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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바라보아야 보인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경훈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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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가르는 뿌연 박명이 이름 모를 섬의 자태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반짝이는 불빛 사이로 바다에 오른 배가 보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세히 보지 않으면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도록 나아가고 있지만, 방향만은 제대로 알고 있다는 자부심 섞인 흐름이다.
그 앞 낮은 건물 사이로 일찍 깨어나온 새 한 마리가 공중에 획을 그으며 날아간다. 힘찬 하루를 살아내려는 첫 몸짓이겠다. 쉼 없이 전진하는 배와 날카로운 새의 비상을 바라보는 제주 3일째 아침의 풍경에 대한 단상이다.
문득 찬란하게 다가오는 새로운 기운이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것 같다. 나도 다시 전진하며 날아야겠다. 비록 오랫동안 멈춰진 채 낡아져 속도를 낼 수 있을지 두렵지만, 작은 움직임을 시작으로 일부러 뚜벅거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 한 걸음씩 나아가야겠다는 소망이 일고 있다.

 

국토의 어디든 소중하지 않은 곳은 없다. 어느 지역이든 주어진 환경에서 각자의 삶을 일구며 살아냈기 때문이다. 우리의 땀과 숨결이 쌓이고 모여 현존하는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제주도는 그런 땅의 한 조각이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발길을 내딛는 곳마다 특이하다. 산은 산대로, 육지는 육지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환호하게 하는 신비가 있다.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 느낌을 표현하자면 마치 아들 여럿 있는 집의 고명딸처럼 어여쁘고 곱다.
산의 색깔과 모양새 속에는 각각의 설화들이 아기자기하게 숨겨져 있다. 거기서 자생하는 식물 또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니 신기하고 멋스럽다. 표시 나지 않는 장식을 살짝 가미한 것 같은 길거리의 자연스러움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 자꾸 두리번거리게 된다.
이렇듯 고혹적인 보물들이 그득한 제주도에 올 때마다 나는 매번 새로움과 만난다. 더러는 익숙하고, 어느 때는 시치미를 떼는 것 같은 변화로 낯설게 등장하는 이곳을 동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껏 제주도를 방문할 때면 나는 그저 무연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관광을 했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일별하거나 관찰하는 것, 그리고 영혼을 담아 깊이 바라보기가 그것이다. 깊이 바라보는 것은 이해를 위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감춰져 있던 개체로부터 본질을 파악하고 거기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한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자칫 간과할 뻔한 진실을 발견하여 기어코 끌어내는 것이다.
올해 4월에 JDC 도민 지원사업 제주 지역 문화 탐방에 참여했다. 그리고 눈으로 보이지 않던 제주도의 실체를 알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영혼을 담아 깊이 바라보기를 했던 까닭이었기에 큰 의미가 있었다.
제주도는 풍경이 아름답고 분위기가 이국적이며, 잔잔한 평화를 주는 따뜻함의 대명사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깊이 바라보니 역사 속에는 민족의 아픔이 뚜렷하게 담겨 있었다. 근대 문화기행으로 들른 아뜨르 비행장에서의 해설과 현장의 목격은 과거와 현재의 광경이 영사기를 통해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론으로만 접했던 4·3 사건의 비극적인 잔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나 회피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진실을 알았으니 이제는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 현시대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안타까운 과거일지라도 내가 속한 국가의 일원으로서 감당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책임감을 통증과 함께 떠올린 것이다.
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근처에서 해설을 듣다가 답답한 심정으로 무심코 올려 본 푸른 하늘에는 비행기가 떠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흰색의 비행운이 명암을 달리하며 길게 이어졌다. 비행기 바로 뒤편에는 가늘고 선명한 비행운이 보였고, 비행기가 멀리 나갈수록 긴 자국을 남기면서 연하게 번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리고 연해지면서 결국 사라져 가는 것이 비행운이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곳에 이르면 비행운이 서서히 사라지듯, 우리가 겪은 애증의 역사도 언젠가는 비로소 마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다시는 민족의 고통이 반복되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책임과 의무를 갖되, 지난날의 기억을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문화탐방의 마지막 한 시간 정도는 바다와 만났다. 모래 수를 셀 수도 있을 것 같은 맑은 바다는 조용히, 때론 거세게 존재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멀리서 밀려와 현무암들을 향해 출렁이는 파도의 끊임없는 구애는 시선을 멈추게 했다.
‘당신을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형용사밖에는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고은, 「제주의 D단조」 부분). 제주 바다를 표현한 시구가 아니더라도 거대하고 투명한 바다는 감탄사를 절로 자아냈다. 그곳에는 이번 문화탐방에서 벗으로 내게 스민, 삶의 열정과 문학에 진심인 내가 사는 곳의 문인들이 함께했다. 별다른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감사하고 유쾌했다.

 

모든 것이 다시 오지 않을지라도 충분하게 헤아려 본 제주에서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안타까운 역사 현장에 핀 봄꽃들과 초록의 나무들이, 이중섭 생가 주변의 무대에서 울려 퍼지던 어느 작가님의 열창과 바굼지 오름에서의 뿌듯한 땀방울이, 가랑비 뿌리던 천지연폭포의 장관과 추사관의 현학적인 분위기들이 파노라마 되어 펼쳐진다.
이 모두를 깊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또한 강하게 각인되었으리라. 오고 가는 시간 속에서 예견할 수 없는 어려움이 복병처럼 나타날지라도 꿋꿋하고 거뜬하게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충만해진 가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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