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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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은 평안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을은 하루의 노동을 끝낸 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평안이다. 고개 하나 돌아 마상천 둑길에 들어서면 홍시의 붉음보다 더 붉은 그림을 흘려놓고 서서히 지상의 아쉬운 작별을 남기고 멀어진다. 뒤이어 오는 붉은 해는 형제봉 사이를 넘어 손톱만큼 남기다가 꼴깍 저물어 가면서 하루의 이야기를 모두 안고 돌아간다.
그 모습이 눈이 시리도록 평온하여 몇 날을 서성이며 마상천 둑에 앉아 기다렸다. 붉은 노을 속으로 소를 끌던 농부도 가고, 듬성듬성 보이는 낮은 지붕의 마을 그림자도 돌아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집집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의 연기로 올망졸망 모인 가족의 꽃불잔치가 시작된다.
슬프도록 아름다웠던 노을 한 자락이 지나간다.
여고를 다닐 때다. 야간 자율학습이 있던 날 옆짝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늘 붙어 다니는 나에게 물었지만 ‘별 얘기가 없었다’라고 했더니 집에 가보고 오라고 했다. 저녁으로 넘어가는 햇살은 따가웠고 먼 거리가 아닌 친구의 집은 그날따라 십 리 밖에 있는 것처럼 멀어 보였다. 아버지의 사고로 말수가 줄어든 그 아이와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거리를 쏘다니며 함께 다녔다. ‘어제도 그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 작업을 같이했는데 어쩐 일일까.’ 터벅터벅 걷다가 대문 가까이 와서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았다.
짙은 보라 물감을 막 쏟아놓은 것 같은 노을이다. 그 형상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고 신비했다. 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고, 비단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의 모습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수백 마리 새 떼들이 몰려가는 모습 같기도 하고 서쪽 하늘에서 펼쳐진 축제에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친구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 아이는 연탄가스에 취하여 병원을 다녀왔다고 했다. 얼마 후 졸업을 얼마 앞두고 그 아이는 이사를 가고 소식이 끊겼지만 한동안 보랏빛 노을은 떠난 친구의 모습처럼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물러 있었다.
새해 첫날 노을을 만나러 갔다. 긴 행렬은 해 뜨는 동해로 몰려와 찬란한 윤슬 물결을 이루었다. 그 물결 속에 끼어 기다림의 노을을 만났다. 해 뜨기 전 바다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지난해 묵은 상처를 씻어 내며 성스러운 의식을 준비하며 다가선 노을은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연인의 얼굴이었다. 비밀스러운 첫발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설렘과 긴장으로 마주 선 연인의 모습이다.
눈부신 해가 조금씩 솟아오르고 노을이 서서히 소멸해 가자 나도 멈추었던 긴 숨을 토해 내며 쓸쓸한 이별을 고했다. 노을에 목마른 나는 아쉬운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노을’을 읊으며 노을 속에 잠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