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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빨간 볼펜으로 글을 쓴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전병호

아동문학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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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이십대 후반이 된 나는 몹시 초조해졌다. 스물여덟 이전에는 꼭 신춘문예에 당선하겠다는 나의 결심은 어쩌면 이룰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안 돼!’ 하면서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다그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사람이 『현대시학』에서 시 1회 추천을 받은 것을 보았다. 충격이었다.
『현대시학』은 나에게 어떤 문예지인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점심을 굶으면서도 돈을 아껴 사서 읽던 시 전문지였다. 매월 초가 되면 서점에 달려가서 『현대시학』을 사들고 경전을 펴듯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도 그 무렵의 문단 소식이며, 누가 기억할 만한 작품을 발표했는지 다 꿰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두근두근 가슴 설레게 하는 시 추천작을 몇 번씩 읽고 분석하고 외우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심사평도 가슴에 새겼다. 혼신을 다해 갈고 닦은 시어가 구슬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추천작을 읽는 희열이란!
지금이야 이름도 알 수 없는 문예지가 헤아릴 수도 없지만 그때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문예지가 불과 몇 권이 안 되었다. 『현대문학』과 『월간문학』이 있었고, 『현대시학』과 『시문학』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중에 『풀과 별』이 창간되었다. 등단하려면 5개 문예지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야 했지만 그때 나는 문예지 추천보다는 신춘문예 당선을 꿈꾸었다.
필자는 이 무렵에 『월간문학』과의 인연도 있다. 갑자기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라서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펑펑 눈 내리는 하늘을 한없이 올려다보다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한 편 썼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죽음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니까 심적 충격이 매우 컸다. 그때 쓴 작품을 『월간문학』 신인상에 응모했더니 결심에 올랐다. 동시도 써서 보냈는데 그것도 결심에 이름이 올랐다. 가능성을 확인한 것 같아 기뻤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긴 침체기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하자 나의 신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실업자가 되었다. 다행히 모교 교수님이 추천해 주셔서 신문사에 가서 어설픈 기자 생활을 했고 또 교육연구원에 가서 ‘충북교육신문’ 발행 업무를 맡아 보았다. 대학 시절, 교지 제작을 담당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제천의 깊은 산속에 있는 시골 학교 선생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제천에는 시인 박지견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일요일이나 휴일이 되어 그 다방에 가면 제천문학회 회원들이 몇 분은 꼭 나와 계셨다. 박지견 선생님은 언제나 지정석에 앉아 계셨고, 박지견 선생님을 중심으로 회원들이 둘러앉아 속주머니에서 습작을 꺼내 보여드리면 선생님은 꼼꼼히 읽고 작품평을 해 주셨다. 그게 벌써 45년 전이다.
그때 제천에서 만난 분들은 내가 곧 고향 청주로 돌아갈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제천문학회에 가입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다. 하지만 문학 행사가 있으면 알려 주셔서 열심히 참석했다. 김준현 스님이 주지로 계신 송화사에 가서 『제천문학』 동인지 발간 기념회를 열었던 일, 의림지 뒷산 무덤가에서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인 김동현(김기종) 시인 첫 시집 출판 기념회가 열렸던 일 등 크고 작은 많은 행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자 제천문학회에 가입을 권하셨다. 그때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이름을 갖고 싶어 전가호라는 필명을 썼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분들, 박지견 선생님, 김준현 스님을 비롯하여 홍석하 시인, 정승민 시인…, 그분들과 이십대의 나는 20∼30년 나이 차가 났는데도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 정운엽 시인, 신갑선 시인도 지금은 돌아가셨다. 그때가 그립다.
그때 나는 항상 빨간 볼펜으로 글을 썼다.
‘나는 모든 글 가운데 피로 쓴 것만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프리드리히 니체의 이 말을 좋아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피로 시를 쓰기를 원했다. 나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시대를 민감하게 호흡하며 살아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것은 마음뿐, 현실은 감옥 같은 산속에 갇혀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갑갑했다.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갈망은 컸지만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쓴 소주를 넘기며 절망을 씹고 씹었다. 변화를 위한 결단이 필요했다.
그때 나는 신규 교사였다. 밤새워 책 읽고 시 쓰고 이튿날 아침 일찍 학교로 달려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신규! 신규! 하면서 무슨 업무는 그리 많이 떠넘겼는지, 하루에 하늘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퇴근 후의 시간도 내 것이 아니었다. 교장과 선배 교사들의 뒤를 따라 이 술집, 저 술집으로 끌려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 같은 신규 교사는 술집에 가는 것이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술 시중 들기 위해 가는 것이었다.
1년쯤 지나니까 이렇게 살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분들과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나는 생활 방식이 같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젊었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우선 칼퇴근을 하기로 했다. 당시 칼퇴근한다는 것은 법 조항 속에나 있는 말일 뿐 실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정시 퇴근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다. 그렇다고 토요일, 일요일도 마음 놓고 쉴 수 있지 않았다. 수시로 없는 일을 만들어 불러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따돌림과 불이익도 꿋꿋이 극복해 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이렇게 결심한 나는 다음 날부터 퇴근 시간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벽장으로 올라갔다.
아침이 되어 벽장에서 기어나와 학교로 달려가고 학교에서는 종일 교장과 선배들이 쏘아대는 눈총에 맞아 비틀거리다가 퇴근하면 다시 집으로 달려와 벽장으로 올라갔다. 몸은 고달펐지만 비로소 내가 내 마음먹은 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해에 지방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가작 당선했다. 그것이 내 목표일 수는 없었다.
다시 1년이 지났다. 감기처럼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1년간 쓴 작품을 모아 보니 뿌듯하기는커녕 한숨만 났다. 나도 감동시키지 못하는 작품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까? 나는 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렇게 또 1년.
1981년 12월 하순이었다. 제천시청에 가서 그때 한참 깃발처럼 나부꼈던 ‘사회정화’니 뭐니 하는 연수를 받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였다. 우체부가 전보를 들고 교실로 찾아왔다. ‘이게 뭐지?’ 하면서 전보를 펼쳐 든 순간 나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축 당선, 당선 소감 원고지 5매와 인물사진 한 장 약력 등을 23일까지 우송 바람 동아일보 문화부.’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묵은 앨범을 펼쳐 보았더니 전보에 이렇게 쓰여 있다. 한참 좋아하다가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어떤 장르에 당선되었는지 몰라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나는 시와 동시를 함께 응모했었다. 담당 기자가 동시라고 했다. 선생 생활하면서 나도 모르게 산골 아이들의 삶이 내 삶에 들어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43년이 넘도록 나는 동시 창작에 몰두해 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동시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평생 동시를 쓴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날 나는 자꾸 겨드랑이 밑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날개가 돋아나느라고 그런 것일까? 나도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을까? 내 속에서 누가 자꾸 이렇게 물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빨간 볼펜을 꺼내 들여다본다. 그래. 글은 피로 쓰는 것이다. 어찌 한순간인들 나태해질 수 있겠는가. 지금이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세상이 되었지만 빨간 볼펜을 꼭 쥐고 쓰던 그 마음은 결코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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