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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멘토가 있었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선우

수필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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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자락 고향 마을은 하늘만 열려 있었다. 자갈투성이 신작로에 버스가 하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공주와 갑사를 하루에 두 번 오갔다.
갑사에서는 치는 저녁 범종 소리에 비로소 허리를 펴고 하던 농사일을 멈추었고, 새벽 종소리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루를 여는 순후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사기 등잔으로 어둠을 밝히던 그곳에서 나는 유년을 살았다.
우리는 딸부잣집이었다. 딸만 일곱인 집에 내가 다섯째였으니 애초부터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었던 봄날, 교회 교사였던 둘째 언니가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얀 한복에 긴 망사를 늘어뜨리고 면사포를 쓴 신부는 천사처럼 예뻤다. 결혼식이 끝나고 가족사진을 촬영할 때 우리 가족과 친척들까지 신랑 신부와 사진을 찍었지만, 그 속에 나만 빠졌다. 엄마가 언니들과 동생들은 챙겼지만 내 이름은 끝내 불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 제발~ 나도 있어’라면서 간절히 나를 주목해 주기를 바랐던가.
혼인 잔치의 여흥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해 우리 집에 특급 태풍 같은 불행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침에 아버지께 인사하고 등교했는데 몇 시간 후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살림을 맡아 주던 딸도 시집가고, 한 달여 만에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엄마의 상실감을 어찌 형언할 수 있으랴. 논농사와 밭농사, 과수원 농사까지 해야 했던 엄마가 어린 우리를 돌보는 건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와 두 여동생은 거의 방치된 채 학교에 다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순도순 둥근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로 자리가 비좁았는데 엄마와 나, 두 여동생만 남았다.
겨울방학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울에 가서 언니들도 보고 친척 집에 가서 살길을 알아봐야겠다. 동생들 잘 데리고 있으면 엄마가 빨리 올게”라며 밥하는 것과 아궁이에 불 붙이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엄마는 겨울방학 내내 집에 오지 않았다. 계룡산 골짜기 우리 마을에는 늘 눈이 내렸다. 펑펑 눈이 내리는 밤에는 눈의 무게를 못 이긴 소나무들이 이 산 저 산에서 우지직 천둥소리를 내며 부러지면서 메아리쳤고 집 가까운 곳에서는 산짐승도 울었다. 마을의 집들은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어서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셋이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잠을 청하곤 했다.
그때의 무섭고 암담했던 공포가 평생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그 상황과 비슷한 꿈을 꾸곤 하는데 엄마를 찾아 서울의 어느 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캄캄한 고향 집 방문에 등잔불이 켜져 있어서 달려갔는데 엄마가 없고, 닫혀지지 않아 애를 쓰는 꿈을 꾼다.
방학이 끝날 때쯤 엄마가 돌아왔다. 그런 그 몸으로 어떻게 집에 올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너무 아픈 상태였다.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젓고 외마디 소리도 질렀다. 열이 높아서 이불을 꽁꽁 여미고도 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줄초상 치르게 되었다고 수군댔다. 아픈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 산에 가서 생솔가지를 꺾고 솔가리와 나뭇가지를 주워 와야 했다. 이런 일들은 둘째 언니나 엄마, 아버지가 하던 일이었다.
6학년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민들레꽃이 피어 있는 집 앞 논둑에 엄마가 기적처럼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 돌아오고 처음 방문 밖 외출이었다. 엄마의 종아리가 막대기처럼 살이 빠져 걸음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학교에서는 진학반 비진학반으로 나눠서 진학반 아이들에게는 과외비를 받고 중학교 입시 공부를 시켰다. 나는 아픈 엄마에게 과외비를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비진학반으로 갔다. 거기서 내 삶의 첫 멘토를 만났다.
새로 부임한 시인 윤석산 선생님(후에 제주대학교 교수)이 우리 담임이 되었다. 선생님은 기가 죽어 있는 우리를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학과 공부보다는 시를 쓰라는 시간도 많았고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게 했다. 어느 시간에는 다비치와 미켈란젤로, 고흐와 루오, 모네와 마네, 몬드리안의 도록을 보여 주면서 미술사 수업도 했다. 발음조차 어려운 화가들의 삶과 그림 이야기가 나에겐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나와 친구 몇 명을 방과 후에 남으라고 했는데 우리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나에게는 수채화를 그리면 잘할 것 같다고 했고, 한 친구에게는 판화, 또 다른 두 친구는 크레파스화가 좋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8절 고급 스케치북과 24색 수채화 물감, 굵기가 다른 품질 좋은 몇 개의 붓, 팔레트를 선물이라며 주었고, 다른 친구들에게 고무판과 판화칼, 24색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선물하였다.
방과 후 선생님과 함께 계룡저수지로 그림 그리러 가는 게 참 좋았다. 선생님도 우리와 함께 그림을 그렸고, 어느 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유에 잠겼다. 나도 선생님 흉내를 내어 멍도 때리기도 하고 멀리 보이는 계룡산, 새잎을 틔우고 있는 버드나무 있는 들녘을 그렸다. 선생님은 원색 대신 물감을 혼합하여 색을 만드는 법, 농담을 표현하는 덧칠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아,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구나, 이 세상에는 하나도 똑같은 색은 없어!’ 맑음과 흐림에 따라 달리 보이는 색의 조화, 날마다 짙어지는 초록 잎새 등등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눈이 떠지면서 온 누리가 어찌나 찬란하던지…. 봄의 계룡산, 여름과 가을의 계룡산, 서서히 단풍이 붉게 내려오던 계룡산의 다양한 표정이 비로소 보였다.
다섯 명 중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건 내가 유일하다. 나의 모교가 된 경천중학교 인근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개최한 그림 대회에서 내가 1등으로 뽑혔다. 입학금 전액과 3년간 수업료 면제 장학생이 되었다. 초등학교가 최종 학력이 될 뻔했는데 선생님 덕에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내 삶의 두 번째 멘토는 교음사 대표 고(故) 강석호 회장님이다. 문화촌의 작은 개척교회에서 그분을 처음 뵈었다. 청년회 부장 집사였던 그분이 어느 날 책자 교정지를 가져와서 교정을 좀 봐달라고 했다. 교정부호를 사용한 내 교정지에 전문가적 자질이 보인다면서 아르바이트할 생각이 없냐고 했다. 그때 초등학생 과외를 하면서 용돈벌이를 하는 정도여서 그분의 제의가 고마웠다. 교음사에는 수필가 박연구 선생님이 있었는데 수필집 『바보네 가게』를 사인해 주어 읽으면서 수필을 좋아하게 되었다. 박 선생님은 교정의 기초와 비문, 부호 통일, 시제 등 편집자의 자세를 가르쳐 주었다.
교음사는 수필 전문 출판사라 부를 만큼 수필집 출판물이 들어왔는데 얼마 후 박연구 선생님이 다른 출판사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1980년부터 교음사 편집부에서 근무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전국의 수필가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분들이 많고, 그때 신인으로 등단한 분들이 지금은 문단의 거목으로 활약하고 있다. 교음사에서 18년 근무하는 동안에 월간지 『수필문학』까지 창간되어 나는 편집부장으로서 수많은 수필집을 편집하고 신인 수필가도 탄생시키는 조력자 역할로 청춘을 보냈다. 우연히 시작된 수필과의 인연이 45년을 넘어섰다. 수많은 수필 작품을 읽고 다듬는 사이 저절로 나의 몸과 혼이 수필화가 되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지 싶다.
열두 살 때 태풍 같은 고난과 맞닥뜨렸다. 엄마 같은 언니의 결혼, 자애롭고 엄격했던 아버지와의 이별, 엄마의 가출로 인해 두 동생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해 겨울, 병든 엄마를 간호하는 일은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게 세상은 회색빛이었다. 그때의 상실과 결핍, 공포가 존재감 없고 소심한 아이를 더 단단하고 위기에 대처하도록 잠재력을 심어 주어 오늘의 나로 성장시켰을 것이다.
멘토 두 분은 내 삶의 나침반이었다. 윤석산 선생님은 대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면서 미의식을 내게 열어 주었고 진학도 할 수 있게 했다. 강석호 회장님은 내 삶의 행로를 문학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그런데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이 없는 일회성 외길이다. ‘두 갈래 길’에서 그때그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야 할 따름이다.
45년여를 문학과 더불어 살았다. ‘문학이 가난을 구제할 수는 없어도 위로해 줄 수는 있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문학에게 위로를 받았으며, 또 내 삶이 풍성했음에 자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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