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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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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_ 시인|마네킹|윈도 디자이너    무대_ 옷가게 진열창

 

1. 마네킹
어둠 속 무대에 거리의 소음들이 들린다. 비로소 무대가 밝아 온다. 백화점 진열창이 밝아 온다. 창밖으로 거리가 보인다. 윈도 디자이너가 마네킹을 안고 들어온다. 마네킹을 제자리에 세운다. 디자이너, 적당한 자세를 만들고 마네킹의 옷맵시를 이리저리 고쳐 본다. 그러다가 만족한 모습으로 무대를 나간다. 조용하게 흐르는 음악이 끊어질 때까지 마네킹은 고정된 자세를 지키고 있다. (긴 사이) 음악 사라지면서….

 

마네킹 : (이윽고) 안녕하세요? 전 마네킹이에요. 그래요. 마네킹이요. 전 제가 누군지 잘 알아요. 전 아름다워요. 어쩌면 여러분보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전 늘 새 옷만 입어요. 그것도 의상 디자이너가 공들여 만든…. (웃는다.) 이렇게 공들인 옷을 입고 서 이 좁은 진열장 안에서 불이 꺼질 때까지 한자릴 지키고 서 있죠. 하지만 전 외로워요. 저렇게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만, 좀체 나에게 눈을 주지 않아요. 돈 많은 부인은 부인대로 제가 맘에 차지 않고요. 가난한 집안의 여인들은 제가 입은 이 옷들이 병풍 속의 떡처럼 보이죠. 그래서 전 늘 외롭답니다. 그냥 지나치기만 하는 저 사람들을 불러 볼까요? (웃음을 머금고 부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절 좀 보세요. 보시라고요. 저것 보세요. 그냥 지나가잖아요. 허지만 괜찮아요. 바깥은 춥고 바람까지 불어서 언제 저 같은 마네킹에게 눈을 줄 여유가 있겠어요? 게다가 이제 곧 이 쇼 윈도에도 불이 꺼질 시간이에요. 전 상관없어요. 전 저 자신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요. 이렇게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친 제 모습을 보는 것밖에. 전 제가 누군지 몰라요. 어디서 어떻게 와서 어떻게 이 자리에 서게 됐는지. 그 또한 뭔 상관이겠어요. 이제 불이 꺼지고 이 윈도가 어두워지면…. 여러분은 낮고도 긴 한숨 소리 같은 걸 들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다 우리 마네킹들이 하루 일을 끝내고 쉬는 한숨 소리랍니다. 이제 어둠이 짙어지면 술 취한 남자는 저 가로등 밑을 서둘러 지나갈 테고…. 사랑에 속고 돈에 속은 가난한 이웃들은 안개같이 두터운 우수를 한몸에 안고 이 창밖을 지나갈 겁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루 일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들면 우린 이렇게 어둠을 지키며 또 다른 하루를 기다리게 되죠. 기인 하룻밤이 지나고 저기 산꼭대기로 하루해가 떠오르면 조용하던 거리는 또다시 부산해지고…. 이 앞을 지나면서 여러분은 또다시 절 보게 될 거예요. 보세요.

 

시인이 들어온다. 창백한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 때 절은 옷차림에 구부정한 모습으로 시인이 들어온다. 마네킹을 보자, 흠칫 멈춰 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반쯤 입을 벌리고 마네킹을 쳐다본다. 마네킹은 똑같은 자세로 멈춰 선 남자를 내려다본다. 그녀의 눈에 매혹당한 듯 또 한 발 다가서는 시인. 마네킹이 한 눈으로 윙크를 한다. 놀란 시인이 껑충 정신을 차리고 오버 깃을 치켜세우며 서둘러 무대를 나간다.

 

마네킹 : (웃으며) 끝날 때가 됐군요. 오늘도 하루 일이.

 

디자이너가 들어와 윈도의 불을 끈다. 무대의 조명이 나간다. 조명이 나간 어두운 무대에, 잠에서 깨어난 도시의 소음들이 들린다. 이윽고 그들 소리가 사라지면서….

 

2. 시인
다시 마네킹이 있는 진열창이 밝아 온다.

 

마네킹 : 하룻밤이 지났어요. 간밤엔 저 남산 위로 불꽃놀이가 있었어요. 밤새 쏟아지는 불꽃으로 눈이 부셨어요. 불꽃놀이를 즐기러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랜만에 황홀한 하룻밤을 보냈어요. 제가 입고 있는 이 옷이 바뀌었죠? 아침에 디자이너가 골프복으로 갈아입혔어요. 그분은 남자지만 여신 같아요. 어떻게 여자들의 들뜬 맘을 그렇게도 잘 아는지. 그분이 디자인한 옷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요.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이 윈도 뒤로 그분의 작업실이 있어요. 새로 나온 패션 잡지들, 한 바구니의 잘 익은 사과, 그리고 아직도 미완성인 몇 벌의 옷들, 그런 것들이 놓인 저 작업실은 언제나 깔끔하고 환하게 밝아요. 저기 간밤에 찾아왔던 그 시인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군요. 부스스한 머리에 흐트러진 몸가짐으로 봐서 저분은 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밤새 술을 마셨던가….

 

시인이 웅크린 모습으로 들어온다. 마네킹은 입을 닫고 간밤과는 다른 자세를 취한다. 시인은 머뭇거리며 들어오다 선다. 잠시 주위를 살핀다. 은밀하게. 그러다가 진열창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녀의 미모에 또다시 넋을 잃고 올려다본다.

 

마네킹 : (이윽고, 몸을 고정한 채) 안녕하세요? 오실 줄 알았어요. 간밤엔 왜 그렇게 정신없이 나갔죠?

 

시인 : (멍하니) ……?

 

마네킹 : 가까이 오세요. 더 가까이 오시라니까. 난 외로워요. 얘길 나누고 싶어요. 얘길 해 봐요. 뭣이든지? 간밤엔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셨죠? 이 이른 아침엔 뭔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일부러 날 보러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말해 보시라니까?
시인 : (손목시계를 보며) 약속 시각이 다 됐어. (주머니에서 원고지를 꺼내며) 난 아직도 이 한 줄의 시로 밥을 먹어야 하는데도…. 저런 걸 찾는 여자는 누굴까.

 

그는 무대를 나가다가 멈춰 선다. 다시 한 번 마네킹을 뒤돌아본다. 그러다가 무대를 나간다. 동시에 조명도 사라진다.

 

3. 시인과 마네킹
음악 조용하게 흐른다. 다시 진열장에 불이 들어온다. 디자이너가 돌려 세운 마네킹의 옷을 벗긴다. 돌아선 마네킹의 알몸이 드러난다. 디자이너는 콧노랠 부르며 그녀에게 새 옷을 입히고 있다.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 스카프에 모자까지 씌운다. 그는 마네킹의 돌아선 모습을 보며 여기저길 손본다. 끝내 만족한 모습으로 마네킹을 쳐들고 진열장으로 돌아온다. 마네킹을 제자리에 세우고 또다시 꼼꼼하게 살핀다. (사이) 이윽고 디자이너가 그의 작업실로 사라진다. (사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인이 들어온다. 곧장 마네킹 앞으로 와서 선다.

 

마네킹 :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시인 : 이건 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네.
마네킹 : 어때요? 제 모습이요?
시인 : 빌어먹을. 카멜레온이 따로 없군.
마네킹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시인 : 간밤엔 두통 때문에 잠을 못 잤어.
마네킹 :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그 끈끈한 시선이요. 꼭 내 몸의 여기저길 더듬는 거 같아. 못 견디겠어요. 아냐. 꼭 그런 기분만은 아녜요. 뭐라 할까? 조금은 들뜬 기분이요. 설레기도 하고요.
시인 : 언제 보아도 귀부인이군. 동화 속의 공주야.
마네킹 : 어딜 보세요. 그 눈길이요. 정말 묘한 기분이 들어요.
시인 : 이건 마네킹이 아냐. 살아 있는 인형 같아.
마네킹 : 그만, 그만 보세요. 정말 못 견디겠어요.
시인 : 그래. 살아 있는 아가씰 세워 논 거 같아.
마네킹 : 난 아가씨가 아니에요. 며칠 전 공장에서 나왔어요. 상품처럼. 그래요. 난 상품이에요. 얼마간 이곳을 지키다…. 저 디자이너의 눈길에서 벗어나거나,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 난 또 공장으로 갈 거예요. 그리곤 뜨거운 불길에 들어가 난 한 덩어리의 플라스틱 반죽이 될 거예요. 그 뜨거운 반죽이 기계 속을 거쳐 나오면 난 또 다른 모습의 마네킹이 되어 나와요. 그럼, 몇몇 여공들이 완성된 내 몸뚱이의 거친 부분을 갈고 닦아서 살아 있는 여자처럼 만들어내요. 그것이 마네킹의 일생이고 주어진 운명이랍니다. 때로는 내 몸뚱이의 일부가 고물장수의 손수레 위에 얹혀 폐품 수집소로 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난 울지 않아요. 떨어져 나간 내 몸뚱이에 또 다른 사지가 생길 테니까.
시인 : 그래. 넌 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워.
마네킹 : 아니에요. 그렇지도 않아요. 내 몸뚱일 만든 것도 살아 있는 여잘 모델로 한 거니깐.
시인 : 아냐. 난 너에게 반했어.
마네킹 : (수줍게) 그러지 마요.
시인 : 정말이야. 한순간에 마력처럼 널 사랑하게 됐단 말야.
마네킹 : (살짝 웃으며) 사랑이요?
시인 : 그래, 사랑.
마네킹 : 난 마네킹이에요.
시인 : 넌 아름다워. 난 너를 사랑해.
마네킹 : 그러지 마요.
시인 : 네 입에 키스를 하고 싶어. 이렇게. (그는 유리문에 키스를 한다. 마네킹, 흠칫 호흡을 멈춘다) 정말이야. 넌 아름다워.
마네킹 : 가세요. 이제 곧 불을 끌 시간이에요.
시인 : 해맑은 얼굴에 오뚝한 코, 늘씬하게 뻗은 다리.
마네킹 : 불을 끄면 난 또 악몽에 잠겨요.
시인 : 목덜미까지 덮은 그 머리카락. 그래, 널 통째로 내 손에 넣고 말 거야.
마네킹 : 그럼, 아저씬 도둑이 돼요.
시인 : 도둑이 돼도 좋아. 난 꼭 널 품에 안고 말 거야.
마네킹 : 무서워요. 가세요, 그만. 그러지 않아도 우린 불을 끄면 어둠 속에서 밤새 악몽에 시달려요.
시인 : 기다려. 불이 꺼지고 저놈의 디자이너만 돌아가면 난 너를 훔칠 거야.
마네킹 : 그러지 마요.
시인 : 넌 그냥 두기엔 너무 아름다워.
마네킹 : 아무리 아름다워도 우린 그저 한 덩어리 플라스틱에 불과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공장의 그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던 내 몸뚱이요. 기계들이 새로운 내 모습을 찍어내고. 난 조립 라인에 실려 바닥까지 갔어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몇몇 여자들이 달려들어 내 몸뚱일 조이고 닦아내고 갈아내던 기억이 어제 같아요.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에요. 그 뜨거운 불길이요.
시인 : 정말이야. 넌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여인이야. 한갓 화학물질로 빚어낸 상품같이 보이지 않아.
마네킹 : 가세요. 주인이 오네요. 불을 끌 시간이에요.

 

디자이너가 들어온다. 그는 진열창의 불을 끄고 퇴장한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지켜선 시인의 모습만 드러나 보인다. 그는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시인 : (주위를 살피며) 난 너를 이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어. 너를 가질 거야.

 

다시 주위를 살피며 품에서 유리를 자르는 도구를 꺼낸다.

 

마네킹 : (어둠 속에서, 비명처럼) 안돼요!
시인 : (다가서며) 널 가질 거야.
마네킹 : 그러지 마요! 그럼 안 돼요!

 

시인은 힘을 다하여 두꺼운 유리창을 자르기 시작한다. 음악과 함께 조명이 나간다.

 

4. 시인의 사랑
다시 어둠 속에서 달리는 차들의 소리가 자욱하게 들린다. 밤늦은 시간, 찹쌀떡 장수가 지나간다. 길게 소리치며…. 시인의 방이 드러난다. 벽면을 타고 어지러이 책들이 쌓여 있다. 시를 쓰는 작은 소반 위에 원고지와 볼펜이 놓여 있다. 그 옆에 밤새 그가 마신 술병들이 보인다. 그는 지금 취했다.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마신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는 몽롱한 눈으로 소반 앞으로 다가가 시를 쓴다. 몇 장을 끼적거리다 원고지를 찢어버린다. 다시 시를 쓰려고 애쓴다. 술병에 손이 간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고 또다시 원고지에 손이 간다. 또다시 원고지를 찢어낸다. 끝내 그는 지치고 몽롱한 눈으로 몸을 기댄다. 그의 눈이 한쪽 벽면에 그의 외투로 감싸 세워둔 마네킹에게 간다.
시인은 마네킹 쪽에 눈을 둔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일어나 마네킹 앞으로 다가간다. 움직임이 없는 마네킹의 몸에서 자신의 외투를 벗겨낸다. 그는 마네킹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뚫어지게 바라본다. 마네킹의 체온을 느끼려는 듯,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내려온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턱을 받치며…. 그는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레 입술을 마네킹의 얼굴로 가져간다. 꼼짝 않는 마네킹의 입에 입을 맞춘다. 그러더니, 그의 떨리는 한 손이 마네킹을 부여안고, 또 다른 한 손이 그녀의 가슴을 더듬는다. 그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진다. 그의 손이 가슴을 지나 조심스레 아래로 더듬어 내려온다. 그는 무릎을 꿇고 마네킹의 다리를 잡고 잠시 얼굴을 묻는다. 그의 숨결이 가빠진다. 시인의 입술이 마네킹의 다리를 훑어 내려온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꼼짝 않는 마네킹. 흐트러진 그의 호흡은 더욱 열기를 더해 간다.

 

시인 : (거친 호흡 속에) 넌 내 꺼야. 끝내, 흐흐흐, 훔친 사과가 맛이 있다더니. (다시 입술로 더듬다가) 훔친 계집도 맛이 있군, 흐흐흐. (시인의 한 손이 마네킹의 다리를 더듬어 올라간다.)
마네킹 : 그, 그만해요.
시인 : (흠칫) 뭐야? (올려다보던 시선이 다시 내려오며) 취했군, 취했어. 흐흐흐. (다시 마네킹의 다리에 손이 가는데…)
마네킹 : 제발?
시인 : (또 흠칫) 뭔 소리야?
마네킹 : 그만, 그만하세요.
시인 : 이건? 마네킹이 아니잖아?
마네킹 : 난 마네킹이에요.
시인 : (숨을 몰아쉬며) 아냐. 넌 마네킹이 아냐. 넌 살아 있어. (다시 입술로 더듬는데…)
마네킹 : (그의 머리를 움켜잡으며) 그만해요, 제발. (시인, 흠칫 마네킹을 올려다본다) 그래요. 난 살았어요. 보세요. 말도 하고. (시인, 더더욱 놀란다) 난 움직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로봇 걸음으로 몸을 떼어놓는다. 시인, 여전히 얼이 빠져서) 웃을 줄도 알아요, 이렇게. 춤도 춰요, 춤이요. 춤, 음악, 음악을 틀어요.
시인 : (몽롱한 눈을 비비며) 음악? 음악이라고 했나?
마네킹 : 예, 춤을 출 수 있는 음악이요.
시인 : 그래, 그렇다면. 어디?

 

그는 흐트러진 술병 옆에 놓인 라디오에 손이 간다. 버튼을 누른다. 조용한 경음악이 흘러나온다. 마네킹은 음악에 맞춰 특유의 로봇 춤을 춘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다가 조금씩 강도를 더해 간다. 빨라진다. 격렬해진다.
시인은 몽롱한 눈으로 춤추는 마네킹을 보고만 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릴 흔든다.

 

시인 : 아냐. 이건 술 때문이야. 아냐. (머릴 좌우로 흔들며) 이 약 때문일지도 몰라. (그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낸다) 이걸 너무 많이 먹었어. (그는 다시 알약 하나를 꺼내 들여다본다. 마네킹의 춤은 계속되고 있는데…. 그는 망설이다가 알약을 입으로 집어넣고 엉금엉금 기어가 술병을 집어 든다. 벌컥벌컥 마신다) 그래. 이놈의 알약 때문이야. 묘하단 말야, 흐흐흐. 이놈만 먹으면 죽었던 내 뇌세포들이 고개를 쳐든단 말이야. (마네킹에게) 그만해. 그만하라니깐! (마네킹은 여전히 로봇 춤을 추고 있다) 이런 빌어먹을. 언제까지 춤만 추겠다는 거야.

 

그는 다시 더듬거리며 라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음악이 그친다. 동시에 그녀의 춤도 멈춘다.

 

시인 : 맙소사. (마네킹의 몸뚱이가 또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간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마네킹 : ……?
시인 : 넌 이곳까지 실려오며 한마디 말도 없었어.
마네킹 : 난 마네킹이에요.
시인 : 그래, 알아. 넌 마네킹이야. 넌 이제 내 꺼야, 흐흐흐. 여긴 내 방이고, 열 평짜리 임대 아파트. 십이 층이야. 난 이 높은 곳에서 시를 쓰며 먹고 살아. 들어오는 수입이 없으니까 늘 개처럼 굶주리고 살지, 흐흐흐. 몇 줄의 시를 쓰고, 난 또 그걸 들고 먹이를 찾아 나서지. 얼마간 날 도와주던 그들도 이제는 날 외면한 지 오래야. 그래도 난 그들을 찾아가, 주린 배를 안고서. 술을 마시고, 난 취한 몸을 가누며 이 방으로 돌아와.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이 어둔 방에서, 흐흐흐. (흐물흐물한 웃음소릴 내면서) 난 또 시를 끄적거려. 언젠가는 내가 주목받는 시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이젠 아냐. 알코올과 이 알약의 포로가 되면서, 흐흐흐. 난 오장육부가 썩어버렸어. 내 몸엔 썩은 살코기만 훔쳐 먹는 하이에나 냄새가 난대, 흐흐흐. 나와 동거하던 그 계집이 이 방을 나서면서 하던 말이야, 흐흐흐. 그래. 난 굶주린 하이에나야. 난 늘 먹이를 찾아 바람 부는 거리를 헤매고 있어, 냄새를 풍기며. 모두가 외면하는 황야를 나 혼자 나도는 거야, 흐흐흐. 행여 누군가 나에게 먹이를 줄까, 흐흐흐. 하지만 아냐. 누구도 이 썩은 몸뚱일 거들떠보지도 않아. 하지만 난 아무도 눈을 주지 않는 이 버림받은 세상에서…. (머릴 흔들며) 그래. 난 사람이 그리워. 눈길만이라도 주고받을…. 그 누군가가 그리워. 그래. 난 굶주린 하이에나야. 그래서 난 그 번잡한 백화점 근처를 어슬렁거렸어. 누군가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면서. 이 굶주린 하이에나에게, 흐흐흐. 그런 내가. (그는 술병을 찾아 입으로 가져간다) 그 백화점 앞을 지나면서, 흐. 첨으로 누군가가 날 보고 있다는 걸 느꼈어. 바로 그 쇼윈도 안의 마네킹이, 흐흐흐. 지나가는 이 몸뚱이에 눈길을 주더란 말야, 흐흐흐. 그 좁은 쇼윈도 안에서…. (또다시 흐물흐물 웃는다) 분명히 날 보고 있었어, 흐흐흐.
마네킹 : 그래요. 난 몇 번 아저씨가 내 앞을 지나가는 걸 봤어요.
시인 : 그래. 그것도 낯선 여자가, 흐흐흐.
마네킹 : 난 여자가 아니에요. 마네킹이에요.
시인 : 마네킹 같지가 않았어. 넌 살아 있는 여자 같았어.
마네킹 : 난 마네킹이에요.
시인 : 그래, 마네킹, 흐흐흐.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간다.)
마네킹 : 아저씬 왜 여잘 찾지 않으세요?
시인 : 찾았지. 몇 번인가. 그때마다 그들은 나에게서 뭔갈 뺏어갔어. 뿐만 아냐. 그들은 나한테서 너무 많은 걸 요구했어. 하날 주면 둘을 바라고, 둘을 주면 또 다른 하날 바랐어. 하지만 나에겐 그만한 능력이 없어. 난 병든 몸이거든, 흐흐흐.
마네킹 그럼, 병원을 찾아가세요.
시인 : 가도 고칠 수가 없어. 흐흐흐. 난 불치병에 걸렸어. 내 심장은 한꺼번에 댓 번을 뛰어. 흐흐흐, 그러다가 열을 셀 동안 뚝 그쳐 버리지. 그럼 난 죽어. 그러다가 또다시 심장이 뛰어. 그럼, 난 또 살아. 죽었다 살아나고, 흐흐흐. 살다 죽기를 반복하면서, 흐흐흐. 어느새 내 뇌세포들이 하나둘 망가졌어. 내 이 머릿속엔 썩은 세포들로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내 몸엔 썩어 문드러진 고름 냄새가 나. 자, 보라고?
마네킹 : 난 마네킹이에요.
시인 : 그래. 넌 마네킹이지.
마네킹 : 내 몸속엔 고동치는 심장도 없고 따스한 체온도 없어요.
시인 : 난 그런 네가 더 좋아.
마네킹 : 난 가야 해요.
시인 : 넌 못 가, 흐흐흐.
마네킹 : 내가 설 자린 백화점 쇼윈도예요. (새삼) 근데 여기가 어디예요?
시인 : 빌어먹을. 내 방이라니까, 흐흐흐.
마네킹 : 난 가야 해요. (흐트러진 몸매를 가다듬으며) 가야 해요. 날 실어다 주세요.
시인 : 실어다 줘?
마네킹 : 그래요. 아까처럼.
시인 : 안돼.
마네킹 : 보내줘요. 난 가야 해요!
시인 : 난 널 보낼 수가 없어!
마네킹 : 갈 거야! 저 문으로!
시인 : (마네킹을 밀어내며) 어딜 가. 못 가. 문을 잠글 거야. (시인, 그는 방문을 잠그려 뛰어나간다)
마네킹 : 안 돼요! 보내줘요, 제발!
시인 : (다시 들어오며) 문을 잠갔어. 자물쇠로.
마네킹 : 싫어요! 백화점으로 실어다 줘요!
시인 : 싫어!
마네킹 : 그럼, 난 어떡해요?
시인 : 여기 있어.
마네킹 : 그럼 그 쇼윈도는 누가 지켜요?
시인 : 그 호모같이 생긴 디자이너가 다른 마네킹을 세울 테지.
마네킹 : 안 돼요. 난 여기가 싫어요.
시인 : 싫어도 나와 함께 있는 거야.
마네킹 : 그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난 또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그 자릴 지켜야 해요.
시인 : 안돼.
마네킹 : 문을 열겠어요. 내 손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시인 : 가도 소용없어. 열쇠는 내 손에 있어, 흐흐흐.
마네킹 : 어서 열어줘요?
시인 : 싫다니까. 난 놔줄 수가 없어.
마네킹 : 왜요?
시인 : 말했잖아. 난 외로운 하이에나야.
마네킹 : 난 하이에나가 아니에요.
시인 : 내 옆에 있으면 누구나 하이에나가 돼. 날 버리고 떠난 그 미친 계집도 그랬어.
마네킹 : 난 그 여자가 아녜요.
시인 : 알아, 마네킹. 하지만 난 외로워. 난 네가 필요해.
마네킹 : 그건 아저씨 일이에요. 난 그런 건 몰라요.
시인 : 모르니까 같이 있어 줘.
마네킹 : 그런다고 아저씨한테 뭔 도움이 돼요?
시인 : 돼. 난 말동무가 필요해.
마네킹 : 난 말 못하는 마네킹이에요.
시인 : 그럼, 듣기라도 해! 외로운 하이에나가 황야를 헤매며 어떻게 울부짖는가를. 들어보았나? 썩은 살코기를 찾아 나선 외로운 하이에나가 우는 소리를. 들어봐. (그는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에다 대고 울부짖는다) 우우우우! 우우우우! 이게 하이에나가 우는 소리야. (그는 하이에나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절박한 소리로 울부짖는다) 우우우! 우우우!
마네킹 : 그만! 그만하세요. 난 듣지 못하는 마네킹이에요.
시인 : 그럼, 거기 서 있기만 해.
마네킹 : 여긴 내가 설 자리가 아녜요.
시인 : 빌어먹을! 그냥 이곳이 쇼윈도라고 생각하고 날 보고만 있으란 말야!
마네킹 : 난 볼 수도 없는 플라스틱 덩어리예요. 아저씰 두고 떠나간 그 여자가 아니에요. 보세요. 난 차가운 상품 덩어리에 불과해요. 펄펄 뛰는 심장도 없고….
시인 :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했잖아! 내 심장은 수시로 죽었다가 살아나. 살았다가 죽어버리고.
마네킹 : 난 그런 걸 느낄 머리도 없어요!
시인 : 이런 빌어먹을! 내 머린 썩은 고름 덩어리로 가득 차 있어. 이렇게 머릴 흔들면 머릿속의 고름들이 물처럼 출렁거려. 보라고!
마네킹 : 난 그마저도 못 느끼는 플라스틱이에요. 핏줄도 신경도 없는 돌덩어리라고요.
시인 : 그래도 좋아. 돌덩어리든 나무토막이든 내 곁에만 있어.
마네킹 : 싫어요. 난 못해요. (울음을 터트리며) 아저씨를 도와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시인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모두가 떠나가고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
마네킹 : 아저씨?
시인 : 날 좀 도와줘. 제발 부탁이야. 난 외로워. 누군가 날 지켜보는 사람이 필요해. 내 곁에만 있어 줘. 그럼 되는 거야. 말을 못해도 좋아. 듣지 못해도 좋다고. 돌덩어리라도 좋단 말이야. 거기 그렇게 서서 날 보기만 해 줘. (다시 술을 마신다.)
마네킹 : 그만 마셔요, 제발?
시인 : 닥쳐!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 그 미친 계집처럼. 날 그냥 내버려 둬! 그냥! 하는 대로 보고만 있어.
마네킹 : 난 돌아가야 해요!
시인 : 넌 못 가.
마네킹 : (그의 팔을 잡고 흔들며) 보내줘요 제발! (울면서) 아니면 저 창밖으로 뛰어내릴 거예요!
시인 : 뛰어내려. 그럼 넌 산산조각이 날걸, 흐흐흐.
마네킹 : 보내줘. 보내주지 않음 소릴 지를 거야!
시인 : 소릴 질러. 살려달라고, 흐흐흐.
마네킹 : (비명처럼) 살려줘요! 누구 없어요? 살려줘….

 

시인이 사나운 짐승처럼 마네킹에게 달려든다. 세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릴 지르는 마네킹! 그런 마네킹을 힘껏 가로채는 시인의 손에 마네킹의 블라우스가 북 찢어진다.

 

마네킹 : (찢어진 옷자락으로 가슴을 가리며 또다시 소리친다) 살려줘요! 살려줘요! 누구 없어요?

 

시인이 또다시 먹이를 가로채는 짐승처럼 그녈 덮친다. 마네킹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쓰러진 그녀의 몸뚱이 위로 몸을 던지는 시인! 저항하는 마네킹이 시인의 한 손을 물어뜯는다.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구는 시인. 재빨리 일어나 저만큼 도망치는 마네킹.

 

시인 : (물린 손을 움켜잡고 몸을 일으키며) 빌어먹을. 이리 와.
마네킹 : 안 돼! 오지 마!
시인 : (다가가며) 이리 와. 오라니깐?
마네킹 : 오면 죽일 거야! (술병 하날 집어 든다)
시인 : (다가서며) 하, 그 정도로?
마네킹 : 오지 마! 오면 죽어! (힘껏 술병을 소반에다 내리친다. 요란한 소리로 깨어진 술병을 쳐들고) 찌를 거야. 오지 마.
시인 : 그래, 찔러. 찌르라니까, 흐흐흐.
마네킹 : (뒷걸음질로 벽에 가 부딪히며, 절망에 차서) 오지 마!

 

그런 마네킹을 그대로 덮치는 시인. 마네킹이 비명과 함께 시인의 배를 찌른다. 시인이 배를 움켜잡고 바닥으로 주르르 주저앉는다.

 

마네킹 : (공포에 차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안 돼! 악! 누구 없어요? 도와줘요! (허우적거리는 시인을 내려다보면서) 안 돼에!
시인 : (신음 속에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며) 나도 안 돼. 난 널 놓아 줄 수가 없어.
마네킹 : 악!

 

마네킹의 비명 속에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는 시인. 구석에 몰린 마네킹을 사납게 움켜잡는다.

 

마네킹 : (몸부림 속에) 안 돼! 이러지 마요!

 

더욱 사납게 그녀의 옷을 찢어 팽개치는 시인. 절박한 소리로 울부짖는 마네킹! 더욱 격렬해지는 시인의 몸부림, 거친 숨결! 이에 저항하는 마네킹의 처절한 모습.

 

시인 : (신음 속에) 이런 빌어먹을! 이건 진짜 플라스틱이잖아. (그녀의 뺨을 갈기며) 그대로 있어. 그대로!

 

시인은 어깨로 마네킹을 밀어붙인 채, 피 묻은 손으로 급히 바지를 벗는다. 그런 사내의 손을 뿌리치고 반라의 몸으로 도망치는 마네킹.

 

시인 : (다가서며) 이리 와. 넌 뛰어봤자 벼룩이요, 흐흐흐, 날아봤자 파리야. (피가 흐르는 배를 움켜잡고서) 이리 와. 어서?
마네킹 : (뒷걸음질로) 오지 마! 오면 난 저 창문으로 뛰어내릴 거야!
시인 : (신음 속에) 흐흐흐, 넌 못 가. (다가가 다시 마네킹의 몸을 움켜잡으려 한다)
마네킹 : 갈 거야! 저 창문을 부수고 뛰어내릴 거야!
시인 : 이리 와! 오라고! (한 손으로 배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 마네킹을 잡으려 한다. 신음과 함께) 이리 와!
마네킹 : 살려줘! 갈 거야! 악!

 

시인의 피 묻은 손을 피해 몸을 돌린 마네킹이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본능적인 순발력으로 간신히 추락하는 마네킹의 한 다리를 움켜잡는 시인. 마네킹의 비명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시인의 양손에 그녀의 다리 하나가 잡혀 있다.

 

시인 : (얼이 빠져) 이건 뭐야? 뭐냐고? (그녀가 뛰어내린 창가로 뛰어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악! 안 돼! 이런 빌어먹을! 저 사람들 좀 봐! (그는 멈칫멈칫 뒷걸음질을 친다. 떨어진 마네킹의 한 다릴 가슴에 안고서 다시, 마네킹의 다리에 눈이 간다.) 이건 뭐야! (벽을 향해 던지며) 이게 아니잖아. 아냐. 이건 아냐! 이런 빌어먹을! (절망에 차서) 넌 못 가, 그렇게 쉽게. (운다) 난 널 놓아줄 수가 없어. 이런 빌어먹을!

 

멀리서 구급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일어난다.

 

시인 : 저건 뭐야? 아냐. 이렇게 널 보낼 순 없지. 따라갈 거야. 지옥까지도!

 

시인은 또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더니…. 한순간 그의 몸이 마네킹이 추락한 창문을 향해 전신을 내던진다. 떨어지는 시인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다… 뚝, 그친다. 멀리서 다가오는 구급차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서서히 조명이 빠져나가며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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