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깊은 수를 읽는 인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보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조회수20

좋아요0

2021년 겨울, 나는 그때 서오릉 둘레길을 걸으며 ‘권력과 리더십’에 대하여 줄곧 생각을 했고 이것을 변변치 못한 한 편의 글로 정리하여 모 문예지에 기고하였다. 이것은 그해 겨울이 지나고 곧 새해 봄이 되면 제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기에 새로 선출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최상의 리더십을 보여주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다.
서오릉에 잠들어 있는 왕과 그 비빈들 중에서 그들 생전에 최상의 리더십을 보여준 이는 누구였을까? 그때 나는 이렇게 자문하며, 확신 있게 영조의 정비(正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라고 자답했었다. 정성왕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재임 기간이 가장 긴 33년을 기록했다. 그녀는 1724년부터 1757년까지 권력 서열 제2위인 중궁전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더욱이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남편으로부터 소박 맞아 외면당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겸손과 절제를 잃지 않은 인물이었다. 위로는 시모인 인원왕후를 정성껏 잘 모셨고 아랫사람들에겐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큰 사랑을 베풀어 궐내를 늘 편안케 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영조와 정성왕후에 관한 이야기가 잘 기록되어 있다. 정성왕후가 보여준 리더십의 핵심은 겸손과 절제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2021년 겨울에 썼던 글의 속편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2022년 새해에 뽑힌 제20대 대통령은 결국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주어진 제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파면당하는 파국을 맞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는 자기의 과오를 모르는 교만과 절제 없는 권력 남용이 빚은 비극이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법률 고문을 역임한, 경험주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수상록』에 「높은 지위에 대하여(Of great place)」란 글이 있다. 거기를 보면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스스로의 과오를 발견하는 데에 가장 더디다”라고 하였고, 권력자의 권위에 따르는 악덕 중에서 부패와 유약(柔弱) 등에 대해 언급했는데 특히 유약은 우리의 파면당한 대통령 부부가 국민들의 기대를 무너지게 했던 결정적인 악덕이었다고 볼 수 있어서 여기에 그대로 옮겨 본다. ‘유약은 수뢰(收賂)보다 한층 나쁘다. 뇌물은 이따금 오는 것이지만 사람이 청탁이나 근거 없는 사정(私情)에 좌우된다면 그는 언제나 거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대통령 부부 주위에 목사, 무속인, 역술인, 정치 브로커 등이 거리낌 없이 출입하면서 여러 잡음이 일었고 이로 인해서 여당은 총선에서 참패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기에서 발생한 여러 어려운 문제를 일거에 잠재워 보고자 절제 없이 섣부르게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끝내 파국을 맞은 것이다.
나는 대학교 재학 중, 학보병으로 입대하여 짧은 기간 복무하고 귀휴(歸休)하여 복학할 날을 기다리며 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선친께서는 그때 남자는 바둑 둘 줄을 알아야 한다며 한 5급 정도가 될 때까지 지도해 주셨다. 나는 머리가 아둔하여 빨리 늘지는 못했지만 그때부터 바둑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하수(下手)와 고수(高手) 사이에는 수(手)를 읽는 능력의 차이가 바다같이 넓고 깊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한 개인의 삶이나 한 국가가 존속하는 앞길에도 바둑에서와 같이 반드시 풀기 어려운 국면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에는 바둑 고수처럼 깊게 수를 읽어 난국(難局)을 풀어야만 한다.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삼국지』를 읽지 못한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고사인데, 국정을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가 교만하여 제갈량 같은 인재를 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느라고 안이하게 혈연, 지연, 학연 등 좁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공자(孔子)는 ‘三人行, 必有我師’라고 했다. 여기에도 사람이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희랍 문화의 원천인 그 고대 신화를 보면 ‘교만(heubris)’을 가장 몹쓸 악(惡)으로 보고 있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신의 징벌을 받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중에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이 있다. 오자서는 초(楚)나라 사람이었으나 아버지와 형을 죽인 평왕(平王)에게 복수하고자 그곳을 탈출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오(吳)나라로 흘러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행인(行人) 벼슬을 하면서 왕과 함께 국사(國事)를 모의(謀議)하는 멘토가 되었다. 그는 『손자병법』으로 잘 알려진 손무(孫武) 장군과 함께 오왕 합려(闔廬)를 잘 이끌어 열국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 하지만 합려의 뒤를 이은 아들 부차(夫差)는 오자서의 간곡한 충언을 듣지 않고 간신 백비(伯)의 감언이설에 속아 오자서를 죽임으로써 월(越)나라 구천(句踐)에게 패배하게 되고 오나라는 드디어 멸망하고 말았다.
제21대 대통령은 이제 ‘하수(下手) 대통령’이란 오명을 남긴 전임자를 반면교사로 삼아, 부디 우리나라를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