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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의 눈물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형섭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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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죽을 끓이는 가마솥에서 눈물이 난다. 가슴이 따뜻해서 흘리는 것일까? 아니면 슬퍼서 우는 것일까? 불에 몸이 점점 달아오르면 속에 품고 있는 온갖 잡것들이 익어서 암소 누렁이의 먹이가 되니 기쁨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어릴 때 자란 시골 옛집 뒷간 옆에는 큰 가마솥이 달린 부엌과 외양간이 있었다. 입구에는 뜨물과 음식 찌꺼기를 모두 모아서 쇠죽을 끓일 때 사용하던 버지기가 있었다. 쇠죽은 여물을 썰어서 고구마잎, 콩깍지 등과 함께 먼저 넣고 그 위에 고운 등겨를 뿌리고 마지막에 버지기에서 찌꺼기들을 퍼다 넣고 불을 지펴 익히면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맛있는 쇠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집 소는 조석으로 죽을 끓여서 먹였다.
농촌에서 소는 큰 재산이다. 농사일도 소가 없으면 하기 힘들고 암소는 1년에 송아지 1마리씩 생산하니 그 소득으로 자녀들 공부도 시킬 수 있었다.
아버지는 외양간 가마솥에 불을 지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셨고 저녁이면 다시 그 일을 해야만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쇠죽을 소에게 퍼 주고 그 솥을 행군 뒤 우물물을 가득 채워 두면 밑불 덕분에 목욕물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망태기와 낫, 호미를 들고 쇠꼴 구하러 들로 나갔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하천가 들판에는 종달새가 하늘 높이 올라가서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비행기가 추락하듯 땅으로 꽂히면 그 부근에 알이 있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보잘것없는 작은 알도 특미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종달새가 불쌍하다. 애써 낳은 알이 모두 도둑맞았는데 얼마나 슬펐을까 종달새의 노래는 울음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에 누나를 먼저 출산했다. 해방의 기쁨도 채 가기 전에 이념 전쟁이 시작되었고 남로당의 선전은 농민들을 현혹했다. 양반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고 하니 어느 농민이 싫어하겠는가? 낮에는 경찰의 세계였고 밤에는 빨갱이들 세상이었다. 그 때문에 누나는 아기였을 때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큰아버지 집도 이웃에 있었는데 좌익들이 밤에 불을 질러 모두 탔다. 누나가 살아 있었다면 난 이렇게 외로움에 사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삶도 소를 키우며 가마솥에 불을 땔 때마다 늘 고뇌로 가득 차 있었으리라. 슬픔이 가득했던 어머니가 다시 새 힘을 얻은 것은 내가 태중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난한 삶에 시달리고 좌우로 갈라진 싸움이 혼란스럽고 불안했지만 새 생명에 대한 희망의 꿈을 간직하고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들었다. 내가 두 돌이 지나서 시작한 병으로 5년을 시름시름 하시다가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철부지 난 아무것도 몰라도 아버지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냉정한 사람은 눈물이 없다. 눈물이 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죽은 사람은 눈물이 없다.
우리의 삶이 비록 힘들고 지쳐도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라면 모든 슬픔도 이겨내고 눈물도 서로 닦아줄 것이다. 아버지는 매일 쇠죽을 끓이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인간들에 대한 소회가 남달리 크셨을 것이다.
세상에는 온갖 잡것들이 많다. 알곡 같은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다. 껍데기 같은 사람, 구정물 같은 인간도 가마솥에 넣고 끓이면 훌륭한 쇠죽이 되는 것처럼 그런 신념으로 아버지는 사셨으니 적이 없었다.
가마솥 같은 존재이셨다.
하루는 이웃집에 사는 청년이 우리 집 나락을 훔쳐갔다. 도둑놈이 씨나락을 아느냐는 말이 있듯이 갑자기 당하고 나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뻔히 알고 있었어도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았다. 한순간 잘못으로 젊은이의 앞길을 망치는 일은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우리 집 가마솥은 무쇠로 만들어져서 투박해도 속이 깊고 온갖 농사 부산물이 들어가도 모두 수용했다. 밑에서 은은히 타는 불길을 품으면서 아버지의 고뇌도 함께 탔다. 골짝논 10마지기로 자녀들과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책임감에 매일 쇠죽을 끓이는 불 앞에서 마음의 눈물도 얼마나 태웠을까.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 하시던 아버지가 한평생 농사일로 고생만 하시다가 여름의 무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 날 새벽에 영원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장례를 마치고 평소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이 가마솥과 쟁기였다. 우리 집 누렁이 암소와 쟁기, 가마솥과 아버지는 떼어놓을 수 없었던 삶의 여정이었다.
우시장에서 팔려나간 누렁이와 이별했던 밤은 처량했고 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자꾸만 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농사일을 더 할 수가 없기에 오랫동안 정든 집을 팔았다. 근처 신축한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차마 버리지 못했던 아버지의 용구 가마솥과 쟁기는 컨테이너에 넣어 따로 보관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신 지 어언 30년이 지난 지금 나도 기력이 점점 쇠약하여지니 그 유품을 동생에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미미한 고물이지만 내 곁에 두었을 때 아버지가 함께 계신다는 믿음이 가득했고 향수가 깊은 기쁨이었는데 1톤 트럭에 싣고 떠나가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내가 가마솥의 눈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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