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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한 조각

한국문인협회 로고 임옥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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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버스는 가락시장역 3번 출구 쪽으로 머리를 튼다. 버스는 미끄러지듯 서서히 인도 쪽으로 바짝 붙여 정차한다. 문이 활짝 열렸다. 청소년인지 성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연령층의 남녀 십여 명이 주르르 내린다.

 

“선영아, 안녕.”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들은 척만 척, 본 척만 척 빠른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간다. 잠실역 가는 아래쪽 계단으로 행진하듯 정면을 주시하며 집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내려간다. 나도 재빠르게 뒤따라붙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고는 내려갔던 계단으로 다시 올라왔다. 대화역 가는 방향 2-2 탑승구 앞에서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하철을 기다린다. 여기까지는 미리 준비된 프로그램대로 실행되는 사이보그처럼 행동한다. 선영만의 패턴이다.
키는 훤칠하고, 짧은 단발머리, 우윳빛 피부를 가진 모습은 여느 스무 살짜리 아가씨처럼 건강미가 넘쳐흘렀다. 청바지에 진달래색 점퍼를 입고 하얀 운동화는 봄빛처럼 화사하다. 어깨에 걸친 청바지 색깔 천 숄더백은 젊음의 상징처럼 무척 잘 어울렸다. 사람의 마음마저 아름답게 하는 봄 패션이다.
“새 옷 입었네. 참 예쁘다. 엄마가 사 줬어?”
이 말이 끝나자마자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물어뜯는다. 손톱 주변의 살갗이 살쾡이가 앙칼지게 물어뜯은 것처럼, 손톱 주변은 선홍빛 피가 땀방울처럼 삐질삐질 나온다. 그 피를 핥고 있는 괴이한 행동에 가슴이 쿵쿵 요동을 친다. 새 옷 입은 것이 예뻐서 한마디 한 것인데, 뭘 잘못했나. 바투 다가가 점퍼의 지퍼를 약간 위로 올리면서 옷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물었다. 내 손을 뿌리치며 눈동자는 허공에 머물렀다. 투명인간이 된 듯 손발이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옷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가. 햇빛의 농도에 따른 나른한 몸 상태 때문인지 발걸음이 제자리에 놓이지 않았다.
선영 어머니와 커피숍에서 처음 만나서 면담했을 때였다. 늘 푸른 특수학교 학생이며 자립 생활할 수 있는 수업과 스트레스 관리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고 하였다. 폭식하는 버릇이 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해한다고 했다. 자해라는 말에 예리한 커트 칼로 동맥을 끊는 모습이 떠올랐다. 몸이 조건반사를 일으키며 움찔댔다. 눈치 빠른 어머니는 살짝 미소를 던지며 흉기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생님 말씀은 잘 따를 거라며 안심시키려는 몸짓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의 진한 하늘색 블라우스 색깔이 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어머니 눈에 반사되었다. 하늘색으로 가득한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딸의 자해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은 눈빛이다. 어떤 자해일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내 직업은 활동 보조원이다. 말 그대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 활동할 때 보조하는 직업이다. 어쨌든 앞으로 최고의 활동 보조원이 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충만하고 최선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다. 봉사가 아닌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일주일에 두 번 화·목요일에 가락역에서 선영이 집까지 데려다주는 단순한 일이다. 4대 보험에 가입되며 월급으로 받는 액수는 30만 원에서 40만 원이다. 친구들은 적은 돈이라 하지만, 시간과 하는 일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다. 물론 아직 특별한 사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영은 자폐증과 지적 장애도 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병증이다. 어쩌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는 종현이가 때려서 아프다며 얼굴을 만질 때도 있고, 쓱쓱 문지르기도 한다. 얼마나 억울한 생각이 들었으면 종일 중얼거릴까. 내 입에서 ‘쯧쯧’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혀 차는 소리에 놀라 손으로 얼른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활동 보조원 공부할 때 혀를 차면 안 된다는 말과 더불어 가엾게 보지 말라고 하였다. 비장애인같이 한 사람의 인격체로 보라고 했다. 선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중얼거려서 목이 마르고 에너지도 많이 소비될 것이다. 어머니는 생수를 얼려서 항상 가방 속에 넣어주고 음료수 값은 손지갑에 넣어서 특수학교로 등교시켰다. 선영에게는 물과 손지갑이 필수품이듯, 나에게는 메모장과 필기도구가 필수품이다. 가끔 돌발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활동 보조원 생활이 시작되고 달포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실역 가는 방향에 있는 자판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숄더백에서 손지갑을 꺼내더니 다시 넣는다. 투명한 플라스틱 안에 진열된 음료수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톡톡 쳤다. 어떤 음료를 선택할까? 하는 행동이다.
“음료수 마시고 싶어?”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판기를 주먹으로 두어 번 격하게 쳤다.
“왜 그래, 왜 그래! 말을 해.”
기물 파손과 더불어 몸에 상처라도 생길까 봐 겁이 덜컥 났다. 손에 상처가 나면 이것도 자해라고 할 수 있겠지. 자해라는 말이 머릿속에 껌딱지처럼 달라붙어서 꽤 신경이 쓰였다. 육중한 자판기는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켰다. 자판기 두드리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멍이 나 상처는 보이지 않아서 다행한 일이다. 어휴 하는 소리가 한숨처럼 새어 나왔고, 등줄기에서 땀이 끈적거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이다. 내 손을 뿌리치고 승객들 틈에 벌러덩 나자빠지듯 승하차 바닥에 드러누웠다. 몸은 좌우로 흔들며 ‘사줘, 사줘’ 구호처럼 부르짖으며 뒹굴고 있다. 승객들은 ‘저 아가씨, 왜 저렇게 하고 있어?’ 하는 표정으로 몸을 슬슬 피하면서 시선은 호기심과 의구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본다. 음료수 하나 뽑아 주면 금방 해결될 텐데 하는 비난의 시선이 내 몸에 차갑게 닥지닥지 달라붙었다. 뭇사람들로부터 이유 없는 몰매를 맞은 기분이 이런 것일까. 도대체 왜 이럴까. 덩치 큰 선영을 일으킬 수도 없고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발길로 한 대 탁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발길로 찬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최고의 활동 보조원이 이런 것도 해결 못 한다면 처음부터 시작할 일이 아니지.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애는 개선될 수 있으나 낫지 않는다는 말이 딱 맞았다. 이용자의 행동에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 상황에서 음료수 하나 뽑아 주는 것이 최선의 길이 될 수도 있다. 아무 곳에서 벌렁 드러누워서 떼쓴다고 음료수를 뽑아 준다면 나쁜 버릇만 길러 줄 것이다. 아무 곳에서 뒹굴면 안 된다는 확실한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는 보호자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강요하면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해서도 안 된다. 어디까지나 활동 보조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무가내식 행동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전화하였다.
“음료수 자판기 앞에서 뒹굴고 있어요.”
“아이고, 오늘 깜빡하고 음료수 값을 못 챙겼어요. 음료수 하나 뽑아 주시면 계산은 한꺼번에 하겠습니다.”
내 지갑 안에는 신용카드 한 장과 특수학교에서 만들어 준 출퇴근 카드만 달랑 들어 있었다. 자판기는 카드를 사용할 수 없고, 현금이 필요했다. 주변에는 현금 지급기도 없었다. 일단 달래고 구슬려 보았다. 어느 집 개가 짖느냐 하는 식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또 한 번 투명 인간이 된 듯 벽에 대고 혼자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떤 일이든지 한 번 하고자 하는 일은 해결될 때까지 고집을 부린다. 고집이라기보다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이 없다. 지금까지 과정을 말없이 지켜본 어떤 청년이 음료수 하나 뽑아 선영에게 건넸다. 그제야 벌떡 일어나서 중얼거리며 음료수를 받아 마셨다.
집에 갈 때마다 습관적으로 경보 대회에 출전하듯 따라붙었다. 우리는 동시에 자판기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듯 음료수 하나를 우아하게 터치한다. 자판기 속의 음료수는 쿵 하며 밑으로 떨어진다. 신속하게 꺼내 단숨에 들이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이라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탈탈 털며 들이켰다. 늘 심각하던 얼굴이 만족감으로 희미한 웃음 같은 것이 번졌다.
“빈 깡통은 반드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 알지.”
자판기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버렸다. 방금 한 행위에 대해서 등을 쓰다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 말 한마디에 교육적 효과가 컸다. 요즘 들어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것을 확실히 익힌 것이다. 이용자가 변해가는 모습에서 하는 일에 보람을 느꼈다. 행진하듯 내려왔던 계단으로 다시 올라왔다. 대화 방향 정확히 2-2 앞에서 지하철을 기다린다. 지하철 탈 때는 길라잡이인 양 꼭 2-2에서 타는 것이 참 신기하게 보였다. 왜 그런가? 늘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첫 칸은 접촉 사고나 급정거했을 때 어쩐지 사고의 위험성이 클 것 같고, 2-2는 같은 글자라서 외우기도 좋고, 다른 칸보다는 덜 복잡하여 꼭 이 자리에서 타라고 일러줬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가르쳐 준 자리를 융통성 없이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지하철이 멀리 긴 터널 속에서 뿌연 미세먼지를 헤치며 빠져나온다. 두 개의 불빛은 희망과 신비로운 빛을 발산하며 다가온다. 언제쯤 긴 터널 속의 불빛처럼 나와 눈을 맞출 수 있을까.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지하철이 우리 앞에 멈췄다. 항상 길라잡이가 되어 앞장서서 탔다. 실내는 한산하기까지 했고, 종현이가 때렸다고 계속 투정 부리듯 중얼거린다. 주변의 승객들이 우릴 힐끗힐끗 쳐다본다. 나는 승객들의 시선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다음 정거장에서 술 냄새 풍기는 아저씨가 탔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며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반응이 없는 선영을 본 취객은 더욱 화가 난 모습으로 ‘귀먹었느냐’며 충혈된 눈으로 다시 크게 소리 질렀다. 이번에는 한 대 칠 듯이 손을 번쩍 쳐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몸을 던지다시피 끼어들었다. 양팔은 옆으로 벌리며 몸으로 험악한 분위기를 막으려 했다.
“학생이 좀 아파요.”
“멀쩡하구먼, 어디가 아파?”
꼬부라진 혓소리로 침까지 튀기며 말한다. 취객은 나를 칠 듯이 노려본다. 작은 체구지만 담대하게 취객과 맞섰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덩치 큰 선영의 보호막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일까. 아니면 봉사 정신이 앞선 것일까. 봉사와 책임감 둘 다였던 것 같다. 취객의 눈에는 조그만 여자가 양팔 벌리고 막서는 꼴이 가소로웠는지,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며 나에게 시비를 걸어올 참이다.
“아저씨, 자꾸 이러면 경찰서에 신고할 거예요.”
내 귀에도 어떻게나 앙칼지게 들렸는지, 나도 놀랐다. 어쩌면 왜소한 몸집에 대한 열등의식이 나를 더욱 야무지고 단단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취객은 내 눈빛에 기가 눌렸는지,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다음 정차 정거장은 매봉역이라고 정중하면서도 차분한 목소리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우린 매봉역에서 내려 양재천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풍기는 커피 향기에 코를 벌렁거리며 잠시 걸음까지 멈추게 나를 유혹하였다. 그때였다. 전화벨 소리가 방정맞게 울렸다.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선생님, 아직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했어요.”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연장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선영과 함께한 시간은 무려 4년째로 접어들었다. 가족들과는 상당히 가깝게 지내던 터였다. 가끔 시간 연장을 부탁할 때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시간은 활동 보조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온통 비워 둔 시간이다. 내 나름대로 직업의식에 대한 긍지다. 우린 양재천 둑길로 들어섰다. 지난번에는 아치형 다리 아래 잉어 떼가 평화롭게 노니는 것을 보면서 집으로 갔었다. 지금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잎은 윤기를 머금고 있는 화단 사잇길로 걷고 있다. 우리는 행진하듯 걷다가 가끔 꽃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곤 하였다. 오월의 마지막 날 햇볕은 따갑기까지 하였다. 꽃의 요정들이 붕붕 날아다니며 햇빛과 바람으로 공기의 농도를 신선하게 만들고 있다. 아이리스 꽃 앞에 함께 쪼그리고 앉았다. 늘 초점이 없던 눈빛이 아이리스 꽃에 화살처럼 박힌다.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너무 놀라운 일이다. 나와는 눈을 전혀 맞추지 않았지만, 사물과 특히 꽃과 눈을 맞추고 꽃의 정령들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눈 감고 입술은 달싹이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종현이가 때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스트레스가 없어진 것일까. 꽃향기 안에는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는 신비한 어떤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훈훈한 바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 속에는 오월의 정령들이 몰려다니고 있는 듯하였다.
나도 아이리스 꽃잎에 코를 박고, 가슴속 깊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윽한 향기가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면서 막혔던 혈류가 뚫어지듯 몸이 나긋나긋해졌다. 아이리스가 전하는 메시지를 잠시 음미해 보았다. 사람이 생명을 이어가는 것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음식과 습관이다. 우리 몸을 망가뜨리는 것은 몸속에 쌓인 독성 때문이다. 자폐나 지적 장애를 가진 사람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없는 독성이 뇌의 한 부분을 망가뜨려서 도저히 복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리스 꽃 향기가 몸 안에 쌓인 독성을 조금이라도 없애 준다고 생각하니 몸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듯 기분이 상쾌하였다. 반투명 인간이 된 피로감에서 생기를 되찾고, 에너지 넘치며 굉장히 활력적인 사람이 된 듯하다. 이런 감정의 변화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옆으로 돌아보는 순간, 아차! 내 상상의 날개는 추락하였다. 선영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린 딸을 잃어버린 듯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절규하듯 이름을 부르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찾아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금마타리 꽃밭을 지났다. 주름제비난 꽃밭을 지나서 보라색 라벤더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몸의 조직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까이 가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꽃 참 예쁘게 생겼지? 냄새도 좋지? 나도 꽃향기에 취해서 네가 다른 곳으로 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네가 없어졌더라.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허둥거렸는지 알아? 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더라. 부르면 대답 좀 해라.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열이 올라서 뒤죽박죽 순서 없는 말을 장황하게 지껄이고 있었다. 대화는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끝나는 일방통행 대화이다. 지금 화가 난 것은 너 때문이야 하고 정당화하려는 무의식적인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화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남 핑계 대고 남을 탓하는 데서 오는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잠깐 소홀히 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상대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활동 보조원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이용자가 눈치채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할 사람이라면 활동 보조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어느 날 선영이 방 책상 옆 항아리에 말린 라벤더꽃이 수북하게 꽂혀 있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 라벤더꽃에서 자신의 방 향기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까? 나는 작은 향수병에서 나던 향기가 생각났다.
“향수병 가지고 있어?”
숄더백 속에 손을 넣고 더듬거린다. 다람쥐 모양 향수병을 꺼내 보여 준다. 눈동자는 허공에 머물고 있다. 선영은 꽃의 정령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해 들은 듯 얼굴에는 벚꽃 같은 화사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자판기 진열대의 음료수를 톡톡 치듯 라벤더 꽃잎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고 있다. 살짝 엄숙한 표정으로 꽃과 대화하더니 갑자기 어색한 조합을 이룬 언어들이 큰 소리로 마구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나는 긴장했다. 외부의 자극에 흥분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큰 소리로 중얼거리던 생각이 났다. 이 큰소리가 어떤 행동으로 당황스럽게 만들까? 신경이 곤두섰다. 자해란 손톱 물어뜯는 것만 아닌 것 같아서 늘 긴장하는 편이다. 다행히 손톱은 물어뜯지 않았고, 별다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음료수 사건 이후 몇 차례 엄지손가락을 물어뜯었던 일이 있기는 했다. 지금은 선영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 같다. 라벤더 꽃향기가 전하는 듯한 메시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두려움을 말끔히 사라지게 해 줄 것이다’라고 하는 듯했다. 라벤더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계속 조합이 어색한 언어로 대화하고 있다. 대화는 퍼즐 놀이에서 완벽하게 조각을 맞추어 가듯 순조롭게 이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영에게 준 라벤더 향수병과 항아리에 꽂혀 있던 꽃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도 이용자가 하는 행동을 비장애인의 잣대가 아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기암시를 시도하였다. 상대편 속마음을 알아내는 것도 내 역할이기도 하다. 꽃밭이 조성된 길을 지나서 돌다리가 놓여 있는 곳으로 왔다. 우리는 누가 명령하는 것처럼 양재천 돌다리 위에 우뚝 섰다. 선영은 기린 목처럼 기다랗게 뽑으며 물을 향해 흠흠 거린다. 두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비석처럼 서 있다.
“무슨 냄새가 나니?”
“물 냄새.”
“선생님도 한 번 맡아볼까?”
나도 코가 물에 닿을 정도로 바짝 갖다 댔다. 수많은 중얼거림 중에서 하나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물 냄새가 난다니, 지금까지 물 냄새를 모르고 살아온 터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과연 물 냄새가 있을까. 내가 아는 상식으로 순수한 물은 빛깔, 냄새, 맛이 없고 투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물에서 비린 냄새가 났다. 아치 모양 나무다리가 있는 상류에 잉어 떼가 모여 살기 때문인가. 무슨 냄새를 맡았을까. 정말 순수한 물은 냄새가 없지 않은가.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선영은 잡초가 무성한 물가 쪽으로 바짝 붙어서 걸었다. 좀 걷다가 우산을 아예 접었다. 걸음은 멈추고 막대기처럼 서서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비 냄새.”
비 냄새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아 다시 물었다.
“응, 비 냄새가 난다고?”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비 냄새가 어떤 냄새일까. 두 손으로 빗물을 받았다. 손에 받은 빗물에 코를 박고 흠흠 거렸다. 하기야 비 냄새가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금까지 비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비 냄새라는 말을 듣고 메마른 땅에 소낙비가 쏟아질 때 반드시 흙에서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냄새가 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비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냄새까지 끌어내는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비가 안 올 때는 흙 속에 어떤 냄새가 숨어 있는지 몰랐다. 단순히 흙먼지가 풀썩거린다는 생각만 하였다. 비가 내릴 때 감춰 두었던 본연의 냄새를 풍기는 특이한 현상까지 발견하게 되었다. 비는 다양한 사물을 매개체로 신통력이 일어난다. 예민해진 후각은 숨어 있던 냄새들까지 다 들춰내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비 냄새라고 할 수 있는가. 비가 내리므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듯이 나의 존재도 선영을 통해서 부각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물 냄새와 비 냄새를 맡고, 라벤더꽃 향기를 맡는 예민한 후각적 능력은 큰 놀라움을 주었고, 선영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돌다리를 건넜다. 둑 아래 주인과 산책 나온 뽀얀 마르티스가 코를 실룩실룩하며 선영의 뒤를 쫓아간다. 라벤더꽃의 그윽한 향기를 풍기는 것을 마르티스가 놓칠 리 없다. 얼굴에는 갑옷 같은 무게감으로 한 발짝도 옮겨 놓지 못하고 말뚝처럼 그 자리에 섰다. 눈치 빠른 개 주인이 얼른 개의 목줄을 잡고 바짝 끌어당긴다.
“김미숙, 너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엄숙하면서도 위엄이 들어 있는 말투였다. 개 주인의 딸이 주변에 있나 하여 사방을 두루 살펴보았다. 딸로 보이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개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어찌나 뚱한 표정을 지었는지, 개 주인은 어깨를 살짝 위로 치켜들며 “왜 그래요, 개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하는 몸짓이다.
“우리 막내딸, 이름이 김미숙이에요.”
개 목에는 하트 모양의 목걸이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목걸이에는 전화번호, 나이, 한 살, 이름, 김미숙이라고 쓰여 있었다. 웃을 듯 말 듯 표정을 지으며 “몇째? 한 박자 쉬고 따님이세요. 딸이 몇 분 계시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어정쩡하게 이렇게 묻고 말았다. 개 주인은 당당하게 말한다. 김미숙은 셋째딸이며 언니 둘은 집에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소통이 안 되는 여인을 보았다. 또 한 번 내가 반투명 인간이 되었다. 김미숙의 언니 둘은 사람을 말하는지, 개를 말하는지 잠시 헷갈렸다. 여인은 개 엄마가 되어 터무니없는 사랑을 쏟고 있다. 개가 발발거리며 여인의 뒤에 따라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개 참 귀엽지. 냄새만 맡을 뿐이지, 물지 않아.’
이번에는 내가 중얼거렸다.

 

양재천 둑길을 지나 우리는 동네 입구에 있는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마침 퇴근 시간과 맞물려 사람들로 붐볐다. 시식용 접시에 네 종류의 빵이 네 개의 접시에 듬성듬성 나누어 담겨 있었다. 시식용 빵 하나 집어 선영에게 주었다. 먹어도 된다는 신호로 알고 혼자서 한 접시를 먹어 버렸다. 한 접시라고 해 봐야 식빵 한 조각 중에서 엄지손톱만 하게 잘라 놓은 것이다.
“혼자 다 먹으면 안 돼, 한 개 맛만 보는 거야.”
식탐이 많은 선영과 오랜 시간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식빵 하나 산 다음 나가자며 팔을 끌고 나왔다. 우린 사거리에 도착했다. 나보다 서너 걸음 앞서 가는데, 건널목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녹색 신호등이 점멸등으로 깜빡거렸다. 선영은 재빠르게 건널목을 건넜다. 나는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선생님, 빨리 오세요.”
숙녀답지 않게 큰소리로 떠듬거리면서 외친다.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가끔 한다. 나도 “알았다”며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혼자 집에 갈까 조바심 내고 있는데, 전봇대에 붙은 광고지를 뜯어 가방 속에 챙겨 넣는 것을 보았다. 녹색 신호등으로 바뀜과 동시에 재빠르게 건널목을 건넜다. 가방 속에 있는 것이 무슨 광고냐고 물었다. 얼른 광고지를 꺼내 불쑥 내밀었다. 광고지에는 여성 보컬 그룹 공연이 올림픽 공원 특설 무대에서 열린다는 내용이다. 아홉 명이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는 사진과 쭉쭉 뻗은 다리와 현란한 옷차림은 내 눈길을 끌었다.
“여기 나온 가수들 좋아하니?”
역시 쇠귀에 경 읽기다. 광고지는 빼앗아 도로 가방 안에 집어넣는다. 손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내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내 손을 들여다봤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앞장서서 집 쪽으로 가고 있다. 가수들이 TV에서 공연을 펼칠 때 누가 옆에서 불러도 전혀 모른다. 몰입의 정도가 비장애인보다 훨씬 높다. 가수들은 무척 좋아하지만 노래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럴 만한 기회도 없었다. TV에 출연한 가수들의 노래와 춤을 좋아하고, 초등학생 수준이긴 해도 휴대전화기로 게임하고 피자를 즐겨 먹는 모습은 영락없는 스무 살 또래 아가씨다.
선영이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은 온통 하얗게 칠한 집으로 이름이 화이트빌라이다. 4층까지 가뿐하게 단숨에 올라간다. 70킬로 되는 무게감 때문에 계단이 쿵쿵 울리는 듯했다. 현관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아름답고 예쁜 손가락으로 세심하게 또박또박 번호 키를 누른다.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기계음 소리가 났다. 평상시에는 현관문이 열리면 어머니가 우리를 맞이한다. 그러면 내 임무는 끝난다. 오늘은 함께 집에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숄더백은 거실 입구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는다. 바로 세면장으로 간다. 수도꼭지를 홱 비트니,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가 시원스럽다. 손에 불길한 병균이라도 붙어 있는 듯 요리조리 살펴본 다음 손을 씻고 또 씻는다. 손만 씻는 데 10분이나 걸렸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폭식하는 버릇이 있어요. 선생님 식사도 준비해 놓았어요.”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계획된 외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개인 몫은 상 차리듯 락앤락에 포스트잇으로 이름을 붙여 놓았다. 저녁 음식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냉장고 속 어묵국을 꺼냈다. 다시 한 번 바글바글 끓인 어묵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집안은 온통 어묵국 냄새로 가득하고 입안에는 군침이 돌았다. 손 씻고 표정 없는 얼굴로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밥은 먹지 않고 뜨거운 어묵 국물을 훌훌 소리 내며 마셨다.
“엄마가 이것만 먹어야 한다고 했어.”
폭식이란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하였다. 순간 명령이 이어지고 부정적인 말만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종현이가 때려서 아프다며 염불하듯 말하는데, 내 귀에도 또렷이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쓱쓱 비비고 부산스러워졌다. 곧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날 듯한 예감이 들었다.
“알았어, 내일 학교 선생님께 말씀드릴게.”
종현이가 때렸다는 말은 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뭘 모르고 어머니에게 특수학교 선생님을 한 번 만나 상담해야 할 것 같다며 넌지시 말했다. 어머니는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웃음은 보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넉넉함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십여 년 전 일이다. 특수학교에서 신데렐라 퍼즐 맞추기 시합이 끝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이었다. 뇌성마비로 걷는 것이 불편한 혜주가 넘어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선영이와 종현도 함께 넘어졌다. 그때 종현이 손은 선영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얼굴에 손거스러미만큼 작은 생채기가 오른쪽 뺨 두 군데나 났다. 그 두 곳에서 피가 보일 듯 말 듯 배어 나왔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늘 때렸다며 중얼댔다.
자폐증 자식 둔 엄마끼리 아픔을 터놓고 나누던 사이였다. 행사 있을 때마다 준비해 온 간식거리도 서로 나누어 먹다 보니,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보다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다음부터 종현이가 때렸다고, 쓱쓱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병원과 상담 기관으로 찾아다녔다고 사건 현장의 증인처럼 어머니가 말했다. 나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어머니와 다른 방법으로 여러 기관을 찾아 상담도 하였다. 도서관에서 전문 서적을 읽으면서 공부도 하였다. 친구에게 맞았다는 피해 의식 때문일까. 아니면 이성에 대한 감정인지 눈여겨보며 관찰했다. 피해 의식도 아니고, 이성 간의 미묘한 관계도 전혀 아닌 것 같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알 길이 없었다. 이럴 때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메모장에 기록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같은 말을 반복한다면 분명 넘지 못할 장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기관에서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사례가 가끔 있다는 말만 확인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종현이가 때렸다는 말은 언제쯤 사라질까. 과거 일에 사로잡혔다가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명령 아닌 명령조의 말을 하였다.
“입 데인다! 식혀 가며 천천히 먹어.”
그 말 속에는 약간의 위엄도 들어 있었다. 선영은 포크로 어묵을 찍어 입에 넣고 삼킨다. 빈 그릇은 옆으로 밀쳐놓는다. 내 국그릇을 번쩍 들어 자신의 앞에 끌어다 놓는다. 어묵국 그릇을 내 앞으로 가져오려니 꽉 잡고 놓지 않는다. 국그릇 쟁탈전이 삽시간에 일어났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이야! 엄마가 네 것만 먹으라고 했어.”
어묵국 그릇을 힘껏 밀어젖히며 벌떡 일어섰다. 냉장고 문은 활짝 열어젖히고 어묵국을 찾아 손에 들고 장승처럼 서 있다. 그건 엄마 몫이야 하며 잽싸게 어묵국을 빼앗아 냉장고 안에 넣었다. 국물이 약간 쏟아졌다. 나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식탁 옆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나동그라졌다. 벌떡 일어나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처럼 깍지 끼고 찰싹 달라붙었다. 꿈쩍도 하지 않다가 돌아서며 뺨을 한 대 후려갈겼다.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 일어나더니, 눈알이 튕겨 나간 듯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까지 어찔어찔했다. 돈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돌봤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분하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허공에 맴돌던 눈동자를 처음으로 마주쳤다.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이 흘렀다. 내가 맞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얼른 세면장으로 도망쳤다. 이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순간만 피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70킬로나 되는 선영을 42킬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뺨까지 맞으면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아야 하느냐.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최고의 활동 보조원이 되고 싶었는데…, 세면장 안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엄마, 아빠, 어묵국 다 먹으면 엄마한테 혼난다.”
하면서 악다구니를 부리고 있었다. 여전히 실내 쪽은 조용하다. 문을 빼꼼히 열고 동정을 살폈다. 냉장고 문은 시골의 여염집 대문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엄마와 아빠 몫으로 남겨 둔 어묵국을 먹고 있다. 아주 흡족한 얼굴이다. 식탁 위에는 나와 둘이 먹어야 하는 밥과 반찬은 물론 국그릇까지 깨끗이 비어 있다. 어묵국 4인분도 먹어 치우고 그것도 모자라 냉장고 안에 있는 수입산 청포도 한 송이를 꺼낸다. 양손으로 입이 터지라고 포도를 집어넣고 있다. 포도가 터지면서 나온 과즙이 손을 흠뻑 적시고 있다. 물어뜯었던 엄지가 허옇게 부풀어 일어나고 있다. 껍질과 씨를 골라내지 않고 와작와작 먹고 있다. 선영은 먹는다는 말보다 먹어 치운다는 말이 어울린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식욕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폭식은 언제쯤 멈출까.
세면장 거울 속 내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압화처럼 새겨져 있었다. 활동 보조원으로서 당당하게 일한 내가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나. 이번에는 내가 손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세면장 문을 밀치고 나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난 다음 거실에서 여성 보컬 그룹 공연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TV에 빠져들어 가듯 보고 있다. 지극히 평화롭고 어린아이같이 순진무구한 얼굴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신데렐라 퍼즐 놀이에서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천연덕스러운 얼굴이 나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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