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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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찍부터 노래를 했다. 시도 썼다. 첫 울음은 내 문학의 첫 작품이 아닐까. 엄마로부터 태어나면서 “나는 나다”라고 쓰며 세상에 나왔으리. 주먹을 꼭 쥐고 쓴 그 첫 시는 나의 창작의 산실이었던, 네모난 앉은뱅이 밥상 위 첫 울음이다.
국민학교 3학년 작문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쓴 ‘봄’이란 제목의 글이 잘 쓴 글이라며 칭찬하셨다. 내성적인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내심 우쭐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날 선생님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 시간에 여자 선생님은 나를 교탁 앞에 세우고 내 글 가운데 “먼 듯 가까운 산”이란 표현이 좋았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때부터 국어 시간이 재미있었고 내가 어느 이상한 나라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 혼자 글을 끄적거리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국어 시간의 칭찬 후유증은 일생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며 따라다녔다. 그 후 문학은 굴레가 되어 숨을 막히게 했다. 아프기도 했지만 오래 끊어지지 않는 인연의 아름다움이 되었다. 중학 시절에 잡동사니 책들을 두서없이 읽으며, 공부 시간에도 책상 밑으로 소설책을 읽다가 열반(涅槃)에 들어간 적이 있다. 대학은 국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으로 약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바쁜 중에도 시, 수필, 단편소설을 발표했지만, 과중한 공부량 때문에 문학의 꿈은 매몰되어 갔다. 시간은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결혼, 약국 개국을 했다.
무서운 가난과 함께 나는 화학방정식 대신 돈을 세는 거리의 과학자가 되었다. 동시에 문학의 꿈이 사라졌다. 혹독한 삶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런 중에도 나에게 밤이면 반짝이는 눈, 문학의 창이 열려 있었다. 약국 단칸방, 삐딱하고 비스듬한 천정에 뚫린 손바닥 두 개만 한 유리창이다. 하늘로 뚫린 유리창은 우주와 통하는 어린 왕자의 가슴이기나 한 듯 나의 창작의 산실이 되었고 영감의 샘이었고 약국 조제실에서 글을 썼다. 이곳에서 창작혼의 불이 훤히 밝아왔다. 내 문학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십수 년 약국 생활을 접고 남편 직장을 따라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갔다. 다시 시심을 불태우고 싶었다. 가난으로 아우성 같던 약국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였으니 투명한 꿈과 급박한 삶이 구름 기둥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1982년 『수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나 시에 대한 그리움은 떨칠 수 없었다. 그 당시 문학 동인을 결성하여 문예 창작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소설가 한승원, 시인 성춘복, 시인 이근배, 신경림 선생님들이 오셔서 강의를 했다. 나는 성춘복 시인께 배우며 예술원이 있는 경복궁 뜰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습작한 시를 보이고 지도를 받았다. 1985년 성춘복 선생님이 계간지에 신인상 추천을 권했으나 사양하였다. 낮고 파란 불꽃처럼 타오르던 시심과 함께 신춘문예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에만 정진하기엔 너무나 바쁜 생활이 덮쳐왔다. 네 아이들을 키우랴 지방 임지의 남편에게 가보랴 더 바빠진 셈이다. 나의 문학은 또 곤두박질치며 십수 년이 흘러갔다.
다시 고향 대구로 이사 왔을 때였다. 성당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 날 새벽, 무료 급식을 준비하는 중에 문득 성춘복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그동안 써 온 시 원고가 있다고 했더니 시집을 출간하자고 해서 그동안의 영혼 같던 편린의 시들을 모아 첫 시집 『차라리 사람을 버리리라』를 발간했다. 혼자 문학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 문학은 완행열차였다. 그 시는 어리지만, 순수한 언어들이 호롱불 같던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고 견뎌낸 시어가 눈물겨웠다.
나와 들꽃과의 만남은 문학과 같이 운명이었고 끈이었다. 시의 축복처럼 야생화는 내게 다가와 사랑의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들꽃 시집 『세상으로 트인 문』은 내게 황홀한 행복을 주었다. 한때는 연필만 쥐면 꽃시가 스물스물 쏟아져 나왔다. 꽃 속에 신을 만나고 우주를 보면서 200여 편에 가까운 꽃시를 썼고 시집을 내고 남은 꽃시는 곧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누가 보아주든 말든 제 생명 제 빛깔로 온몸, 영혼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씨앗을 맺는 풀의 모습은 존귀했다. 꽃의 자유, 꽃의 꿈, 꽃의 사랑법을 감지하며 들꽃은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나의 영원한 문학의 동행이 되었다. 몇 년 전 대구 수목원에 키우던 야생화를 기증했다. 꽃은 가도 내 마음속 들꽃은 살아, 지금도 시가 되고 있다.
시집 『빛을 그리다』에서는 만나는 모든 사물을 빛으로 그려내고 싶었다. 눈이 시도록 가슴이 저리도록 간절한 시어를 만나려고 했다. 도대체 그런 시어가 있을까. 시간의 등만 보였지만 물이 그리운 새가 길게 울 듯 그런 울대로 노래처럼 울고 싶었다.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이때처럼 많이 느껴 본 적이 없다.
그 후 진실을 만나기 위해 시집 『말의 알』을 펴냈다. 오랜만에 변화된 시어를 얻을 수 있었다. 시어 속에 숨어서 언어에 더 가까이 가 보았다.
나는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썼다.
“삶의 춤은 비릿하고 정겹고 속절없다. 빛을 바라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그, 아득한 파도, 모두가 녹아 있는 이 뚜렷한 증거, 푸르게 출렁이는 옷을 입고 철철 넘치도록 사랑하며 쓰고 싶다. 앞을 바라보아도 뒤돌아보아도 아득한, 주어진 좌석표 위에 식구와 언어와 이웃이 금싸라기처럼 다가온다. 더욱 삶을 끌어안고 시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제 진정 사랑할 일만 남았다”라고.
심미적 기억이 사라지는 소실점을 천착한 ‘이야기 시’도 들어있다. 『말의 알』 시집으로 제32회 이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나는 변화를 시도하며 문학에 대한 배움을 끝내 버릴 수 없어 72세의 나이에 모교인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이어 한영 시집 『산이 피고 있다』를 출간했다.
시집 『생이 만선이다』를 내며 나는 많이 외로웠다. 나의 시에서 은연중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면 성공한 것이리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어떻게 토해낼까? 말의 갈구에 영혼은 몸살을 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사랑으로 통하고 사랑이 곧 시였다. 더 높게 더 넓게 조용히 들려줄 수는 없을까? 다 태우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영을 따라 나서던 내 시가 지금 내 곁에 있다. 이쯤까지 동행해 왔으니 우리는 아름답고 질긴 인연일 수밖에. 자주 시간의 외줄을 탔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태초 이전부터 있었고 나도 그 동산에서 살다가 온 것이었다.
오래된 진실이 내 속에 함께 살고 있으면서, 사랑도 진실도 존재도 그 모습이 변화하며 다가온 것이다. 그중 시간은 더욱 모르는 길고 긴 줄일 뿐이었다.
이고 지고 가득 쌓인 것이 많다. 앞으로 춤추며 노래하며 계속 사랑 타령을 할 것 같다. 사랑의 다른 모습을 그리며 굴레 같은 세월이 감사한 세월이다. 시간과 존재와 사랑, 모든 것이 내 시의 영혼인 것을.
우리는 지금 태고로 가고 있다. 시간을 무등 태우고 배를 저어 우리는 태고에서 태고로 흘러간다. 신이 풀어놓은 아득한 층계를 오르며 시간에 대해 되묻는 시어가 이 시집에 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준 것인지. 다음 시집에서 꿈틀거리는 시어를 세워 볼 것이다. 시의 언어에는 어머니의 체온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나는 자꾸 시의 치맛자락을 잡고 칭얼대는 것이리라.
시집 『생이 만선이다』로 제39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제야 비움과 사랑이 동의어임을 알아가고 있다.
요즘은 첫울음처럼 맑은 소리로 사랑의 다른 모습, 시간과 존재에 대해 시어를 고르고 싶다. 그이가 떠나고 빈자리와 옷가지, 쓰던 물건을 보며 존재는 영원하지 않지만, 영원하다는 생각에 눈물겨워진다. 우리는 영원히 살기에, 사랑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고 안겨보리라. 이젠 또 사랑할 일만 남았다.
지금 당신의 배는 만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