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4
0
제36회 마로니에 전국 청소년 백일장 <중등부 산문 차하>
경쾌한 발걸음으로 하교하는 아이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 경적 소리가 크게 울리는 도로변까지 왔을 때, 핸드폰 화면에 알림이 떴다.
‘엄마 오늘 늦으니까 밥 잘 챙겨 먹고 먼저 자.’
설마 싶었는데, 오늘이 내 생일인 걸 잊었나 보다. 엄마의 문자에 퉁명스럽게 대답을 보내곤 학교서부터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온 발재간은 어디 갔는지, 축 늘어진 몸을 무겁게 이끌어 오랜만에 모래사장으로 나온 거북이 같이 천천히 발을 뗐다.
빌라 공동 현관을 지나는데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우편함이 내 처지와 비슷해 보였는지 우리 집을 찾기 시작했다. 우편함은 이미 꽉 들어찬 우편물을 뱉어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득 쌓인 우편물을 주머니란 주머니에 전부 쑤셔 넣었지만, 몇 달째 방치한 우편물의 양에 주머니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가뜩이나 별로인 기분에 괜히 더 큰 재난을 일으킨 것 같아 짜증나는 마음에 우편함을 발로 쾅 찼다. 우편함은 이때다 싶었는지 우편물을 더 뱉어냈다.
어찌저찌 우편물을 다 챙겨서 집으로 올라와 정리를 하는데, 준등기에 엄마 이름 석 자 적혀 있는 다른 우편과는 달리 굉장히 오글거리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만 같은 핑크색 봉투가 어색하게 섞여 있었다. 애정 표현 한 번 하지도 않는 아빠가 보낸 러브레터는 아닐 테고, 나한테도 이런 봉투에 소중한 편지를 담아 보낼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혹시나 누가 있을까 눈치를 보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지 2장과 폴라로이드가 담겨 있었는데, 사진이 잘못 찍혔는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편지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됐다. 그래도 편지에는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이 적혀 있을 테니 기대가 충만한 채로 편지를 열었다. 받는 사람엔 엄마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차근차근 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너는 무얼 하고 있을까? 회사를 주름잡는 멋진 커리어우먼, 아니면 회사를 그만두고 네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나?
안타깝지만 틀렸다. 내 눈에 엄마는 커리어우먼도,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엄마도 아니다. 그저 매일 야근에 회식에 안정적인 자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일 뿐이다.
-뭐가 됐든 네가 행복한 일을 하고 있길 바란다. 지금 편지를 쓰는 이곳의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색색의 지붕이 마치 중학생 미술 시간에 봤던 점묘화같이 한 편의 명화를 만들어냈어. 네가 다시 이곳에 와서 멋진 풍경을 봤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딸이랑 같이 추억도 남길 겸해서.
편지로 보는 그곳의 풍경은 영화에 나오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유럽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엄마가 집에 돌아온다면 꼭 편지를 보여주며 나도 데려가라 말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네 딸은 꼭 어릴 적 너를 보는 것 같아. 예쁜 건 무조건 사야 되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누워서 떼를 쓰고, 고지식한 것까지 너를 닮아서 나이가 얼마라고 원칙 타령을 그렇게 해대.
갑자기 내 얘기가 나와 적잖이 당황했는데 나에 대한 얘기마저 맞는 말로 내 신경을 콕콕 찌르는 말이라 심기가 불편했다.
-근데도 밉지가 않다. 떼를 쓰고 아무리 귀찮게 해도 금방 활짝 웃고, 깡충깡충 토끼처럼 뛰어와 안기는 걸 보면 절대로 밉지가 않아. 새근새근 따스한 숨 내쉬며 자는 모습은 양 한 마리가 낮잠을 자는 모습 같아 귀엽고, 간만에 내리는 눈에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면 다칠까 걱정은 돼도 금방 털고 일어날 애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
귀엽다는 말을 어려서 시장에 갔을 때 이후로 처음 들어봐서 그런가 괜히 쑥스러웠다. 근데 도대체 편지의 발신자가 누구길래 엄마랑 내 어렸을 적 얘기를 할 만큼 친할까 고민했다.
사실 엄마는 이렇다 할 친구가 없다. 가끔가다 대화를 하는 또래의 사람들은 거의 다 내 입시를 위해 발을 들인 학부모 모임의 아줌마들이었다. 발신자의 정체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가운데, 핸드폰에 엄마의 문자가 다시 왔다.
‘다음 주에 실기 대회 있다는데, 나가 볼래? 대회 갔다가 근처 구경도 하고 그러자.’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실기 대회를 나가라는 뜬금없는 엄마의 말에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먼저 어딜 가보자고 하는 엄마의 모습은 처음이라 썩 내키진 않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나저나, 너는 은퇴하면 뭐 할 거니? 지금 내 계획엔 은퇴하면 우리 딸이랑 단둘이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집 하나 짓고 조용히 사는 것뿐이야. 그때쯤이면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바뀌었으려나?
드디어 발신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계속해서 내 얘길 하고, 미래 걱정을 하는 게 꼭 우리 엄마랑 같았다. 아니, 우리 엄마였다. 항상 엄마는 나에게
“엄마 은퇴하면 엄마랑 바닷가나 산에 집 짓고 조용히 하고픈 것만 하고 살자. 어때?”
하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항상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못 살아. 집 짓고, 평생 살 돈은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뭐, 나는 결혼도 못 해? 나도 결혼하고 남들처럼 살 거야. 절대 안 돼.”
하고 대답했다. 꽤나 오래전 같은데, 이때부터 그려온 엄마의 꿈을 짓밟았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미안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너도 네 딸도 꼭 건강했으면 좋겠다. 네 딸 툭하면 어디 넘어져서 찢어지고, 부딪쳐서 부러지고, 매번 가슴이 철렁해.
사실 얼마 전에도 하굣길에 다리를 다쳤다. 그때, 응급실에서 크게 다친 것도 아닌 내 이름을 오만 데에 말하며 날 찾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는데, 편지를 읽고 나니 엄마를 그렇게 생각한 내가 더 부끄러웠다.
-내가 앞에서 너무 딸 얘기만 했나? 괜히 미안하네. 성은아, 너는 정말 잘하고 있어. 누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알아. 엄마 최성은과 회사원 최성은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가끔은 쉬어가도 되고, 완벽하지 않아도 되니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딸한테 투정도 한 번씩 부리고 딸이랑 맘껏 쇼핑도 하고, 알았지?
엄마의 이름을 딱딱한 고딕체로 우편물에서만 보다가 오랜만에 엄마의 따뜻한 글씨체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지막까지 나랑 같이 행복한 일을 하라는 메시지를 남긴 과거의 엄마에게 너무도 고마웠다. 마지막 줄을 읽고 눈물을 훔치던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식탁이 현관 바로 앞에 있어서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거친 숨을 내쉬며 나에게 말했다.
“11시 57분, 안 늦었지? 우리 딸. 생일 축하해.”
엄마의 손에는 크림이나 단 거라면 몸서리를 치는 나를 위한 치즈케이크와 내가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댄 구형 MP3가 들려 있었다.
엄마와 과거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내 생일을 보냈다. 엄마는 옛날의 자기가 너무 오글거린다고 말하면서도 뿌듯하단 듯이 웃고 있었다.
그날, 내 생일은 저녁 11시 59분, 두 모녀의 쓸쓸한 밤이 아닌 세 사람의 근사한 저녁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