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무착(無着)의길, 연꽃이 피어나는 곳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류재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조회수82

좋아요0

살면서 한 번쯤은 꼭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혹은 스치는 인연 하나로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자리 잡은 사람. 나에게 수보리 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불교에 입문하던 시절 우연히 접한 스님의 시 「삭발」은 내 안의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업연으로 태어나 번뇌를 씻어… 초연히 잡초 뽑혀 내려가네.’
이 짧은 구절은 오랫동안 나의 마음에 머물렀고 나는 언젠가 이 시의 주인공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 후로 몇 차례 제주를 찾았다. 불교 성지순례, 템플스테이, 한라산 만행길… 여러 차례 제주 땅을 밟았지만, 스님과 마주할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번 순례길에서 마침내 스님이 계신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의 무착선원을 찾아가는 인연이 닿았다.
서귀포 약천사를 떠나 두 번의 버스를 갈아탔다. ‘하가리’라고 큼직하게 적힌 마을 표지판이 나를 맞이했다. 앞으론 푸른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고 뒤로는 나지막한 한라산 능선이 펼쳐지는 이 마을은 제주 본연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고즈넉한 토착 마을이었다. 나는 스님께 전화 드렸다. 처음 인사드리는 전화였지만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갑고 따뜻한 음성이었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켜고 마을 골목을 따라 들어섰다. 깔끔하게 정리된 돌담길과 조용히 서 있는 보호수, 인기척마저 드문 고요한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한참을 헤매던 끝에 연꽃 벽화를 보고서야 저곳이 무착선원임을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걸어 나오신 수보리 스님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오누이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비구니 스님이셨지만 세속을 벗어난 엄격함보다 사람을 먼저 품는 너그러움과 온기가 스님의 첫인상이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지만 스님은 나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맑고 연초록빛이 도는 가루차를 우려 주셨고 나는 그 차 맛보다 스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참선과 염불, 선문학과 사찰음식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걸어온 자비의 행로들, 스님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하나가 이미 오래된 수행의 결이 깃든 듯했다.
스님은 나보다 한 기수 앞선 동산불교대학 4기 동문이었다. 그 인연 덕분인지 우리는 금세 도반처럼 가까워졌고 또 다른 동문 스님인 본연 스님이 주석하는 무주선원까지 함께 가보자며 반갑게 손을 내미셨다. 제주에 몇 분 계시는 동문 스님들을 언젠가 함께 찾아보자는 말씀도 하셨다. 그 말 속에는 연대와 기억 그리고 불법의 맥을 이어가려는 소중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수보리 스님은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헌신의 실천자였다. 지역에서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기꺼이 달려가 봉사하고 이웃을 부처님처럼 섬기며 모든 소유와 욕망을 내려놓은 삶을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스님의 삶은 다양한 상으로 이어졌다. 붓다 대상(사회봉사 부문), 세계 불교 평화상,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명인 대상, 적십자 총재 표창, 윤동주 문학 신인상 등… 그러나 그 어떤 훈장보다도 스님을 빛나게 하는 건 바로 일상에서 수행과 자비를 숨 쉬듯 실천해 오신 그 삶 자체일 것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2024년 5월 22일 하안거 결제일을 맞아 스님께서 37번째 100일 기도에 들어가셨다는 점이었다. 신도회인 성불회 회원 65명과 함께 시작한 그 기도는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긴 수행 서사였다. 성불회 회장 김문수 포교사와도 스님이 직접 전화로 연결해 주셔서 귀한 인연을 나눌 수 있었다.
스님의 시 「삭발」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는다.
‘모든 것 초연히 내려놓고 한 송이 연꽃 피우려고 첫걸음마 시작하네….’
그 시 속에는 단지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만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이 깊게 깎여 나가며 피워내는 자비의 연꽃이 있었다. 속세의 실타래를 풀고 모든 집착을 놓으며 시작한 스님의 길… 그 길은 무착(無着)이라는 말 그대로 붙들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그러나 온 존재를 다해 살아내는 길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무착선원, 그곳은 단지 작은 암자 하나가 아니라 자비와 실천, 고요와 울림으로 세상과 깊이 이어지는 한 수행자의 진심 어린 발자국이 스며든 불국토였다. 오늘 나는 그곳에서 붙들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머무는 법을 배웠다. 사문(沙門)의 길이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비워서 온전히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임을, 그리고 나도 조용히 다짐해 본다. 지금 나의 삶도 그처럼 한 송이 연꽃을 피워내는 길이기를.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