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관계 다이어트

한국문인협회 로고 윤옥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조회수34

좋아요0

“당뇨네요.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잘 챙겨 드시고 3개월 뒤에 뵙겠습니다.”
당뇨 진단을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내가 당뇨까지 걸렸구나’가 아니었다. ‘왜 저렇게 혼내는 것처럼 말하지?’였다. 당 수치가 기준치보다 얼마나 높게 나온 건지, 앞으로 당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려줄 줄 알았다.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의사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나오니 간호사가 처방전을 건넸다. 병원 근처 약국으로 향하며 결과지를 살펴봤지만 알아챌 수 있는 정보라고는 내 당화혈색소 수치가 6.6%라는 사실뿐이었다.
건강검진 이후 매일 아침 약 먹는 일에 약 한 알이 늘었다. 지난해부터 먹기 시작한 혈압약과 고지혈증 약에 더해진 당뇨약 한 알. 처음엔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당뇨 진단을 받기 전 해 가을, 늦은 취업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인지 혈압이 200까지 올라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그때부터 내 신경은 온통 ‘혈압’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뇨 진단과 더불어 서울의 큰 대학병원으로 안과 진료까지 다니게 되면서 내 관심사는 ‘당뇨’로 옮겨갔다. 혈압약은 평생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웬 일인지 당뇨약은 먹기 싫었다. 당뇨약을 끊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바로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처음 시작은 호기로웠다. 먼저 식단 조절을 시작했다. 짜거나 맵게 먹는 것을 조심하고 탄수화물 섭취를 줄여 나갔다. 현미와 잡곡, 닭가슴살, 흰살 생선으로 냉동고를 채웠고, 양배추, 당근, 방울토마토는 박스 단위로 구매했다. 서너 가지의 버섯을 사서 말리고 유산균과 견과류를 쟁여 두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무게는 조금씩 줄어드는 듯했지만, 냉장고 안은 오히려 다이어트 전보다 물건이 더 많아져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빨리 상하고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식품들을 제때 먹어 치우는 일은 전혀 호기로울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다이어트는 3개월이 지날 무렵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다음 정기검진에서 당화혈색소 수치가 0.1밖에 낮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 달간의 노력이 칭찬이라는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뇨 진단받은 사람 중에 다이어트로 당뇨를 이기는 사람은 100명에 4명 정도뿐이에요. 식단 조절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하루 30분이라도 걷기 운동을 해 보세요.”
여상하지만 그래도 지난번 진료 때보다는 조금 더 온화하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담당의 덕에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했다. 회사 가까운 피트니스센터에 들러 6개월 운동을 등록했다. 마음 같아서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운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약속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여러 모임의 일원이었으며, 그 안에서 책임감 있는 일을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에 2∼3일은 모임과 약속이 있었고 그것은 내 다이어트의 천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내 안의 요인은 단순했다. 아침마다 당뇨약을 먹기 싫다는 것. 약이 쓴 것도 크기가 큰 것도 아닌데 타원형으로 생긴 모양새가 꼴보기 싫었다. 마치 부루퉁한 얼굴로 ‘그동안 너 잘못 살아온 거야’라고 질책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힘든 다이어트는 계속되었다. 약속이 없는 날 저녁은 단백질 음료 한 잔으로 대체했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8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체중은 15킬로그램 정도 줄어 있었다. 그때서야 겨우 기준치를 밑도는 당뇨 수치와 당화혈색소 수치가 나왔다. 이제 드디어 약을 끊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잠시, 담당의사는 여전히 3개월 치의 당뇨약을 처방했다.
“지금 복용하고 있는 당뇨약은 초기 당뇨 치료뿐 아니라, 당뇨 예방에도 효과가 있는 약이에요. 다이어트는 평생 해야 하는 거 아시죠?”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계속되는 식단 조절과 운동은 내게 몇 가지 깨달음을 주었다. 첫 번째는 담당의가 허언을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뇨 수치를 기준치 밑으로 끌어내리고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워서 ‘100명 중 4명’이라는 데이터가 납득이 갔다. 나는 아직 4명 중 한 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몸무게는 15킬로그램 이상 빠지지는 않더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직장 동료들이 “요요는 안 와요?”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요요는 택배가 아니에요. 내가 주문하지 않으면 절대 안 옵니다”라는 농담을 주문처럼 던지곤 했다. 그리고 가장 큰 깨달음은 삶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허리둘레만 줄어든 줄 알았는데 짜증, 불안, 무기력 같은 정서적 군살도 함께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는 불필요한 것들이 참 많았다. 사람 관계, 습관, 생각까지도 군더더기가 가득했다. 괜히 비교하면서 우울해하기 일상이었고, 필요 이상으로 책임감을 떠안고 살았으며, 안 해도 될 걱정을 하느라 마음이 늘 무거웠다. 그러던 삶이 먹는 것을 줄이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모임이 간소화되고 저녁 먹는 일도 간소화되니 냉장고도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덕분에 전기세와 식비도 줄어 가정 경제까지도 다이어트가 되었다. 저녁 시간에는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을 보기보다는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며 머릿속도 비워 나갔다. 그렇게 ‘관계 다이어트’와 ‘생각 다이어트’가 되면서 인생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이어트를 흔히 ‘예뻐지기 위해’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뻐지면 좋다. 거울 볼 때 기분도 좋다. 하지만 나에게 다이어트는 그런 사소한 만족이 아니다. 이건 생존이며, 생명이고,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다. 매일 혈당을 확인하며 칼로리를 먼저 계산하는 삶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다이어트는 줄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혈압약과 당뇨약 주변으로 각종 건강보조식품들이 컬렉션처럼 몸집을 부풀려 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