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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묵상(默想)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정원(김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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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짧아졌고 밤은 길어졌습니다. 차려입은 여인보다 화려했던 장미는 염천(炎天)의 뜨거운 태양 아래 온몸으로 받아냈던 피의 향기를 갈 바람에 실어 어디로 보내는지 알 수가 없는 계절입니다.
찬란했던 여름의 노을이 황홀지경 벅찬 가슴 물들였다면 석양이 구름을 만나 붉음을 토해 내는 가을의 노을은 머뭇거리며 계절이 두고 가는 흔적 앞에서 들숨과 날숨이 사라진 먹먹한 가슴으로 멈춰집니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 되어 존재감 상실 꼴사나운 내 모습이 보여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질어서 상대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고, 몰라서 주었다는 것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내가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짧은 판단으로 상처를 받았을 때도, 내 삶에 녹아 있는 시고도 떫은 마음의 방지턱이 만만치 않게 높은 것은 스스로 품어낼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마음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이럴 때는 거친 바람과 파도를 맞서 이겨내는 유능한 항해사의 경험과 열정과 지혜가 세상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부러움입니다. 삶의 허들이 끝없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환상에, 살아온 나잇값도 못하는 두려움을 이른 아침 산책길 낙엽 냄새로 치유하는 계절입니다.
아직도 마음속 깊은 곳 빼내지 못한 가시 같은 것들이 무수히 박혀 정오의 사이렌 같은 울림이 목젖까지 올라오는데 스스로의 상처 알아서 꿰매는 아픔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까치발 걸음걸음 숨죽여 내딛는 소리는 나만 들리는, 타인에게는 의미 없는 작은 소음일 뿐이라는 걸 압니다.
필름의 감광지처럼 빛을 받아 반사할 수 있는 얼룩 없는 언어의 삶을 갈구하면서,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이 가벼이 날아 어디서든 뿌리박고 잘 살아냈으니 고맙다 내 인생! 두 팔 벌려 외치는 자존이 넘치는 소리는 누군가에게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곳이든 밀려나지 않으려고 아파도 버텨낸 그 흔적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나의 지문이 “나”라고 증언해 줄 테니까요. 고찰의 처마 밑 풍경이 물고기라서 푸른 하늘 바다 되어 주니 경전을 이고 지고 않더라도 맺어진 인연들에게 절로 수행이 되는 계절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져 한평생을 살고 있는 한 남자와는 세월이 희석되어 애증의 관계로 변했습니다. 그 한 남자와 그의 주변과 뒤섞여 흘러간 세월을 나는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 남자야말로 ‘나’로 인한 피해자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나만 옳고 그들은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극복 못한 내 역할에 그는 잃어버린 시간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스쳐 가는 부끄러움으로 자리 바꿈해 보는 평생 곁지기에게 고마움을 덮는 미안함의 고해성사입니다.
배 아프게 낳아 수명을 헐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자식들은 내가 경험치 못했던 다른 세상을 살면서 각자 비밀의 문을 만들어 닫혀진 그 공간은 세대 차이라는 가림막에 어떤 힘으로도 열려지지가 않습니다. 민들레 홀씨 대물림받아 어디든 날아간 자리마다 낯설지 않게 뿌리박고 잘 견뎌내는 삶을 살아내는 고마운 자식들 향한 내가 품은 절절한 짝사랑은 바라 앞에 그리는 흔적 없는 그림입니다.
태산은 한 줌 흙도 사양하지 않아 그 높이를 이루었고, 황하는 한 줄기 시냇물도 가리지 않아 그 깊이를 이루었다지요. 들숨과 날숨의 공존 속에 마지막 한 호흡 남을 때까지 태산의 높이와 황하의 깊이를 한 뼘도 이루지 못할 인생이라 떠나보내는 계절과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 주는 무게감은 거친 사막을 걷는 낙타의 생존과 닮았습니다. 주변의 가시나무를 씹어 입 안과 혀에서 피를 내어 그걸 삼키며 걷는 사막의 낙타 발자국마다 생존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내는 生의 경건함에 뉘라서 삶의 치열함을 희화화할 수 있겠는지요.
땅에 떨어진 은행나무의 노란 은행 한 알이, 파란 하늘 아래 감나무 꼭대기 까치밥 감 한 개가 가을이 깊어짐을 알려 주기 시작하면, 단풍이 들기도 전 말라버린 잎들은 바람에 떨어지고, 남아 있는 모세혈관 같은 가지에서 가을과 겨울의 고난 없이 봄과 여름의 영광을 누릴 수 없음의 교훈도 얻습니다.
가을의 침묵이 언어를 잃은 겨울을 만들면, 봄은 수행으로 여름의 뜨거운 깨달음을 만들어내는, 원형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가을은 윤회가 시작되는 계절입니다.
신(神)으로부터 살아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다시 부름을 받는 그날까지 나의 生은 가을과 겨울 사이를 오가며 봄과 여름 사이 허물 거두어 공덕으로 환원하길 나에게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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