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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병 시리즈와 여름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혜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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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시절은 가끔 함께 간다.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살았던 그 시절이 떠오르고, 그렇게 과거를 돌이켜보면 아련한 기억처럼 음악이 다시 떠오르는 그런 순환이라고나 할까. 이럴 때면 내 삶의 어느 순간을 음악이 감싸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말랑해지곤 한다. 음악이 머무는 시간에는 아마도 한때의 온갖 감정이 부유하고 있을 테지만, 어쩐지 나는 즐거웠던 때보다는 지쳤을 때 들었던 것을 좀 더 마음에 새기는 사람인가 보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거나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들었던 음악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때의 음악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기에 값지지만, 그 경험을 글로 쓰려면 ‘나 예전에 이렇게 힘들었어’라고 호소하는 느낌이라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딱 그때, 마음 한구석이 조금 허물어져 있을 때 그 틈으로 음악이 스며들었던 것을. 일본 재즈 힙합 뮤지션 누자베스(Nujabes)의 음악도 그렇게 기분이 복잡한 시절에 내게 왔다.
그날 나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미적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사무실에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기 싫다며 수다를 떨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출근일이라든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에 관한 걱정 등으로 세상 심란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혼자 침울해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지며 내 귀에 어떤 소리가 스며드는 듯 들어왔다. 서정적인 느낌의 마이너 멜로디와 안정감 있는 비트로 이루어진 음악이었다. 중간중간에는 턴테이블 스크래치와 진중하고도 담백한 랩이 섞여 있었다. 퇴사를 앞두고 힘없이 사그라든 마음이 바로 반응하는 걸 느꼈다. 뭉개던 몸을 즉시 일으켜 카운터로 달려가서는 카페 사장님에게 가수와 제목을 물어보았다. 사장님이 건네준 종이에는 <Nujabes, Luv(sic) Part 3>라고 적혀 있었다. 누자베스가 시작하고 그의 사후까지 이어져 제작된 ‘상사병 시리즈’와의 첫 만남이었다.
시부야에서 중고 레코드 가게를 운영했던 누자베스는 비트 메이킹과 믹싱 등을 담당했던 프로듀서였고, 그의 음악에 객원 래퍼들이 참여하여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누자베스 음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래퍼, 싱고투(Shing02)는 <Luv(sic)> 시리즈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이 시리즈에서 보이는 그의 랩에는 흔히 떠올리는 힙합 특유의 뾰족함이나 공격성 또는 허세가 없다. 허세는커녕, 솔직히 그렇게 겉멋 쫙 뺀 랩은 처음 접하는 느낌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으로 들렸다. 또한 그는 일본 출신이지만 영어로 랩을 한다. 일본어였으면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텐데, 담담하면서도 감정을 흔드는 그의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음악에 좀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떤 음악에 빠지면 일단 CD부터 사는 성격이었다. CD를 모으는 것은 나의 큰 즐거움이었으며, 또한 그게 뮤지션과 음악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언제부턴가 스트리밍으로 바뀐 트렌드를 따르게 되어버린 건 좀 아쉽다). 그때도 당연히 그러려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국내에서 그의 음반을 구할 수 없었다. 누자베스는 2010년에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생을 마감했는데, 생전에 자신의 앨범에 대한 해외 라이선스를 허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쉬운 대로 블로그에 올려진 그의 이야기를 찾아 읽고 거기에 링크된 동영상으로 음악을 들었다. 카페 사장님은, 이 노래는 가을밤에 어울리는 곡이어서 이렇게 한여름에 들을 만한 건 아니라고 했었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던 내 마음은 어떤 가을밤 못지않게 쓸쓸했다. 누자베스를 알게 된 여름날,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어김없이 그의 음악을 찾아 블로그에 들어가곤 했다.
누자베스 음악을 너무 듣고 싶어 하는 나에게 선뜻 mp3 파일 모음을 보내주신 온라인 지역 카페의 고마운 분, 일본 갔을 때 그 동네 레코드 샵을 몇 군데나 뒤져서 CD를 구해다 준 회사 동료와 남동생 덕분에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음악을 좀 더 편하게 들을 수 있게 됐다. 특히 Luv(sic) 시리즈의 다른 파트라든가, 싱고투가 아닌 래퍼와 함께 작업한 또 다른 작품들도 알게 되어서 내 스마트폰 음악 앱은 한동안 누자베스의 곡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로 차분하고 평온하지만, 잊고 있던 마음속 서글픔을 끄집어내는 듯한, 그러면서도 힙합스러운 비트를 잊지는 않은 그런 음악들. CD 속 음악을 mp3 파일로 바꾸어 폰에 저장하는 건 꽤 귀찮은 작업이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해하며 했던 기억이 난다.
누자베스 소속사와 협의가 된 건지, 몇 년 전부터는 국내에서 CD를 살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도 그의 음원을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이젠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아무 때나 쉽게 들을 수 있긴 한데, 그래서 그런지 예전의 간절한 마음이 조금 작아진 것 같긴 하다. 쉽사리 손에 넣지 못할 때 더욱 끌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가. 이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좀 느긋해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가끔 생각나서 그의 음악, 특히 <Luv(sic) Part 3>를 찾아 들을 때면 앞날을 헤아릴 수 없던 시절 누자베스를 처음 알았던 때와 블로그에서 그의 흔적을 찾으며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던 여름의 밤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떠올린 그 시절은, 막막하고 서걱거리던 가슴에 빠르게 스며들었던 누자베스의 음악들을 다시 한번 불러낸다.
음악과 시절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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