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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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괜찮아요?”
신음에 가까운 딸의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어떤 말이라도 하려 했으나 입술만 달싹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잠시 후, 아득한 정신으로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눈을 떠보니 딸은 조수석 문짝에 웅크리고 있었고, 나는 안전띠에 묶인 채 공중부양하듯 왼쪽 어깨가 자동차 천장을 향해 있었다. 서로 다친 데는 없냐며 여기저기 살피는데 적막 속에 왠지 모를 외로움이 밀려왔다.
고속도로로 진입해서였다. 깜빡했던 안전띠를 매려던 순간, 자동차의 앞바퀴는 이미 중앙선을 넘었고, 반대편 차선에선 대형 덤프트럭이 삼킬 듯이 달려왔다. 블랙홀이 그랬을까? 엄청난 흡인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득했다. 아! 이젠, 끝이구나 싶던 찰나에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졌다. 나의 영혼은 유체이탈되어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브레이크 페달을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자동차는 팽이 돌듯, 뱅그르르 돌며 쇠를 깎는 소리를 내지르며 쿵! 소리와 함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벼랑으로 곤두박질쳤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문을 두드리며 괜찮냐고 물었다. 금세 사람들의 힘쓰는 소리가 들리더니 옆으로 누웠던 자동차가 바로 세워졌다. 그들은 자동차에서 불이 날 수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딸애와 나는 몸을 추스르고 나왔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멀쩡한 우리를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자동차는 보닛이며 문짝이 다 찌그러져 상처투성이로 황량한 들판에 오도카니 놓여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동차는 우리를 감싸 안고 지켜주었을까. 사방의 유리창이 깨지지 않은 것이 신기했고, 우린 긁힌 흔적조차 없었다. 자동차가 굴러떨어진 고속도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속도로 갓길에선 사고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아득하게 보였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를 세워준 사람 중 한 사람이 시동을 걸어보더니 “운전하실 수 있겠어요?” 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목적지가 어디냐고 묻곤 고속도로로 가지 말고 산업도로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면서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딸은 내가 다시 운전하는 것이 불안했던지 내 팔을 잡으며 괜찮겠냐는 표정이었다.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던 것일까.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인사조차 하지 않고 운전대를 잡고 털털거리며 사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알려준 길을 따라 한참을 운전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심장이 쿵쾅거리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앞이 흐릿하여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간신히 도로변 갓길로 이동하여 차를 세웠다.
운전대에 엎드려 마음을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니, 시나브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무 말도 못하고 떠나온 것이 염치없고 미안했다.
사방은 점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디건 연락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공중전화 부스가 보이질 않았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다 찌그러진 차와 우리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사색이 되어 있는 딸의 모습이 애처로워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자동차들을 향해 “도와주세요” 하며 두 팔을 들고 흔들었다. 몇 대가 지나치고 나서야, 봉고차가 멈춰 섰다. 마침, 렌터카 회사 차였다. 봉고차 운전자에게 사정을 말하고 대리기사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운전자는 상황을 살펴보더니 기다려 보라고 하곤 오던 길로 다시 차를 돌려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봉고차 운전자가 대리기사를 데리고 나타났다. 대리기사는 인사조차 하지 않고, 단숨에 운전석에 털썩 올라앉더니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우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미러로 운전자를 살폈다. 윤곽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어 험상궂어 보였다. 밖은 앞뒤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딸의 손을 꼭 잡은 채 두 시간 남짓 긴장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린 무사히 자동차 공업소에 도착했다. 대리기사는 친절하게 접수를 도와주고 돌아갔다.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고 얼굴조차 마주하지 못했던 그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기적 같은 긴 하루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사건과 고통 속에서도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싶다.
문득 남편의 사고가 떠올랐다. 남편이 웃으며 “다녀올게” 하고 나갔다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고 오 년 만이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삶의 무게로 남았던 것일까. 죽음을 느꼈던 그 순간, 고요해지며 평온했던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속에 숨어 있던 갈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나의 영혼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