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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와 독일마을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한나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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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4월 중순, 대구에 사시는 친척 언니가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셨다. 4월 25일 진주여고 100주년 개교 기념일에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 시 한 편을 낭송할 예정인데 딸인 내가 골라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 모교인 진주여고 후배 되는 분과 직접 이 일에 대하여 서로 소통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두꺼운 시전집을 들춰 보기도 하고 내가 아는 몇 편의 시를 생각해 보다가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는 시 「여명의 바다」를 골라서 그분에게 보내드렸다. 그리고 5월 중순쯤 어머니 소천 1주기를 앞두고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고 부산 외삼촌 댁에도 들를 것이라고 알려 드렸더니 그럼 남해에도 들러 그분이 운영하시는 펜션에 묵으라고 초청하며 바다가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는 멋진 펜션 사진을 카톡으로 몇 장 보내 주셨다.
내가 세 살 때 어머니가 남해에 있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셔서 그곳에 잠시 살았었지만, 그 당시 첫 남동생이 태어났다는 어렴풋한 기억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이상 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5월에 한국에 나가면 남해에 가서 하루 묵겠다고 답장을 보내드렸다.
한국에 가서 부산에서 하루 묵은 후, 여동생 부부와 함께 자동차로 진주에 들렀다가 남해에 도착하니 17시 반경이었다. 어머니 후배 되는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으며 방으로 안내해 주셨다.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가 바로 눈앞에 바라보이는 환상적인 방이었다. 우리는 탄성을 질렀다. 일출을 볼 수 있는 방이라고 하였다. 방에 여행 가방을 갖다 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갖가지 반찬이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었다. 종일 준비하신 것처럼 미나리나물, 버섯볶음, 톳나물, 호박전 등 정성이 가득 담긴 반찬들이 상에 가득했다. 아드님이 직접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고기로 볼락회를 만드셨다고 했다. 반찬마다 담긴 정성을 한 입 한 입 음미하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였다. 게다가 아침 식사로 전복죽을 끓여 주시겠다고 하셨다. 최상의 식단이었다. 오전에 부산에서 진주로 떠나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때 다시 남해에 도착한 꽉 찬 일정으로 피곤하였던 몸과 마음이 탁 트인 바다 야경을 바라보며 힐링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전복죽으로 영양식을 먹었다. 시와 시조, 수필을 쓰면서 30년 이상 블로그에 글을 올리신다는 그분은 요리 솜씨도 일류급이었다. 독일에서부터 가지고 간 내 시집 두 권과 수필집 한 권을 선물로 드렸다. 그분도 3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이 살아계실 때 함께 이집트 여행을 하고 나서 펴낸 사진집 등 책 세 권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그날 남해를 떠나기 전에 오래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남해 독일마을을 방문한다고 했더니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하셔서 함께 자동차를 타고 제부가 차를 몰았다. 독일마을로 가는 중간에 500년 이상 되었다는 남해 천연기념물인 ‘남해 창선로 왕후박나무’를 지나게 되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왕후박나무는 후박나무보다 잎이 더 넓고 뿌리를 깊게 내리며 해안가에서 잘 자라서 바람을 막기 위해 주로 해안가에 심는다고 한다. 얼핏 멀리서 보면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울창한 잎사귀로 덮였는데 높이가 9.5m나 되고 밑동에서부터 가지가 11개로 갈라져 뻗어 있는 우람하고 청청한 나무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나무 아래 쉬어 갔다고 해 ‘이순신 나무’라고도 불린다고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남해 독일마을 입구에는 ‘Deutscher Platz(독일 광장)’이라고 쓰인 성문이 세워져 있었다. 성문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큰 마름모꼴의 바윗돌이 놓여 있었다. 태극기와 독일 국기가 양쪽에 새겨져 있고 굵은 글씨로 ‘독일마을’이라고 새겨진 아래에 안내 글이 쓰여 있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1960년∼1970년대 우리나라!
가족 부양을 위해 머나먼 독일로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떠났던 젊은이들… 조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 당신들의 땀과 눈물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2015년 7월 16일

 

그리고 독일마을에 정착한 1세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 4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남해군은 한국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기를 원하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해 2001년에 약 3만 평 부지에 독일식 주택 40여 채를 지었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 희망의 불빛을 따라 독일에 간호사와 광부로 떠났던 분들이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여생을 보내려고 이곳으로 돌아와 인생 2막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독일 광장 안으로 들어가니 바로 정면으로 ‘남해 파독 전시관’이라고 쓰인 건물이 보였고, 그 옆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태극기와 독일 국기가 바닷바람에 펄럭이며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파독 전시관은 독일 광부와 간호사의 삶과 애환, 그리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간절함을 담아낸 공간이라고 한다. 이 전시관 안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광산이나 병원에서 사용하던 착암기와 램프 등의 물품과 소지품,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고 파독의 배경과 애환의 과거, 남해 독일마을에서의 새로운 인생 2막 이야기가 담긴 영상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전시관 앞에는 갱에서 곡괭이로 석탄을 캐거나 석탄을 실어 나르는 파독 광부들 모습과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조각한 하얀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을 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먼 독일로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되었던 분들과, 그들이 고국에 대한 향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눈물로 이겨 내며 월급의 80% 이상을 고국에 보내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만든 파독 전시관은 지난 60여 년 한국 디아스포라 역사의 한 현장을 옮겨 놓은 소중한 역사 체험관이다. 지난 2017년에는 파독 광부, 간호사 추모 공원도 이 독일마을에 조성되어 파독 근로자들이 고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독일마을은 푸르른 바다 색깔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독일식 주택 지붕의 주황색이 잘 어울려서 마치 동화에 나오는 마을처럼 보였다. 이 마을에는 독일식 수제 맥주, 소시지, 독일식 족발을 파는 상점들과 독일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많고, 독일처럼 10월에 맥주 축제가 열려서 ‘한국 속의 작은 독일’을 이루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몸과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는 휴양 도시이며 한국에서 독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남해! 독일에 자라고 있는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도 언제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모국에 와서 남해에 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찻집에 들어가 각각 향기로운 유자차, 시원한 독일 맥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그분을 다시 펜션으로 모셔다 드린 후, 남해의 청정한 바다 한 자락을 가슴에 품고 길을 떠났다. 남해에 살 때 두 살, 세 살이었던 여동생과 나는 60여 년이 넘어서 남해를 방문한 추억 한 자락까지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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