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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아버지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연주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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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꽃과 사람을 하나씩 말해 보자.”
한때 나는 신학기가 되어 첫 수업에 들어가면 간단한 내 소개와 함께 습관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일 분가량 생각 시간을 준 뒤 무작위로, 그러나 전원 한 녀석씩 일으켜 세워 발표의 기회를 준다. 그러면 매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꽃은 ‘장미’고 사람은 ‘여친’이다. 그리고 그 숫자도 압도적이다. 어떤 녀석들은 여친 대신 숫제 여친의 이름을 대기도 한다. 그러면 으레 곁가지가 붙는다. “○○학교에 다녀요” “이뻐요” 혹은 “헛물 켜요” “차였대요” 등등. 그렇게 한바탕 시끌벅적, 낄낄거림 속에 모든 이의 발표가 끝나면 나는 그제야 손에 든 교과서를 펴 든다. 아니, 펴 드는 척한다. 그때쯤이면 꼭 물어오는 녀석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공부가 환장하게 싫은 골통들이다.
“쌤은요?”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씩 웃곤 문제의 정답을 공개하듯 담담하게 대답한다.
“할미꽃! 아버지!”
나의 대답에 교실은 또 한 번 뒤집어지고 녀석들은 비로소 내 별명이 왜 ‘변태’인지를 이해한다. 내 별명이 언제부터 ‘명태’에서 ‘변태’로 바뀌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 대답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그즈음의 아이들은 ‘변태’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변태를 사전에 찾아보면 ‘①본디의 상태가 변해서 달라짐. 또는 그런 상태. ②동물이 알에서 부화해서 성체(成體)가 되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하는 일. ③식물의 뿌리·줄기·잎 따위가 본디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변해서 그 상태가 종(種)으로 고정되는 일. ④정상이 아닌 성욕이나 그로 인한 행위. 또는 그 성욕을 가졌거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 등으로 풀이되어 있다. 우리 세대는 ‘변태’ 하면 십중팔구 ④를 떠올린다. 그러나 아이들은 훨씬 광의적으로 해석해 생각이나 스타일이 독특한 사람을 뭉뚱그려 ‘변태’라 부른다.
그래서 나는 그 별명에 별 거부감이 없었지만, 아내는 아니었다. 어쩌다 내 별명을 귀동냥하게 된 아내가 어느 날 정색해서 따졌다.
“당신 별명이 변태라면서요? 도대체 학교에서 무슨 짓거리를 했기에 애들이 그런 끔찍한 별명을 붙여요?”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해도 소용없었다. 아내는 학생들의 눈은 정확하고 정직하다며 혹시 술집이나 노래방 같은 데서 이상한 짓 하다 들통난 게 아니냐고 몰아세웠다. 이러다 아내의 머릿속에 굳어 있는 그 ‘변태’의 이미지로 낙인찍힐까 봐 나는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한심한 표정의 아내가 이죽거렸다.
“도긴개긴이라더니, 당신이나 아버지나 참….”
물론 아직도 그 별명의 꼬리표를 완전히 떼지 못하고 있다. 아내의 강압적인 요청에 굴복해 그 질문을 안 한 지가 꽤 되었는데도 말이다. 뭐든 한 번 붙으면 떼기가 쉽지 않은 게 꼬리표인 모양이다. 사립 교사의 비극이다. 그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집에서도 나를 그렇게 부른 녀석들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 번은 쉬는 시간에 교재 연구를 하고 있는데, 내 반 녀석의 어머니가 진학 상담차 나를 찾아왔다. 그 학모는 출입문 옆에 앉아 있는 선생님께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낭랑하게 말했다.
“변태 선생님 뵈러 왔는데요.”
전달받은 선생님은 큰 소리로 웃지는 못하고 키득거리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상담이 끝난 다음에야 나의 구차한 해명으로 그 별명의 유래를 알게 된 학부모는 귓불까지 빨개져 거듭 사죄하며 이렇게 변명했다.
“저는 선생님 존함이 변 자, 태 자, 되시는 줄 알았어요. 정말 죄송해요.”

 

내가 그 질문을 처음 던진 건 십오 년 전쯤이다. 내가 막 결혼해 학교 근처 아파트로 분가해 살 때였다. 토요일 오후였는데, 아버지가 다짜고짜 우리 삼형제를 본가로 호출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하다 명퇴한 아버지는 그 무렵, 낙향해 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며 기거하고 있었다. 본가는 보름에 한 번꼴로 밑반찬이나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올라오는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좀처럼 먼저 우리 삼형제에게 전화하는 일이 없었다. 굳이 전할 말이 있으면 어머니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러기에 뜬금없는 아버지의 전화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후에 잠시 다녀가거라. 같이 안 와도 된다.”
전화는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러곤 뭘 물어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어머니께 전화했더니 어머니도 깜깜나라였다. 내 전화를 받고는, 아무래도 죽을병이 든 모양이다,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거 보니까… 하며 황당해했다. 나와 판박이 전화를 받은 큰형과 작은형도 황당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엄명이니 열 일을 제쳐두고 본가에서 보자고 약속했다.
“도대체 뭔 일인데, 갑자기 부르신대? 꼭 가야 돼?”
아버지의 호출 명령을 전해 들은 아내는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내의 불만은 당연했다. 모처럼 별러 영화 한 편 보고 연애 시절에 가끔 가던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먹을 참이었는데, 그 환상이 무참히 깨어졌으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을 총동원해 아내를 달래고 얼른 다음에야 어렵사리 현관을 나설 수 있었다.
내가 허겁지겁 본가로 갔을 때, 큰형과 작은형은 벌써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어머니는 주방에서 우리의 따분함을 달래줄 군것질거리를 찾느라 부산했다. 내가 거들어 주려고 다가가자 용케 배 하나를 찾아낸 어머니가 그걸 깎으며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투로 구시렁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죽을병은 아닌 것 같다. 죽을병이면 나한테 먼저 귀띔했을 텐데…. 아마 약초 캐러 갔다가 너희들께 줄 산삼이라도 캔 모양이다. 안 그러고야, 뜬금없기는….”
우리는 어머니가 깎아 내놓은 배와 구운 오징어를 앞에 놓고 아버지의 호출 이유를 두고 난상 토론을 벌였지만, 이거다 싶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온다는 아버지는 기약 없고, 그렇다고 인내심 부족을 타박할까 봐 전화해 볼 수도 없는 난감하고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무료함을, 큰형은 아버지의 방에서 책장의 책들을 훑어보며 작은형은 철학 교수답게 뒷짐 지고 베란다를 바장이며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검색하며 견디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를 들고 나온 큰형이 급하게 나와 작은형을 소집했다. 그러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아냈다. 족보다.”
“족보요?”
작은형과 내가 거의 동시에 복창했다.
“그래. 새로 만든 족보를 한 질씩 나눠주시려고 우릴 부르신 거다. 작년 추석 때 그러지 않았느냐. 시대에 맞게 현대적 감각으로 새로 제작한 대동보가 내년쯤 나올 거라고.”
듣고 보니 그런 생각이 났다. 더구나 어릴 때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던 큰형이 고심 끝에 제시한 해답이니 믿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먹다 남은 배 조각과 구운 오징어가 놓인 다탁 앞으로 둘러앉았다. 아버지가 왜 늦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삼 아버지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격하며 큰형이 펼쳐놓은 옛날 족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구세주 큰형이 출제한 족집게 예상 문제를 중심으로. 시조와 중시조는 물론, 우리의 직계 할아버지인 8대조부터 휘(諱)와 배위(配位) 성씨, 그리고 혹시 몰라 산소 위치까지…. 그렇게 완벽히 학습을 마치고 득의양양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마침내 현관문이 열렸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자주색 보자기로 싼 무엇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황급히 일어나 아버지를 맞았다. 아버지는 들어서자마자 주방 식탁 위에 제법 부피가 있는 보자기를 내려놓고 정수기의 물부터 한 컵 마셨다. 그러고는 우리 앞으로 보자기를 들고 오며 말했다.
“이걸 찾아오느라 좀 늦었다. 앉아라.”
“그게 뭔데요?”
새 족본가요? 라고 물으려다 그러면 김이 새버린 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내가 에둘러 물었다.
“그걸 말할 참이다.”
아버지는 내가 기특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러곤 보자기의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정체를 드러낸 건 뜻밖에도 직사각형 액자였다. 4단으로 개킨 액자 속에는 붉은 꽃 세 송이가 어우러져 수줍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누가 봐도 금세 알 수 있는 할미꽃이었다.
“이거 할미꽃 아닌가요?”
실망한 큰형이 묻자 아버지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맞다. 네 할머니다.”
“예?”
놀란 우리가 허공에 부산히 눈빛을 섞으며 동시에 소리쳤다.
“이걸 하나씩 나눠줄 테니 집에 걸어놓고 출필곡반필면해라.”
아버지는 마치 시범을 보이듯 거실 벽에 붙어 있던 할머니의 사진을 떼어내고 그 액자를 걸었다. 그러곤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편히 쉬세요, 어머니. 진작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가래 같은 무엇이 끼어 있었다.
일순, 집 안의 분위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질식할 것 같은 공기에 짓눌린 우리는 무얼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뚱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도 저녁을 지으려고 쌀을 씻다 말고 양손으로 싱크대를 짚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우리는 아버지가 준 액자 하나씩을 받아 들고 조용히 집을 나왔다. 단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 앞에 우리는 얼이 빠져 있었다. 층계참의 공기는 한여름처럼 텁텁했고, 15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한없이 느리게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속에 우리만 남게 되었을 때 큰형이 가만히 말했다.
“일단 아버지 말씀대로 하자. 그다음 문제는 내가 시골에 다녀온 뒤 의논하자.”
옆구리에 액자를 끼고 현관으로 들어서자 아내가 갑자기 호출한 까닭을 물었다. 나는 대꾸 없이 끼고 있던 액자를 거실 콘솔 위에 내려놓았다. 반짝 호기심을 드러낸 아내가 신문지로 싼 액자를 잽싸게 열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한 표정이었다.
“웬 건대?”
“아버지께서 거실에 걸어두래.”
“이걸?”
“그러면 복이 들어오나 봐.”
나는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어 그렇게 둘러댔다. 아내가 반대하면 어쩌나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아내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일부러 불러서 줄 정도면 그만한 까닭이 있겠지, 뭐. 알아서 해.”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내의 칙칙한 얼굴이 구름에 씻긴 보름달처럼 밝아 보였다.
그때부터 우리 집 거실 벽에는 그것이 걸리게 되었다. 그동안 이사를 다섯 차례나 다녔지만, 옛날 선조들이 그랬던 신줏단지처럼 그걸 빼먹은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거기에 할머니의 혼이 서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상황에서 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고, 무엇보다 그 무렵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모여 숙의 끝에 약속했었다. 출필곡반필면은 하지 않더라도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만은 그렇게 하자고. 큰형이 시골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고 온 직후였다. 큰형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고, 너무 몰랐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버지는 심신이 아주 건강하시다.”
물론 지금도 그 액자는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그새 남매가 태어났고, 그 아이들이 자라 중학생이 되었지만, 그것은 옛날 모습 그대로 우리 집을 지키고 있다. 아이들은 모른다. 그 액자의 내력을. 애들은 숫제 관심도 없다. 나 역시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애써 무시했다. 간혹 애들이 그게 눈에 들어오면 지나가는 말투로 묻기는 한다. 그것 대신 다른 걸로 바꿔 걸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저 사진 누가 찍은 거냐고. 그러면 나는 짓궂게 되묻는다. 누굴 것 같냐고.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약속이나 한 듯 제 엄마를 돌아본다. 제 엄마가 한때 사진 동호회에 가입해 주말마다 사진 찍으러 다닌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 시선을 의식한 아내는 펄쩍 뛴다.
“내가 찍은 거 아니야. 아무려면 내가 저 정도 수준밖에 안 되겠니.”

 

할미꽃 사건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우리 집 제사였다.
할머니는 그 사건이 있기 삼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팔십 평생을 시골집에서 살았다. 그동안 아버지가 여러 차례 모시고자 했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손사래 쳤다. 아파트가 노고지리 통 같아 단 하루도 살기 싫다고. 할머니의 태도가 완강해 결국 한 번도 모시지 못했다.
할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가 그 집을 지키기 위해 36년 6개월 봉직하던 교직 생활을 접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우리 앞에서 하소연하듯 말했다.
“교장보다 그 집이 더 중한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손톱도 안 들어간다.”
어머니의 의도는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서서 만류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해가 안 되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아버지는 교감 4년 차였고, 이듬해 교장 승진이 유력했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우리 삼형제는 날을 잡아 시골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이미 명퇴 마음을 굳히고 방학을 이용해 집 수리차 시골집에 내려가 있었다. 든든한 두 동생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큰형이 우리를 대표해 설득에 나섰으나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큰형의 논리 정연한 설득에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학교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간다. 그러나 이 집은 나 없으면 몇 년 안 가 무너진다. 이 집이 어떤 집이냐. 우리 집안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집 아니냐. 집은 사람의 온기로 호흡한다. 너희들 말대로 정년 뒤로 미루면 이 집은 이미 회복 불능의 식물 상태가 되고 말 게다. 그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 같으면 이 애비가 몇 년 뒤에 식물인간이 되어 산소 호흡기 달고 병원에 누워 있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설득하러 갔다가 되레 설득당하고 돌아왔다. 우리의 시골행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던 어머니도 큰형의 설득 불가 판정에 곧장 현실을 인정했다. 어머니는 변호사인 큰형이 안 되면 천하의 누구도 안 된다는 걸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굳은 얼굴을 풀고 이렇게 속을 다스렸다.
“갑자기 죽어 산에 누워 있는 것보다 그게 백배 낫다. 수고했다.”
우리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정식으로 이사하고 한 달 뒤 아버지를 뵈러 시골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침에 집을 나서서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배낭을 메고 돌아왔다. 우리가 출발할 때 전화했고, 도착하자마자 다시 알렸음에도 아버지는 무심했다. 뒷집에 사는 재종숙모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내려온 뒤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온종일 산에 묻혀 산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버지가 단순히 집을 지키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웠고, 동시에 존경스러웠다.
“왔구나. 잠시 기다려라. 저녁 해주마.”
배낭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마치 온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그새 구릿빛으로 그을려 딴사람 같았다. 세숫물을 떠와 손과 얼굴을 씻은 아버지는 된장국을 끓이고 손수 채취한 산도라지의 껍질을 벗겨 잘게 찢은 뒤 살짝 데치고 무쳤다. 요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전에는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고 주방에는 얼씬도 안 하던 아버지였다. 우리는 아버지가 몇 가지 밑반찬과 함께 간소하게 차린 4인용 두리반에 둘러앉았다. 저녁을 먹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다들 바쁘고 힘들고 하니 올해부터는 제사를 저녁제로 바꿨으면 한다. 그러자면 기일을 하루 늦춰야 하니 잘 기억해 뒀다가 늦지 않게 참석하도록 해라. 그때는 나도 일찍 올라가마.”
갑자기 제사 문제를 언급하기에 앞으로 제사는 여기서 모셨으면 한다고 폭탄 선언할까 봐 잔뜩 긴장했던 우리는 말씀을 다 듣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에 감격하며 난생처음 아버지가 차려준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손수 채취한 산채 보따리를 하나씩 선물 받아 홀가분하게 돌아왔다.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의 제사를 그렇게 별탈 없이 지내왔다. 아버지는 약속대로 당일 오전에 올라와 제사 준비를 관장했고, 어머니와 두 형수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하루를 제물 준비에 바쳤다. 우리 삼형제는 마침맞게 참석해 가정의 화합과 우애를 다지곤 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애초의 우려가 현실이 돼버린 것이다.
“올해부터 제사를 시골집에서 모시기로 했단다. 살다 살다 이런 일도 다 있네. 모르긴 해도 네 조모가 할미꽃으로 변신해 단단히 선몽한 모양이다. 안 그러고야 그 성질에 그럴 턱이 없다. 막내 아기가 복이 참 많다.”
할머니의 제사를 보름가량 앞둔 어느 날, 불쑥 전화한 어머니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퇴근한 내게 아내도 비슷한 분위기로 말했다. 아내에겐 그해가 처음 맞는 제사였다.
“아버님이 생각보다 엄청 사려 깊고 현명한 분이시네. 그런 건 자기도 좀 배워.”
누구보다 먼저 반기를 들 줄 알았던 어머니와 아내가 쌍수를 들어 환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시골집으로 장소를 바꾸면서 그동안 부부 동반 ‘필참’에서 ‘선택’으로 문턱을 낮춰버린 것이다. 말이 ‘선택’이지 그건 안식구들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시그널이었다. 그것보다 더 반색할 일이 또 있었다. 앞으로 제수품은 아버지 자신이 준비하겠노라고 자청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제물 자청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 확인 전화를 드렸을 때, 아버지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시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시골집에서의 첫 제삿날, 우리 삼형제가 내 차로 아버지가 데드라인으로 설정한 시간에 맞춰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벌써 제물을 진설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설된 제물이 접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소박하고 간소했다. 그리고 우리를 경악하게 한 건 지방 대신 사용하던 사진이 아니라 예의 그 할미꽃 액자였다. 우리가 뜨악해하자 아버지가 천연스레 말했다.
“놀랄 것 없다. 저번에 말하지 않았느냐. 그때는 세세히 말하지 않았다만, 제일 큰 꽃은 네 할아버지고, 중간 것은 네 큰아버지고, 작은 꽃이 네 할머니다. 혼백이 빠진 사진보다야 백배 낫다. 그리고 올해부터 제사를 합제해 모시기로 했다. 기일이 엇비슷하니 그렇게 모셔도 그다지 섭섭해하시지는 않을 성싶다.”
그 말을 할 때는 영락없이 아버지의 정신세계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어색하고 불편함 속에 제사를 모셨고, 그런 제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아버지께서 할미꽃 사진을 해마다 새것으로 갈아 끼운다는 걸.

 

“네 할머니는 갓 스물에 가난한 우리 집으로 시집왔느니라. 말씀에 따르면 그래도 근동에서 소문난 반가인데 그렇게 가난한 줄은 몰랐다는구나. 시집 온 첫날, 아침을 지으려고 쌀독을 열어보니 쌀톨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없더란다. 첫날인데 시부모께 아침 진지를 아니 해 올릴 수도 없고 생각다 못해 바가지를 들고 뒷집을 찾아갔는데,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는구나.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지. 그래도 그 방법뿐이니 마음을 달리 잡숫고 찾아갔다는구나. 대문이 닫혀 있으면 어쩔꼬. 노심초사하며 찾아가니, 뜻밖에도 대문이 빼꼼히 열려 있더란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든지 말을 다 옮기지 못하겠다더구나. 그래도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주뼛거리고 있노라니 안에서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들어오시게’ 하는 아낙 목소리가 들리더란다. 그 소리에 용기를 내어 들어가니 안어른께서 바가지에 쌀을 퍼 담아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가 네 할머니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는구나. ‘올 줄 알고 있었네. 어려워하지 말고 이걸 가져가 시어른 밥을 지어 드리게.’ 그 공을 평생 못 잊고 살았더란다.”
제사를 모시고 음복할 때면 아버지는 우리들 앞에서 할머니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네 할머니는 갓 스물에 가난한 우리 집으로 시집왔느니라”였다. 우리는 매년 반복해 들으면서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진지한 앉음새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그러면 아버지는 조선시대의 전기수처럼 유장하게 얘기를 이어 나갔다. 대개 한 시간 정도 걸렸고, 얘기가 끝날 즈음엔 아버지의 얼굴은 주기로 검붉고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 마치 우리가 큰 죄나 지은 듯이 움츠러들곤 했다.
아버지가 유달리 할머니에게 애착을 가지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할머니는 체구가 작았다. 키는 150cm가 될까 말까, 몸무게는 채 40kg이 안 되었다.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그런 체구로 어떻게 모진 세월을 이겨내셨는지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할머니는 형제를 두었다. 둘째인 아버지는 유복자였다. 아버지를 잉태했을 때 6·25가 터졌고, 그해 할아버지는 징집되어 집을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떠난 지 반년 남짓한 이듬해 전사 통지가 왔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고단한 세월이 시작되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느덧 물기에 젖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육아, 가사, 생계를 오롯이 네 할머니가 책임졌다는구나. 궁벽한 시골에 품팔이할 거리나 제대로 있나, 생각다 못해 장삿길에 나섰다는구나. 두 형제를 걸리고 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이고 이 장 저 장,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해거름에 돌아오면 손가락 꼼짝할 힘조차 없었다는구나. 겨우 시어른 진지를 해 드리고 나면 방 안에는 또 길쌈과 삯바느질이 기다리고 있었다는구나. 그래도 그건 시름을 잊게 해 줘서 괜찮았다는구나. 정작 못 견딘 건 시어른의 의심이었다는구나. 형제를 두고 야반도주라도 할까 보아 밤에는 문고리에다 자물쇠를 채웠다는구나. 밤중에 똥이 마려워도…. 그러구러 키운 자식을….”
이 대목에 이르면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가 앉아 있기 민망할 정도로 아버지의 얼굴은 눈물로 흥건했고, 우리가 번차례로 따라준 술잔만 묵묵히 들기만 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그러구러 키운 큰아버지는 보병 수색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사랑하는 지아비와 자식을 나라에 바친 셈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큰아버지의 전사 통지를 받은 할머니가 죽으려고 목을 매기까지는 했으나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떠올라 끝내 뛰어내리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 말씀을 할 때의 아버지는 거의 울먹이듯 어깨를 떨었다.
“…그런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고, 그렇게 돌아가시게 했으니 내 죄가 크다.”
아버지의 장광설은 그 말을 끝으로 끝났다. 그러면 대개 밤 열 시가 넘었고, 그때야 우리를 쫓아내듯 어서 가라고 다그쳤다. 우리는 아버지가 싸 준 음복 제물을 싸 들고 차에 오르면 꼭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하고 나온 것처럼 가슴이 공떴고, 자연스럽게 의문의 옭매듭이 풀렸다. 아버지가 왜 시골집 제사를 선언했고, 어머니와 안식구들을 ‘필참’에서 ‘선택’으로 변경했는가를.

 

아버지가 할미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데는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할머니는 여든에 돌아가셨다. 그때까지 할머니는 비교적 건강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이 할머니의 생신이었다. 생신날과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잡아 우리 가족들은 매년 미리 준비한 음식들을 싸 들고 시골댁을 방문하곤 했다. 그 무렵의 나는 미혼이었고, 부모와 함께 본가에서 살았다. 오전 아홉 시쯤 큰형과 작은형 가족이 본가에 도착하면 어머니가 미리 준비해 둔 음식과 그릇들을 나누어 싣고 출발했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선두로 큰형, 작은형 차가 마치 식전 행사의 퍼레이드하듯 달려와 차례대로 마을회관 앞 공터에 도착하면 마을 사람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맞이하곤 했다. 마을 사람들 속에 물론, 할머니도 계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속속 차에서 나오는 우리 삼형제를 일일이 껴안으며 반겼다. 삼형제에 둘러싸여 백여 미터 남짓한 집으로 걸어 들어갈 때까지가 할머니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처럼 보였다. 그날은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그 마을에는 할머니 또래가 유독 많았다. 여남은 명이나 되는 할머니 친구들은 온종일 마을회관에서 먹고 마시며 가무를 즐겼다.
그해도 그랬다. 팔순이라는, 의미가 남다른 생신이라서 그런지 그해에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느 해보다 고양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술을 많이 드셔 얼굴이 홍시처럼 붉었고, 부끄럼이 많아 여간해서 부르지 않던 노래도 불렀다. 할머니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하는 <봄날은 간다>였다. 그 노래를 부르실 때면 갑자기 지난날의 한과 비애가 한꺼번에 솟구치는지 늘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해에는 누가 청하기도 전에 자청해서 불렀고, 간드러지게 살짝살짝 어깨춤도 추었다. 그리고 기어이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 삼형제를 마을회관으로 불러내어 여러 어르신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 음치인 어머니는 끝내 노래 대신 덕담으로 숙제를 마쳤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십팔번 <울고 넘는 박달재>를, 우리 삼형제는 분위에 걸맞지 않은 <고향의 봄>을 합창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신명이 많은 줄 몰랐다. 할머니는 우리들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좌중을 휘젓고 다니며 어깨춤으로 흥을 부추겼다. 그날은 기분이 한껏 좋아진 아버지가 주량 이상의 술을 마셔 좀처럼 맡기지 않은 자동차 키를 내게 맡겨야만 했다. 무사히 하루의 임무를 마치고 우리 삼형제가 본가의 거실에 둘러앉았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여태껏 지켜보았지만, 나도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구나. 더도 덜도 말고 앞으로 딱 열 번만 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먼.”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의 기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늦저녁에 재종숙모가 급하게 전화했다. 고사리를 꺾으러 갔던 할머니가 여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침나절에 친구들 셋이랑 갔었다고 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꺾다 말고 각자 하산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할머니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그 소식을 접한 우리는 급히 서로 연락을 취해 큰형 차로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로 내려갔다. 도착했을 때는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온 사방이 캄캄한 어둠으로 짓눌려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득달같이 내려오긴 했으나 막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없었다. 마음을 졸이며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을 애면글면 갈망하는 기원뿐.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할머니는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밝자 지구대에 실종 신고한 다음 본격적으로 찾아나섰다. 휴대폰을 소지하고 계셨으면 위치 추적이라도 가능했겠지만, 그 무렵에는 휴대폰 보급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고 불행히도 할머니는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함께 간 두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산속 일대를 톺았으나 할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음 날부터 마을 주민, 지구대와 면사무소 직원의 도움까지 받아 산속 일대를 찾아 헤맸으나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우리는 점점 지쳐갔고, 그만큼 절망의 부피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날 볼 때마다 노래하듯 그러시더니 소원대로 되신 모양이다.”
실종된 지 보름을 훌쩍 넘기자 마침내 아버지가 말했다. 차마 그 말을 하기가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았는데, 아버지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랬다. 할머니는 우리들 앞에서도 노래하듯 읊조렸었다.
“이 할미는 니 할배, 큰아배한테로 갈 때가 되면 니들 고생 안 시키고 미련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살짝이 가버릴란다.”
결국 할머니는 그 소원대로 늦가을에야 등산객에 의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도린곁 바위틈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애틋한 부부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어 일명 ‘부부바위’라 불리는 그 바위는 실종 지점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할미꽃 미스터리는 작년에야 풀렸다. 작년 합제 때도 우리 삼형제는 내 차를 이용해 시골집으로 갔다. 그날도 아버지는 제사를 모신 뒤 음복하며 “네 할머니는 갓 스물에 가난한 우리 집으로 시집왔니라”로 시작되는 할머니의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처음 듣는 것처럼 진중한 앉음새로 귀를 열고 있었고, 아버지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마다 큰형부터 돌아가며 따른 술잔을 들며 잠시 회한에 잠겼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변함없이 한 시간가량 지속되었고, 아버지의 얼굴도 주기로 붉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쯤 슬쩍 벽시계를 보기에 이제 말씀을 마치시려나 보다 하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느닷없이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듯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꼭두새벽이었니라. 오줌 누러 깼다가 다시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직도 그 장면이 어젯밤 꿈처럼 선하구나. 내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거기로 올라가니 네 할아버지와 할머니, 큰아버지께서 그 바위 앞에 마치 가족사진을 찍듯 나란히 앉아 있더구나. 그래서 내가 그랬다. 왜 이러고 계세요?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어서 내려가십시다. 그러니까 네 할머니께서 그랬다. 야야, 우리 집이 여긴데 가긴 어딜 간다 말고. 곧 소낙비가 쏟아지겠다, 우리 걱정 말고 어여 내려가거라. 네 할머니께서 하도 매몰차게 다그쳐서 더는 잡죄지 못하고 돌아섰니라. 너희들도 알다시피 네 할머니의 체구는 작아도 소리통이 좀 크냐. 내려오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인사를 안 드리고 온 거라. 그래서 인사나 하고 내려오려고 다시 올라가니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네 조부모와 백부는 온데간데 없고 할미꽃이 어우러져 피어 있더구나.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이더라. 하도 꿈이 선명하고 이상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에멜무지로 거길 더듬어 찾아갔니라. 설마, 설마 했는데 참말로 꿈에 본 그대로 할미꽃 세 송이가 나란히 붙어 피어 있더구나. 아직도 그게 거짓말 같다.”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눈을 감고 침묵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늦었구나. 어서 가거라” 하고 독촉할 때에야 우리는 최면에서 깨어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재촉에 우리는 서둘러 비닐봉지 하나씩을 들고 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별이 소복이 떨어져 있는 주차 마당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아버지를 향해 큰형이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외쳤다.
“아버지, 때 거르지 마시고 잘 챙겨 잡수시고 오래오래 건강하십시오. 내년에 또 뵙겠습니다. 그 전이라도 시간 나면 자주 찾아뵐게요.”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그럴 것 없다. 내 걱정 마라. 그리고 일어서기 전에 말하려 했는데, 깜박했구나. 내년부터는 나 혼자 조용히 모실 테니 내려오지 마라. 시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그만하면 손자, 조카 몫은 했다.”
아버지의 느닷없는 폭탄 선언에 나는 시동을 거는 것도 잊은 채 멍청히 앉아 있었다. 그건 비단 나만의 충격은 아닌 듯했다. 큰형과 작은형도 제 귀를 의심하듯 머리를 갸웃한 채 마네킹처럼 굳어 있었다.

 

우리는 그날 밤, 수백 년 이어온 계주의 마지막 주자를 역사적 현장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 같아 선뜻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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