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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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작사부작 찰흙을 가지고 놀았다. 끈적끈적하면서 질척질척한 감촉이 좋았다.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착한 흙이었다. 여섯 살 어느 해 방 안에만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찰흙이란 것을 주셨다. 찰흙은 어머니의 수제비 반죽 같았다. 밀가루를 반죽하는 어머니 옆에서 손가락으로 반죽을 꾹꾹 눌러 보는 것처럼 찰흙도 눌러지는 게 좋았다. 질척이지만 매끄러운 흙이 손가락에 감겨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느낌, 그 보드라운 감촉이 어머니 살결도 같았다. 그때부터 찰흙은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조물조물한 흙덩이들이 뭉쳐져서 금방 몇 개의 공들이 만들어졌다. 내가 만든 찰흙 공은 아주 작은 공 크기부터 사람 주먹 크기의 공까지 만들어졌다. 나는 그것들을 주욱 줄 세워 나열하는 것이 재미졌다. 그러면 어머니는 “우리 선우는 공을 좋아하는구나. 탁구 선수가 될까, 축구 선수가 될까.” 하며 내 찰흙 공들을 바라보고는 환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런데 내게는 그게 공이 아니었다. 그 찰흙 공을 세 개씩 이어 놓으면 개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개미, 큰 개미들이 방 안에 가득해져 부지런히 기어 다녔다. 그래서 만들어 놓고서도 한참을 지켜보곤 했다. 나는 매일 그렇게 방 안에서 찰흙으로 공들을 만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찰흙부터 만졌고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기까지도 그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찰흙을 만지며 두 주일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 찰흙 공들이 싫어지는 거였다. 처음엔 찰져 좋았으나 금세 딱딱하고 단단해지는 것이 싫어지는 거였다. 물기가 말라 굳어진 흙들. 말라버린 개미들의 흉상처럼 징그럽기도 했다. 갑자기 찰흙 개미에게서 희망이 없어졌고, 찰흙을 만지는 즐거움도 사라졌다. 촉촉함, 축축함, 보드라움, 이런 촉감들이 내게서 사라진 그날 바닥에 뻗고 누워 버렸다. 그리고 기운을 내서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저것들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던 엄마는 방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찰흙더미를 스티로폼 박스에 담았다.
“마르지 않으면 좋겠어… 마르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나는 박스에 담긴 그것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의 개미들에게 물을 뿌려 주었다. 하지만 곧 다시 말라버리는 나의 찰흙 개미들은 그저 단단한 흙일 뿐이었다. 이번엔 더 작고 동글동글한 것도 만들어야지. 그게 먹이야. 찰흙 개미들에게 먹이를 만들어 주고, 나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한 아이처럼 더욱 단단해진 찰흙들을 보며 온갖 상상을 했다. 그 상상들은 흙 속을 돌아다니는 개미들의 세상을 방 안에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알고 보면 동글동글한 것은 그 무엇도 이어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동글동글하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는, 서로 연결되어 모나지 않는 계속된 순환 같은 것이었다. 둥그럽지 않으면 결코 이어지지 않을 땅속의 작은 동굴들이다. 질척거리는 찰흙더미가 크고 작은 공들이 되고, 개미가 되어 나만의 세상이 되고 있었다.
찰흙으로 만들어진 개미들의 세상은 내 방에 있었다. 그들만의 딴 세상이 내 방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이제 찰흙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진 벽돌처럼, 아니면 무쇠처럼 쉽게 깨지지 않는 그들만의 지구 밖 동그라미 세상이 되었다. 물기를 주고 또 뿌려 주어도 영원히 딱딱한 존재가 되어 살아가는 또 다른 행성이 있는 거였다. 지구를 떠나서 우주 속 어떤 화성에 정착한 생명체처럼 말이다. 알 수 없는 미지에 기대하는 일은 그렇게 나만의 상상 속 세상이 되었다. 어머니는 창밖으로 내 남은 찰흙들을 던지고 또 던져 찰흙의 모두를 던졌다. 정원 풀밭에 던져진 찰흙 개미들은 박살이 났을까? 아니었다. 그것들은 깨지지 않았다. 처음 만든 그대로 동글동글한 공 그대로 정원 흙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에는 보니 그 옆으로 진짜 생명이 있는 검은색 아주 작은 개미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 아니던가. 내 찰흙 개미와 놀고 있는 생명체 개미들이 보이는 거였다. 생명체 작은 개미들은 찰흙 공을 올라타고 그 주변을 돌아다녔다. 나는 그 이후 한참 동안씩 창문에 매달려 있곤 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신경모세포종이라는 소아암을 갖고 태어났다. 내 곁에는 항상 어머니만 있었다. 아예 아빠, 아버지라는 단어를 생각하지도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열두 살 무렵 설날이었다. 젊은 남자 한 사람이 과자를 검은 봉지에 사 들고 왔었는데, 어머니와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때 나에게도 처음으로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찾아온 젊은 남자는 어머니의 동생이라는 것을 나중 알게 되었다.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 뒤로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너무 어린 나이 때라 그런지 아버지라는 존재가 궁금하지 않았었다. 사실 나의 세상은 어머니만으로도 모든 게 다 되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은 키 크고 잘생긴 남자여서라며 웃던 말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만약 나도 장애가 없었더라면, 아빠처럼 키 크고 잘생겼을까?’ 하는 상상이 되곤 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이던가, 아버지라는 존재가 내 머릿속에 각인되고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는 열다섯 차례 정도 항암 치료를 받았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삶은 온통 나로 인해 망가졌다고도 할 수 있다. 나를 처음 본 어머니의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나이가 지나고도 십 년이 더 지나 있다.
“넌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그런 어머니를 힘 빠진 눈빛으로 바라보면, 엄마는 희망을 주듯 자신의 뺨을 내 뺨 가까이 대고 말했다.
“그리고 넌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어.”
그럴 때면 나도 정상적인 사람처럼 희망이 생기곤 했다. 하지만 나는 밖에도 혼자서 나갈 수 없는 장애자였다. 그러다가 어쩌다 가는 곳은 병원뿐이었다. 말랑말랑하다가도 금방 딱딱하게 변하는 찰흙 개미들처럼 나의 다리도 점점 온기가 미약해지고 굳어갔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희망을 주고 위로하려는지,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휠체어 테니스의 로저 페더로로 불리는 일본 사람 구니에다 신고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구니에다는 아홉 살 때 척수 종양으로 하반신 마비가 됐지만, 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였다. 그리고 5년 연속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영웅이었다. 어머니는 “구니에다처럼 너도 할 수 있어. 그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며 내 눈을 마주 보며 말해 주곤 했다. 그러나 내가 처한 환경은 어머니의 말하고는 달리 아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현실만 가속화되었다. 병원에 가는 것조차 힘들어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병원비라는 것을 어머니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병원에 지속적으로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외출 자체가 힘들어 병원 가기 싫다고 떼를 쓰곤 하며 어머니를 힘들게 하곤 했었다. 철이 들면서 더 힘든 일은 나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도 옆 사람들을 아예 바라보지 않았다. 때로는 누군가 동네 아주머니가 다가와 “아이고, 애쓰시네요.” 하며 가여운 듯이 나를 이리저리 쳐다볼 때, 나는 그 아주머니를 최대한 노려보곤 했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도 자주 겪는 일이어서 사람들을 보면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와 병원에 가기 위해 아침 8시부터 집을 나섰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 노선은 10개가 넘었고, 버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지만 나와 어머니는 계속 기다려야 했다. 유모차가 올라갈 수 있는 저상버스는 잘 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그나마 30분을 기다렸으니 운이 좋은 날이라고 어머니는 말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버스는 더 오래 기다려야 했고, 마치 굳어진 찰흙 개미에게 물을 잔뜩 뿌려 놓은 것처럼 온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러던 길에 고속터미널 역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 결국 지하철을 두 번 더 갈아타고도 우리는 정작 내려야 했던 정거장을 지나고 만 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다가 병원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에서 어머니는 뼈마디 저 깊은 곳에 숨겨진 굵은 철근 같은 힘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역무원 아저씨가 도와주기도 하지만 역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는 도움을 받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매우 바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절에는 자동화된 시설이 점점 많이 생기기 시작한 때가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훨씬 좋아진 것, 환경이 여기저기 보였다. 그래서 역무원 아저씨 도움이 없어도 되었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어서 어머니는 가능한 도움을 받지 않는 게 좋은 거라며 스스로 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훌륭하게 자란 장애인을 알게 되면 내게 늘 알려주곤 했었다. 1950년대에 활약했던 미국의 육상 단거리 선수, 윌마 루돌프는 장애를 극복하고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다고 했다. 1940년 6월 23일 테네시 주 클라크스빌에서 태어난 루돌프는 22남매 중 한 명으로 어려운 경제적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날 때 2킬로그램도 되지 않은 미숙아였고,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다. 더욱이 1940년대는 인종차별도 존재하였던 터라 흑인이었던 그녀는 흑인 전용 병원에서만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다 그곳 동네에는 흑인 병원 자체가 없어서 그녀의 어머니는 무려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병원을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면서 물리치료를 받게끔 하였는데, 의사는 집까지는 거리가 멀어 매일 올 수 없으니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물리치료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걷게 될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루돌프에게 곧 걷게 될 것이라고 늘 말해 줬고, 그 말을 굳게 믿었다는 그녀의 일화였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치료로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육상선수로 성공한 이야기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할 때 어머니의 표정은 그 어떤 장애도 극복된다는 메시지처럼 강한 어조로 못을 박듯 들려줬다. 그녀는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으로 16세의 나이에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참가하여 400미터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국제무대에 발을 내디뎠고, 이후 로마 올림픽에서는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서 우승하여 3관왕이 되며 기적을 만든 이야기였다.
또 미국에서 열린 어떤 행사에서 나처럼 걷지 못하던 여자가 일어서는 모습을 찾아서 보여주기도 했다. 스키를 타다 다친 그녀는 절대로 걸을 수 없다는 의사의 말에 평생을 절망 속에 살다가 희망을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 희망은 바로 로봇 같은 뼈를 입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사람들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숨소리가 멎는 듯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나를 보며 “대단하지 않니, 이제 장애는 과학으로 점점 극복되고 있어. 우리도 힘내자.” 하며 “선우 파이팅!” 하고 주먹을 치켜세웠다. 그날 어머니의 그 주먹은 내 가슴에 핸드 프린팅되어 먹먹하지만 단단히 고정되어 박혔다. 나는 그날부터 가슴에 주먹을 대고 ‘파이팅’ 하는 습관이 생겨 일을 끝내고 나면 그렇게 하곤 한다.
“선우야, 엄마가 돈 많이 벌어서 저거 꼭 사 줄게. 조금만 참자. 응!”
어머니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눈물이 고이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는 말로 나는 더 경쾌하게 대답하려 했던 것 같다.
“엄마, 저 로봇 다리가 얼른 싸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힘들지 않게 비싸지 않으면 좋겠어요. 저걸 신으면 걸을 수 있겠죠? 아니, 뛸 수도 있겠죠?”
그해 추운 겨울이 지나고 초봄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찰흙처럼 촉촉하고 보드랍고 찰지기도 했지만 곧 딱딱하게 굳어지는 내 미지의 화성 같은 곳이었다. 내가 이곳에 올 때는 소아암은 거의 완치 상태였다. 하지만 암세포가 척추를 누르고 있어서 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는 나는 어머니가 없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어머니는 내게 여기서 며칠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중요한 일정으로 어쩔 수 없이 일주일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한 어머니였다. 나는 당연히 어머니가 다시 올 줄 알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도예를 하는 친동생에게 나를 맡기고 가셨다. 내게 도자기를 배우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외삼촌 말 잘 듣고 잘 배워두라고 신신당부의 말도 했다. 일주일 후에 오신다는 어머니의 당부였다. 그리고는 외삼촌의 두 손을 꼬옥 잡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선우야, 일주일만 여기 있으면 엄마가 돈 조금 벌어서 다시 올게, 알았지.”
“네, 엄마. 일주일 동안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오세요. 잘 있을게요.”
“여기서 도자기 빚는 법을 잘 배우고 있어.”
어머니에게 하나밖에 없던 세 살 아래 남동생이 도예를 하는 곳이었다. 그전에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외삼촌이었다. 웃음기가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쉽게 친근감이 안 갔다. 이후 어머니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나는 일주일 후 오신다는 말에 일주일 간격으로 다음 일주일, 또 다음 일주일 하며 세월을 보냈다. 외삼촌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일 뿐이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맡긴 것은 무슨 암인가가 말기로 밝혀졌다는 것이고, 이후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는 말, 그뿐이었다. 참으로 허망한 말이었지만 더 물을 수도 없었다. 너무 허망해서 알 수 없는 미지의 어느 곳에서 살아 있을 것 같은 나의 어머니였다. 내가 상상하곤 하던 어느 화성에서 잠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인가. 언젠가 내가 찾아가 물을 뿌려 주면 금세 촉촉해져서 미소 지으며 다가올 것 같았다. 하지만 많은 시간들이 딱딱하고 단단하게 흘러갔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어머니의 존재는 내 시간 속에서 사라졌고, 내겐 딱딱하고 단단한 날들도 조금씩 축축하고 촉촉해졌다.
나는 외삼촌이 빚는 청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두 살 그날부터 매일 보고 있는 것은 온통 청자뿐이었다. 청자 금빛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담은 색깔처럼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다. 청색과 녹색으로 구성되어서 푸른 대지의 싱그러운 식물들을 연상케 해 주었고, 보지 못해도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를 상상하게 만들곤 했다. 이곳저곳에 놓인 청자 도자기들이 궁금했다. 외삼촌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열심히 물레를 돌리며, 이런저런 모형의 청자를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옆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내게 청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거였다. 외삼촌에 의하면, 청자의 조형미는 유려한 형태와 청아한 색상, 그리고 그릇의 표면에 그려진 무늬가 핵심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놓인 청자를 들여다보면서 제법 외삼촌이 하던 말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무늬를 비롯한 청자의 조형성은 다양한 제작 기법과 다양한 소재를 보여 주고 있었다. 청자는 그 조형성에서 아름다움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듯했다. 도자의 명칭을 결정하는 4가지 요소는 재질과 시문 기법, 문양의 소재, 그릇의 종류인데 이 가운데 시문 기법과 문양의 소재는 바로 무늬의 속성으로, 그만큼 도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도자기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재질이 무엇이며, 음각과 양각, 상감으로 어떤 무늬를 넣었는지, 어떤 형상에 어떤 용도, 즉 대접과 접시, 잔 등 그릇으로 만들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즉, 도자기의 이름은 일정한 약속에 따라 지어지고 있어 이름만 보고도 도자기의 재질과 시문 기법, 무늬, 형상, 그릇의 종류를 비롯하여 시대적 특징도 대략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시문 기법은 그릇의 재질과 크기에 따라서도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하나의 그릇에 여러 가지 기법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릇을 만드는 시대적 배경과 사용하는 사람, 만드는 사람이 다양한 기법과 소재 가운데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중요한 요소다. 도자기의 세부 설명은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정리하는데, 아가리 부분을 입술이라 부르며 항아리와 병 등 규모가 큰 그릇은 어깨, 몸통, 굽다리 등으로 그 형태가 설명된다. 그리고 다시 입이 넓고 좁고, 목이 길고 짧고, 몸체가 원형인지 반원형인지, 굽다리가 어떤 형태로 깎였는지에 따라 세부적인 이름이 정해진다.
나는 틈나는 대로 오래된 청자 기법 책들을 읽으면서 심취하여 잠이 들었다. 내 일상은 청자 빚기가 온통 생활의 전부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빚은 청자를 사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비색을 띠면서 매우 신비롭고도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들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저 보통의 청자들과는 약간 다른 나만의 기법을 썼을 뿐이었다. 옛 청자의 미를 그대로 되살리는 방법을 추구했을 뿐이었는데, 내 청자가 인기를 얻으며 중앙지에서도 취재차 찾아오는 기자들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나의 청자는 어느덧 조형적 예술미가 뛰어나다는 중앙 무대의 높은 평가까지 받게 됐다. 그런데 도자 사업이 점점 규모화되는지 외삼촌은 외부 일이 바빠져서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는데, 나는 나대로 청자 빚기로 모든 날들이 흘러갔기에 우리의 윤슬도예는 바쁜 세월이었다. 내가 추구한 윤슬도예에서 중요한 고려청자의 특징은 바로 상감 기법인데, 청자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안에 흑토나 백토를 채워 넣어 문양을 드러내는 기법이었다. 이 기법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입체감과 색감의 조화를 극대화시키며 도자기의 예술적 경지를 한층 끌어올리게 되는데, 옛 도자기를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야 했다. 문제는 단순한 안료나 유약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라서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비색은 조건의 예술이기 때문에 토양의 성분, 가마의 불길, 불의 산소 농도까지 완벽히 재현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색이다. 당대 사람들의 철학, 미의식, 기술력, 정신적 태도가 응축되어 결과로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고려청자는 그것을 조용한 예술로 탄생시켜서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술품으로 인정되는데 매우 중요한 정점을 이루고 있다. 하늘의 빛을 머금은 듯한 푸른 그릇 하나에서 예술이 어떻게 철학이 되고 기술이 어떻게 정서가 되는지 보여 주는 조화를 찾는 일, 고려의 도공들이 불 앞에 앉아 하나의 그릇을 통해 아름다움과 조화를 표현하려던 마음, 그 마음을 찾아 따라가는 심오한 천 년 과거 속의 수풀길을 걷는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천 년 그 과거 수풀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던 어느 날 외삼촌은 청자 조합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청자 조합이 자기들만의 특권 의식과 우월 의식에 빠져 있다고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군에서 지향하는 바람과 동떨어진 영리 활동에만 치중하는 모습으로 변질돼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자 조합이 청자 사업의 기본적인 의무와 주어진 책임을 등한시하는 것은 결국 제대로 된 청자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우려했다. 매우 심각한 문제점이라며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외삼촌의 모습은 예전 청자를 빚을 때 보이던 심오한 모습과는 달리 분노와 화로 변해 있었다. 청자를 굽는 가마의 섭씨 1200도 고온을 마치 몸으로 달구는 사람처럼 빨갛게 뜨거워져 가고 있었다.
“그 새끼가 우리 윤슬도예가 잘 나가니까 꼴을 못 보고 부정을 다 쓰고 있어.”
“왜 꼴을 못 봐요…?”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청자 빚기를 멈추고 화를 내는 외삼촌을 바라보았다. 그때 외삼촌과 눈이 마주쳤는데, 외삼촌이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고 몸을 돌려 창쪽으로 걸어가서 밖을 보면서 말했다.
“너는 그 새끼가 어떤 새끼인지 몰라.”
“……”
“내일 이사회가 열리는데, 함께 가볼래?”
나는 이사회에 참석하여 뒤편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청자 조합의 새 이사장인가 하는 사람이 앞 강단으로 나왔는데, 그는 약간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였지만 정리된 헤어스타일에 깔끔한 피부와 건장한 체구가 눈에 띄었다. 첫인상 또한 부드럽고 친근해 보였다. 그는 브라운색 외투 속 하늘색 니트와 청바지를 입었는데 목소리조차 낮고 안정적인 중저음이어서 보기만 해도 예술가의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강단에서 주위를 돌아보며 몇 마디 인사말을 했을 뿐인데도, 그 표정과 말투에서 남다른 아우라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간부터 조합 운영을 다그치는 목소리를 한껏 높이기 시작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개인 요에게는 조합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가마를 쓸 수 없다고 강조했다. 상황을 보니 아마도 이사장이 교체되면서 편이 갈라진 것 같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더니 어디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일어서서 단상의 새 이사장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심하게 욕설을 섞어 가며 말을 했고, 새 이사장은 참지 못했는지 반말투로 더 강하게 어조를 높였다.
“여기는 우리 조합 것이고, 우리 조합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란 말이야. 너는 사용할 수 없다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러자 회의장 안 사람들이 서로 고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어떤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욕설이 난무했고, 그런 상황에도 새 이사장은 배 째라는 식으로 단상에 딱하니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 순간 외삼촌이 일어나 좌중을 돌아보며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런 권한을 누가 주었습니까? 불법적인 갑질과 횡포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이사장은 물러나라.”
그러자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고 뒤편에 서 있던 몇 사람들이 외삼촌 편을 들며 “물러나라”고 외쳐댔다.
외삼촌이 말대로라면, 그것은 공유재산을 사실상 사유화시킨 일이었다. 조합을 자신의 전유물로 여기는 행태라는 판단이 든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들어보니 그 일은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외삼촌을 30일 전 서면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고한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새 이사장은 고소를 당한 것이고, 이후 부당해고 수당이라며 200만 원을 지급했던 것이다. 그런데다 정당한 퇴직금도 지불해 주지 않아서 외삼촌은 새 이사장을 고용노동청에 고소한 상태였다. 이후 새 이사장은 법원으로부터 퇴직금 지급 명령 판결로 550만 원이 확정되자 통장 압류를 통해 지급하였다. 외삼촌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자신에게 한 불합리한 조치들이었지만, 그 일은 결국 조합의 새 이사장이 해 온 그간의 행태에 대한 폭로의 장이었다. 군의 공적인 단체로서 군과 조합을 동시에 망신시키고 있다는 주장으로 번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 사회는 꽤 오래 고성이 오가면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동안 양측 간 고소·고발이 많이 진행되었는지 외삼촌 측 몇 사람들에 의해서 그 낫낫이 드러나는 듯했지만, 조합원들의 동요는 크지 않았고, 나가버리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 이사회 몇몇과 새 이사회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욕설이 계속 오가고 해결점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외삼촌과 함께 조합에서 탈회한 사람들은 조합의 자산인 집기 등 가마도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상당한 어려움을 입는 상황인데, 현 이사장은 조합에 가입하면 되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현실을 떠나서 법적으로 고소·고발까지 이뤄지면서 서로 간 상처가 깊어진 상태였다. 겉으로 보면 서로 화해하고 조합이 하나로 가면 문제가 없는 일이지만, 그 안에는 이권이 개입되어 있어 내부적 권력 다툼으로 변질된 부분도 있었다. 예전에는 규모가 작았던 개인 요들이 조합이 결성되면서 국비·도비·지방비 등 지원이 생겨나면서 크고 작은 비리들이 발생하는데도 문제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오랫동안 묵혀 있던 개인적 감정들이었다.
외삼촌은 집에 돌아와서도 회의장에서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장식장에 잘 보관되어 있던 긴 칼을 바라보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어 무섭기까지 했다. 나중 알고 보니 새 이사장은 이곳에 일찍 터를 잡은 사람이고, 개인 요로서는 상당한 예술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이곳에서 청자를 만들던 도공의 후손에게서 일찌감치 청자 기술을 익힌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 이곳에 들어온 그는 도공 후손의 기술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의 제자가 됐다. 그 도공 후손은 후에 청자 장이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 흔하게 보고 자라던 청자 그릇들과 자신의 들에서 굴러다니던 청자 파편 등을 헛간에 모아 두었던 것이 청자 발굴에 기틀이 되었고, 1호 도공이 되었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지만, 그에게 첫 청자 기술을 전수 받은 사람이 바로 새 이사장이었다. 새 이사장은 이곳에 처음으로 가마터를 복원하면서 청자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청자도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곳 청자의 대부분은 새 이사장을 통해 유통되어 왔는데,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지자체의 보조가 들어오면서 개인 요들이 하나둘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조합의 결성으로 개인 요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 것인데, 처음엔 조합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새 이사장이 전 이사장과 임원들의 비리를 대외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전 이사회는 물러나야 했고, 자기편 세를 몰아 새 이사장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합의 비리가 전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외삼촌에게 불똥이 크게 떨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 없던 외삼촌은 새 이사장을 고발하게 되었고, 상호 간 돌아올 수 없는 법적 갈등을 낳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사회 이후 외삼촌 편에 있던 사람들마저 새 이사장 쪽으로 하나둘 돌아서고 말았다. 새 이사장은 도공으로서 사회적·예술적 권위도 갖춘 사람이어서 외삼촌의 힘은 그를 따라가기엔 미약했던 것이다.
상감기법은 고려 도공들이 처음 창안한 기법으로, 성형한 자기 표면에 무늬를 음각에 백토와 자토를 넣어 긁어낸 뒤 유약을 발라 구워내는 일이다. 매우 섬세한 작업이며, 푸른빛 비색 유약이 고르게 발라져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예술 조형미의 극치를 보여주게 된다. 새 이사장은 이미 유명한 도공으로서 전통성과 전승 계보를 확실히 해낸 인간 무형 문화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은 놀라운 말을 꺼냈다.
“기이하게도 너의 상감기법이 그 자식의 기법과 너무 똑같단 말이야.”
분노에 찬 표정으로 외삼촌은 내가 만든 청자 주병을 바라보더니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그저 토끼 눈을 뜨고 바라보았는데, 외삼촌은 장식장에 있던 긴 칼을 꺼내더니 그 옆에 놓인 공들여 만든 상감 운학문 매병에다 칼을 휘두르고 말았다.
외삼촌의 말에 의하면 새 이사장은 우리 윤슬도예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게 되자, 문제를 일으켜 죽이려 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의 작품들이 그의 작품을 마치 모방해 놓은 것처럼 너무도 비슷하다는 말을 다시 반복하고 있었다.
“너의 상감기법이 그 자식의 기법과 너무 똑같단 말이야.”
나로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말들로 들려왔다.
“세상은 언제나 힘센 자들이 힘으로 누르면 약한 자들은 꼼짝없이 당하게 되어 있어.”
소주잔을 들고 취한 듯 넋두리를 하는 외삼촌의 말이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함께 공들여 만든 작품을 깨어 부술 정도로 크게 좌절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좌절이란 무엇이던가. 내 생에서 생명줄 끝의 또 다른 시작과 같은 것들이었다. 혼자서 방에서 찰흙을 주물럭거리며 찰흙 공을 만들고 그것들을 이어 붙여 개미라고 믿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굳어진 찰흙 개미들에 물을 부어서 질척질척해지면 생명이 보였고, 정원에 던져진 마른 찰흙 공들을 올라다니던 생명체 작은 개미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지의 화성에 있던 나였다. 바닥에 내던져진 청자 파편들이 날카롭게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점점 그 파편들이 부드럽게 다가오는 것 아닌가. 산산조각 난 청자 파편들, 그 파편들이 과거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주고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담는 것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