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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로 스며든 자양분

한국문인협회 로고 鄭有玹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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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도 놀랍고 감탄사가 연거푸 나온다. 그 배포는 어디서 나오고, 강한 그 힘은 또 어디서 솟구쳤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체구로 엄청난 일을 어찌 감당해 냈을까 싶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밥도 제대로 못 짓던 나의 억척이 변신은 오직 두 아이만큼은 가난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일념뿐이었다.
“진지하게 귀 좀 기울여 주세요. 가난은 우리까지만입니다.”라고 남편에게 사정하며 동의를 구한 것은 곧 세상에 태어날 아이에게까지 끼칠 영향에 대비해서다. 다행히 내 뜻에 합심해 준 남편, 여기저기 새로운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까운 주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이유가 가난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들에게 손을 벌려 구걸하는 것도 아님에도 마주치기만 하면 아래위로 쫙 훑어보며 없이 여기는 눈빛, 자존심이 뭉개진 것은 물론, 슬펐기 때문이다.
그 무렵 주물에 대해 일가견이 있던 K씨가 함께 동업해 보자고 제의해 왔다. 그의 권유에 솔깃한 남편, 조건 없이 문서를 작성하려고 할 때, 완강하게 가로막았다. “동업은 자칫 사람 잃고, 돈도 잃어요. 우리는 젊으니까 실패해도 그 경험을 밑거름으로 삼고 혼자 시작해 보세요.”라고 권유했다. 그러면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내가 돕겠다며, 두려워 말자고 자신감부터 불어넣어 주었다.
첫아이가 태어나 막 백일이 지나서다. 전혀 해 보지도 않는 일, 경험과 기술도 없이 주변의 경험담으로만 소규모의 주물 자영업을 시작했다.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어설펐고, 기술자들도 임금을 두 배나 인상해 달라며 생떼를 부리고, 거래처의 횡포 등 애로사항도 적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각자 1인 몇 역할을 맡아 혼신을 쏟아부었다. 남편은 직접 기술을 배워 익혀 가며 거래처도 바꾸었다. 그 후부터 직원들에게는 공휴일은 주었지만 사장인 남편은 구정과 추석 명절만 제외하고 공휴일도 없이 몸소 현장 체험으로 숙지해 나갔다.
나 역시 적극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 직원들에게 삼시 세끼와 새참까지 하루 5차례 음식을 직접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무엇이든 편하게 앉아서 전화로 주문하면 척척 주문한 장소까지 배달되는 세상이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배달된 품목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시절은 석유풍로에 사용하는 석유와 쌀과 연탄, 얼음, 중국음식 외에 필요한 물품은 직접 가서 사야 했다.
하루빨리 셋방살이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집념으로 무엇이든 노동력으로 직접 해결했다. ‘나’라는 존재감을 잊고 살 때였다.
“젊은 엄마가 모양 좀 내고 예쁘게 하지, 그게 뭐야?”
안집 아주머니가 딱하다는 듯이 한마디씩 하곤 했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던 외모에 신경 쓸 겨를은커녕 오히려 새로운 꿋꿋한 힘이 생겼다. 해가 거듭될수록 희망의 빛은 밝게 다가왔다. 금쪽같은 내 새끼들, 해맑게 웃는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몸은 고달프지만 행복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도 직원들의 식사 문제는 그대로 변함없었다. 재래시장에서 직접 식자재를 사다가 만들어 먹였다. 이때 거금을 들여 유모차 한 대를 구입했다. 보통 한 칸이었으나 일부러 아래위로 된 두 칸짜리 비싼 유모차를 선택했다. 우리 아이가 타고 다닌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래 짐칸은 자전거포에서 손을 좀 봐 기존의 짐칸보다 크게 늘려서 시장 보는 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그동안 작은애는 등에 업고, 큰애는 걷게 하고 양손은 식자재를 무겁게 들고 다닌 수고로움을 덜어 주었기 때문이다. 작은애는 윗칸에 태우고, 식자재는 아래칸에 싣고, 가벼운 몸으로 밀고 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때로는 걸어가기 싫다고 떼쓰는 큰애도 작은애와 함께 태우고 다녔다. 그렇게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합심하여 은행 빚을 안고 우리의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휴일도 없이 그토록 몸이 부수어지도록 노력해 온 것은 뼈에 사무친 가난의 모멸감 때문이었다. 상대에게 인격의 존중보다 물질적으로 대하는 주변인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 그때의 시선을 어찌 잊겠는가. 신혼 초부터 부실한 혼수를 트집 잡아 입에 오르내리더니, 가난한 친정 부모님까지 들먹이는 모욕적인 행위에 화가 나고 서러웠다. 이전까지만 해도 세상물정을 전혀 몰랐던 나로서는 그때 비로소 경제적인 물질이 우선임을 실감한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막내로 자란 아무것도 모른 내가 어찌 다 감당해 냈을까 싶다. 가난에 대한 무시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8년 동안 매일 하루에 5섯 끼니씩 직원들의 식사를 직접 해 먹였던 일, 눈 감으면 모두 엊그제 같다.
이따금씩 “참으로 잘해냈다, 장하다.” 하고 토닥토닥 나 자신을 스스로 감싸 주곤 한다. 지나간 일련의 일들, 사랑하는 내 가족이 있었기에 저 밑바닥에서부터 강한 의지가 용솟음쳤을 것이다.
그 배포와 그 힘, 어느새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에 의해 마주한 은빛이 무심하다. 그러나 고달팠던 땀방울은 오늘의 값진 자양분이 되어 흡족한 미소로 입가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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