, 그냥 무심코 들어주고 받아주는 게 서로 대화하고 받아치고 아웅대는 것보다 관계 유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윤도 아마 그런 경우가 되나 보다. 내가 집중도 안 하고 듣기만 하니까 내가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편이라고 믿어버린 것 같다.
다시 새날을 맞이했다. 아침에 그녀가 20분이나 늦게 나왔길래 출근 늦는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그녀는 그럴 것 같단다. 자기 엄마와 통화로 말다툼하다 보니 늦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도 두 달 넘게 같이 출퇴근하던 중에 처음 있는 지각 사태라서 기다린 게 짜증났음에도 불구하고 액셀러레이터를 조금 밟아 달렸다. 염병할, 조금 늦었더니 교통체증이 훨씬 심해져서 20분 차이의 늦은 출발이 40∼50분 정도 늦은 도착으로 이어져 버렸다. 당돌한 그녀가 라디오를 끄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입술을 가리면서 조용히 하란다.
8시 20분쯤이었는데 도착하면 9시쯤 될 것 같았다. 9시가 넘으면 지각이라는데 그녀 회사 사무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서 지각하면 우스워지는 분위긴가 보다. 차라리 결근하고 그다음 날 가면 아무 일도 아닌데, 한 10분 늦게 가면 하루 종일 핀잔 먹는단다. 그래서 조금 늦을 것 같으니까 사무실에다 전화한다.
내가 옆에서 듣고 있는데도 그녀는 성우 뺨치는 목소리 연기로 아픈 시늉을 하면서 결근 통보하는 것이다. 통화를 끊더니 날 보고 피식피식 웃는다. 거기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같이 웃어주었다.
짜증 나는 교통체증을 뚫고 운전하려니까 나도 짜증이 났다. 차라리 한 시간쯤 있으면 아침 러시아워가 풀리기 때문에 훨씬 수월해질 길을 어중간한 출발 때문에 가다 서다 반복하다 보니 기분이 더럽다. 다 누구 때문인데, 당사자는 회사 빼먹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이 산으로 가고 있나 보다.
나도 차에 달린 핸즈프리 버튼을 누르면서 그녀가 했던 짓을 똑같이 했다.
“쉿!”
신호가 가고 경리 직원이 받는다. 오늘 갑자기 출장이 있어서 출근 못 하니까 점심 약속 취소하고, 결재할 거 있으면 메일로 보내고, 그래도 중요한 거 있으면 전화 못 받을지 모르니까 문자 넣고, 거래처는 딴 사람 보내고, 정말 긴급한 일 있으면 휴대전화기로 전화하라고 한참 동안 중얼댄 후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보니까 그녀는 동그란 눈알을 굴리면서 날 쳐다보고 있다.
샛길로 빠져나와 차를 돌렸다. 위례신도시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은 짜증 나는 체증이 이어져 있었지만, 반대쪽 길은 최고 속도로 밟을 수 있을 만큼 한산했다. 그대로 쭉 달렸다. 계속 밟았다. 갈수록 차량 수가 줄어들어 더 달리기가 좋았다.
“어디 가세요?”
“놀러.”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는다.
“땡땡이?”
“너한테 배웠어.”
팔당호를 지나 북한강 강변을 따라 청평까지 달렸다. 누구나 어딘지 이야기하면 그다음 알 만한 곳이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라서 알 만한 건 다 안다.
살짝 눈치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나빠하는 표정이라도 지었으면 뭔가 말이라도 해주려고 했는데, 그냥 덤덤하게 앉아 있다. 계속 지껄여 대던 남자친구 이야기도 쑥 들어가 버리고 라디오에만 떠들어 대고 있다.
그냥 짜증이 좀 섞여 있던 터라 내가 좀 심하다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모텔 건물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이 차를 몰고 들어갔다.
“사장님, 자주 와요 여기?”
“오늘 첨 왔다.”
“거짓말.”
말하기 시작하면 길다. 그래서 그냥 씩 웃었다. 그녀도 씩 웃는다. 이건 서로 동의한 거다. 하지만 20년 넘게 차이나는 딸 같은 여자애와 모텔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모텔 주차장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뜻을 알아보기 위함도 있지만, 자동차를 돌려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안 들어가고 왜?”
“왜라니. 들어가고 싶어?”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와 놓고서.”
“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아쉬우면 오늘은 드라이브로 하고, 다음 기회에.”
“허긴, 오늘만 날인가요? 다음은 내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멋진 곳 안내할게요.”
의외였다. 저렇게 남자친구와 동거하고 있는 여자가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좋은 곳을 안내하겠다?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도 기대되었다.
돌아오는 토요일이란다.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리면서 며칠 전에 청평에 갔었던 그녀의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데는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짧은 치마 아래 반짝거리는 스타킹과 그 안에 들어 있는 허연 허벅지에 근육이 잡혔다 풀렸다 하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드디어 토요일이었다. 오전 10시쯤 그녀는 택시를 불러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마실지 몰라 택시를 이용하겠단다.
택시는 그녀가 약속한 남한산성으로 향해 달렸다. 그녀가 가자는 대로 남한산성 불당리로 접어들었다. 계곡과 산성 마을 그 자체가 힐링이다.
“여긴 가든만 있지 모텔은 없는데?”
대형 가든 식당만 있어 모텔은 보이지 않아 그녀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 보세요. 분위기 죽이는 곳이에요.”
골짜기의 개울길을 따라 올라가자 고즈넉한 한옥 건물들이 넓은 주차장 주변의 정원 관리가 너무 잘 되어 있었다. 마치 투어에 힐링하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여기요.”
택시가 멈추자 내렸다.
“여긴 모텔이 아니잖아.”
“한옥 한정식당요. 분위기 죽이죠?”
생각했던 것과 달라 실망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식사하고 모텔로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저쪽 작은 기와집 방으로 예약해 두었어요.”
여러 채의 기와집들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예약이라, 좀 의아해했다.
“서윤은 어떻게 이런 곳을 다 알아?”
“남자친구가 예약했어요.”
“남자친구라면 같이 사는….”
“네. 신랑이라고 하면 이상하려나. 아무튼 걔가 예약했는데 엄마와 같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엄마라, 그녀의 어머니라는 것인가. 왜 이런 자리에 내가 와야 하는지, 여러 가지 의문을 안고 발걸음을 놓았다. 그녀의 젊은 남자와 그녀 어머니의 식사 자리라. 그녀와 나 단둘이 아니라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가 앞에 걷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기와집 방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그 방 안에는 옆모습의 중년의 여자와 젊은이가 얼핏 내 눈에 들어왔다. 젊은이는 그녀와 동거하고 있는 남자일 테고, 여자는 옆집 그녀의 엄마일 터다.
출입문이 열려 있는 입구에서 방에 들어가기 위해 구두를 벗으려고 약간 허리를 굽히려는데, 젊은이가 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영민이….”
기가 막혀 나도 몰래 말을 씹어 삼켰다. 옆집 서윤이가 동거하고 있다는 남자친구가 내 아들 영민이란 말인가. 너무 놀라 가슴이 아파지면서 숨을 쉴 수가 없어 혼절한 사람처럼 나는 아들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신이 아득해지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방 안에 있던 여자가 인사하려는지 일어서면서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이게 또 누구인가. 그 여자였다. 자동차로 나를 다치게 했던 박시원 그 여자였다.
내 머릿속에서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박시원도 나를 보고 놀라서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박시원 그 여자 때문에 차에 치었고, 교도소 다녀왔고, 이혼하게 되었다. 요괴한테 홀린 것처럼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를 말리는 것 같아 나는 모른 체, 못 본 체 몸을 돌렸다.
“서윤이 너, 뭐 하는 짓이야!”
옆집 그녀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님으로 모셨는데 왜 그러세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버님.”
“이렇게 하려는 의도가 뭐야?”
“의도라면, 저희들 위해서 결합요.”
“결합? 네 엄마와?”
“아니요. 어머님과 재결합요.”
재결합, 재결합이라면 이혼한 아내와 재혼을 말하는 것인가.
“그래, 알았다. 나 담배 한 대 피고 진정되면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 있어.”
“어머님도 오시고 계셔요.”
엄마가 아닌 어머님이라. 뭐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재결합? 재혼? 이혼 이후 재결합이면 아예 이혼하지도 않았다. 이혼 후에 여러 가지로 괴롭고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래서 누구의 잘못이 있든 없든 이혼은 막았어야 했다.
옆집 서윤은 이미 다 알고 나에게 접근했던 것 같았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녀를 어떻게 한번 해 볼까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죄스러워 부끄럽기도 하고, 그들이 있는 방에 들어갈 자신도 없거니와 나를 내쫓아낸 이상 재결합은 없다.
나는 본동 건물 계산대에 가서 택시를 부르려 했다. 때마침 택시가 들어왔다. 그 택시가 멈추자, 타기 위해 다가가는데 뒷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내리고 있었다. 여인이 내리기 무섭게 나는 택시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택시는 움직여 떠나려 했다.
“영민 아빠?”
여자 목소리다. 영민 아빠라고 하면 바로 나였다.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나는 택시 기사에게 어서 떠나자고 했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 여인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