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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와 소나기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준희(대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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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에서 카톡의 울림이 들려온다. 얼른 열어 보니 지인이 보내 온 내용이다. 올해는 여름 소나기를 많이 맞았는데 소나기의 기억이 언젠가는 글감으로 요긴하게 쓰이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 중이었는데 이런 글감 힌트를 내게 준 것이 아닌가 하고 고마운 마음에 얼른 답을 한다. 글감으로 장맛비와 소나기를 글감으로 하겠다고 알려 준다. 시도 때도 없이 까꿍 하며 찾아오는 카톡의 울림이 짜증스럽기도 한데 오늘은 예외이다. 반갑기도 하고 고마운 만남이다.
6월 하순이면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있다. 다름 아닌 장맛비다. 요새는 이상 기후 탓인지 모내기를 끝낸 후 때맞추어 내려야 할 비가 오지를 않는다. 메말라 타들어 가는 모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기우제를 지내고, 지하수를 개발하여 물을 뿜어 올린다. 기우제를 지내든, 지하수를 개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연의 힘 앞에는 당할 자 없지 않은가. 그래서 하늘만 쳐다보며 장맛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장맛비가 좋은 점은 첫째, 때맞추어 내려야 할 비가 오지 않아 심어 놓은 모가 바짝 마르고 숨이 넘어갈 때쯤, 애타게 기다리던 장맛비가 와서 갈증을 해소해 주어서 좋다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두 번째는 7월의 무더위를 한동안 지그시 눌러 한 달 동안 시원하게 해 주어서 좋다는 것이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는 게 세상 이치가 아닌가. 단점은 첫째, 한 달 동안 남쪽 지역에서 한강 쪽 지역을 오르내리며 비를 뿌리는 장맛비는, 때에 따라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강이 넘치고 농작물이 침수되어 애써 심어 놓은 모가 물에 잠기고 논, 밭이 못 쓰게 된다. 봄 초입부터 애지중지 키워 온 과일들이 순식간에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겹다는 이야기다. 온종일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는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어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가뭄에 콩 나듯이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와 한 차례 시원하게 비를 뿌려 주는 게 소나기다. 소나기라는 단어는 아주 옛날 농촌에서 밭일하고 돌아가는 길에 동행한 분이 하늘을 쳐다보며 비가 한 줄기 오겠다고 했다. 같이 가던 농부가 이렇게 청명한 날씨에 무슨 비가 오겠느냐고 하자, 그럼 소를 걸고 내기를 하자 해서 내기를 했다 한다. 때마침 비가 갑자기 내렸다. 이것이 소나기의 원조 소내기인데, 어느 국문학자가 소내기를 소나기로 한글대백과사전에 등재를 해서 소나기로 자리를 굳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소나기가 좋은 것은 첫째, 무더운 여름날 잠시 한 줄기 뿌려 주면 시원해서 좋다. 끈적한 몸을 생기가 돌게 해 준다. 두 번째로는 소나기가 오다가 그치면 청명한 하늘의 뭉게구름이 좋다. 고추잠자리가 어디서 왔는지 떼를 지어 날아 좋은 풍광을 만들어서 좋다는 것이고, 곧 가을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란다. 세 번째는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면 지저분하게 보이던 주변도 깨끗하게 보이고 땟국이 잔뜩 묻은 가로수들도 깨끗해지며 윤기가 난다. 이래서 소나기가 좋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뙤약볕이 내리는 날, 양철지붕을 두들기는 소나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듣는 이의 감정에 따라 다르지 않겠는가 싶다. 어떤 이는 처량한 기분일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시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6·25 전란이 끝나고 임시로 지은 집들은 대부분 양철지붕이었고, 어쩌다 한두 집은 기와지붕이었다. 콩을 볶듯 다닥다닥거리는 소리는 온 동네를 요란스럽게 했다. 방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양동이에 받아 가며 빗소리 듣던 초라했던 기억들. 그래도 잘 달구어 놓은 양철지붕의 열기를 시원스럽게 이 집 저 집 골고루 식혀 주는 소나기는 고마운 길손이었다. 그래서 한여름날의 소나기가 반가운 손님으로 여겨지는 이유인 것 같다. 어린 시절 학교 수업이 끝나고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에서 운 좋게 달구지 얻어 타고 가다가 소나기 맞아 본 기억도 어제 같다. 등줄기 때리는 그 얼얼했던 소나기의 맛. 피로감이 물밀듯이 찾아오는 요새 같은 세상에서 때로는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장맛비와 소나기는 또 다른 만남이다. 장맛비는 다소 지루한 감은 있지만, 가뭄을 없애고, 소나기는 예고 없이 찾아와 무더위를 잠시 씻어 주는 차이가 있을 뿐. 장맛비와 소나기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연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싶다. 소나기 한 차례 지나간 한여름 밤, 모깃불 피워 놓은 마당에 커다란 멍석 깔고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며, ‘별 하나 나 하나’ 동요를 불러 보던 유년의 기억은 어떤가. 하루 세 끼만 먹어도 부자였다는 유년 시절, 그래도 그곳에는 소박한 우리의 삶이 있었다. 오늘따라 후덥지근한 한나절이다. 소나기 한 줄기 오지 않으려나. 일기예보를 보니 내일은 내가 사는 동네에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다고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오랜만에 우리 집 마당에서 윗도리 벗어 던지고 추억의 소나기 한 번 실컷 맞아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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