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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적 상상력과 창조적 개성의 에로티즘 시인 — 마광수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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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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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는 유고 소설집이 되어 버린『추억마저 지우랴』(어문학사, 2017)를 출판사에 넘기고,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에 본디의 제목을 바꾸어 ‘추억마저 지우랴’로 해 달라고 출판사에 연락한 것으로 전한다. 28편의 유고소설은 작품들이 대체로 짧은 편이지만, 자전(自傳)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송희복,「가버린 작가 남은 유고집」,『마광수 시대를 성찰하다』, 2019, 45쪽). 이 단편소설집 중의「마광수 교수, 지옥으로 가다」는 마광수 자신의 가상적인 사후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20××년, 위대했던 마광수 교수가 타계했다. 권위주의에 찌든 교활한 문학계의 억압에 단단히 맞섰던 그는, 파격적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으며 그의 진정성을 인정받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노벨상 수상 2년 후 그는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아 쓰발, 더러운 세상 잘 떠났다.”

마광수 교수의 영혼이 중얼거렸다. 마광수 교수의 영혼은 거리를 배회하며 신문 기사를 보고 있었다. 역시나 교활한 놈 이문혈이란 놈은 위로한 척하면서 끝까지 지긋지긋한 일장 훈시를 늘어놓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죽음은 애도하지만, 그의 작품은 수준 미달인 것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신문 기사를 보면서 마광수 교수는 혀를 찼다.(『추억마저 지우랴』, 151∼152쪽)

「즐거운 사라」를 둘러싼 문단 일각의 비난과 몰각에 대한 분함과 섭섭함이 진하게 묻어난다. 인용문 속에서는‘이문혈’이라고 써 놓았지만, 이문열 한 개인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냈다기보다는「즐거운 사라」 의 내용이 변태적이라며 비난하고 배척했던 문단 일각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것이다(송희복, 같은 글, 47쪽 참조).

마지막 단편집의 제목을 바꾸어 달라고 하고 자살한 마광수의 죽음에 대해, 그의 소설「즐거운 사라」를 출판하였다는 이유로 마광수와 함께 옥고를 치렀던 장석주 시인은「마광수 선생을 보내며」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추모하였다.

이 죽음은 억울하고 분한 죽음이다. 앙토냉 아르토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자살을 두고‘사회적 타살’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마 선생의 죽음도 자살의 형식을 빌렸지만 한 사회가 공모한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 우리 모두는 그를 몰이해와 냉대 속에 오래 방치하고, 이 천재를‘변태’라고 몰아 세웠으며,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를 향해 빗발치는 저주의 말들은 그의 뇌수를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했을지도 모른다. 따돌림 당하고 조리돌림당한 뼈에 사무친 외로움과 살을 저미는 절망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수 있으랴!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즐거운 사라」는 저자 마광수 일생에서 가장 큰 타격의 변곡점이 되었다. 음란하다는 이유로 저자를 법적 구속하고, (공권력의 몰이해와 남용의 파장이) 마침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데 영향을 미친 법조문이나 평결을 보면 여간 어이없고 모호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건전한 도덕성을 파괴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한다’(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음란문서 제조 및 반포죄에 해당된다’(법원),‘책의 내용이 건전한 국민의 정서에 위배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음란한 문서에 해당된다’,‘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한다’,‘건전한 성적 풍속이나 성 도덕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형법 규정에 의하여 이를 처벌할 수 있다.(이상 대법원).

그러니까「즐거운 사라」는 외설스러운 음란물이며, 변태적인 내용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1심 재판에서부터 대법원의 판결에 이르기까지 유죄의 근거로 내세운‘건전한 국민의 정서’,‘건전한 성적 풍속이나 성도덕’,‘정상적인 성적 수치심’등에 반한다는 말들은 한승원 변호사등이 지적했듯이 얼마나 막연하고 모호한 것인가? 도대체‘건전한 성도덕’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가? 성생활에서 무슨 도덕이 있고, 방사(房事)에 무슨 미풍양속이 있는가. ‘성 도덕’이라는 말이 성립된다면 남의

성을 간섭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게 되어야 할 터이다.

모든 성(sex)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자기 결정권을 가지며, 그 권리가 보장되어 마땅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행위는 본질적으로든 속성적으로든 음란하고 변태적이다. 유성생식(有性生殖)을하는 동물 중 인간만이 생식 이외의 성희(性戱)를 누릴 수 있도록 조건지어졌다. 『에로티 즘』의 저자인 죠르쥬 바따이유(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로티즘문학 연구가)는 그 같은 인간의 특성을 성문화의 차원에서 이해하여 ‘에로티즘 (Erotism/ Eroticism)’이라는 말로 강조하였다(조한경 옮김, 『에로티즘』, 민음사, 1997).“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말하는 바따이유는 모든 유성동물 중에서“유독 인간만이 성행위를 에로티즘으로 승화시켰다. 단순한 성행위와 에로티즘은 우선 그렇게 구분된다. 에로티즘은 아기(아기 낳는 것)나 생식 등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이다”라고 설명한다. 에로티즘을 성문화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겠다.

문화(文化)는 인간이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한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성서(聖書)를 들어 말하면, 아담과 이브가 금기의 과실인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다음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풀잎빤스(grass skirt)를 만들어 걸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까 금기와 위반으로 말미암은 부끄러움에의 자각은 성문화 의식 발생의 원초적 상징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반성적 존재인 인간의 사회에서는 가장 기초적 금기인 근친상간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타 유성생식의 동물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생태의 하나일 뿐이다. ‘창세기’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기원 전 5∼6세기와 비슷한 시기의 고대 중국에서‘예서(禮書)’들을 공고히 하여‘예의염치(禮儀廉恥)’의 수치심〔恥〕을 강조했던 것도 성문화와 무관치 않다. 그 부끄러움의 뿌리는, 20세기 말의「즐거운 사라」를 음란물로 규정하면서 적용한‘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 이라는 평결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에로티즘은 전체적으로 금기의 위반이며, 인간적인 행위”라는 죠르쥬 바따이유는“에로티즘의 순간보다 강렬한 순간은 없다. 그래서 에로티즘은 인간정신의 정상에 위치한다”라고 말한다(죠르쥬 바따이유, 같은책). 18∼19세기를 걸쳐 살았던 조선후기의 이옥(李鈺) 선생 역시“천지만물에 대한 관찰도 이 남녀의 정(情)에서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된 것이 없다”(『역주 이옥전집』, 소명출판, 2001)하였으니, 성희의 에로티즘에 관한 생각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그런 까닭에서인가 바따이유는“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초라한 개체에 머무는 금욕의 길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존재의 정상으로서의‘에로티즘’에 외마디와 함께 나를 던져 맡기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금욕과 탐욕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 마광수는 그의 시에서‘금욕도 욕망’이라는 놀라운 표현을 한 적이 있다. 음란물 제작 반포니 외설스러운 변태적 소설을 썼느니 하며 문단 일각이 비난하고, 몽매한 국가권력〔법원〕이 법적 제재를 가하여 마광수의 인생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었다. 인간만이 누리는 에로티즘은 본질적으로 금기의 위반이며, 속성적으로 음란하고 변태적이다. 방사에 무슨 ‘건전한 성적 풍속과 성 도덕’이 있는가. 판결문을 보면, 마치 방중술(房中術)의 교과서나 지침서를 두고 그에 따라 하라는 것처럼 들린다. 근엄을 떠는 법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성리학적 통치이념 하의 엄숙했던 조선시대의 양반 누구도 방사에서 젓가락으로 페니스(penis)를집어 넣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19세기 전반 경부터 양반사회에서 유행했던 춘화첩(春畵帖) 을보면, “문화적 긍지를 갖게 한다”(이태호,「낭만이 흐르는 에로티시즘-조선시대 문화의 매력」, 도록『옛사람의 삶과 풍류(조선시대 춘화)』, 갤러리현대· 두가헌, 2013)는 말이 실감날 것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화첩으로 알려진『운우도첩(雲雨圖帖)』과『 건 곤일합첩(乾坤一合帖)』은성희(性戱) 그림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며, 한국춘화의 백미로 손꼽혀 인기가 높았다. 이 두 화가의 춘화를 모아, 갤러리현대에서 2013년 1월 15일부터 한 달 열흘 동안 전시를 하여 관람객들을 즐겁게 했다. 모두 웃고 미소 지으며 괴로움을 망각하고 보낸 시간이었을 뿐, 그토록 야한 춘화를 보았다고 해서 성 범죄를 저지르러 갈 것으로 보이는 관객은 없었을 전시장이 떠오른다. 유교나 도교 사상에 뿌리를 둔‘춘화는 인간의 성행위와 관련된 그림’을 말한다. ‘성교를 통해 신선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던 도가(道家)의 방중술은 다양한 체위를 표현하는 춘화 도상의 밑거름이었다’고 짚어 주는 이태호 교수는 2013년 갤러리현대의 조선시대 춘화전에 대해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이 두 춘화첩에는 남녀노소와 신분고하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남성은 점잖은 중년이나 노년의 양반사대부가 주인공이고, 여인들은 기녀뿐만 아니라 머리에 첩지를 장식하거나 삼회장저고리를 입은 양반가의 부인도 적지 않다. 남녀의 조합은 부부 사이, 나이 지긋한 노인과 젊은 여성, 중년부인과 청년, 창가(娼家)의 직업여성, 젊은 여성들과 한 청년의 혼교, 성희를 훔쳐보는 소년이나 여인, 동성애 등이 그려진다. 이들 춘화에 등장한 인물들은 부적절한 관계가 많고, 대체로 겸연쩍은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다.(앞의 도록, 6∼7쪽).

승려와 양반부인의 성희 장면을 포함한 칼라 도록 춘화첩을 보면, 성행위나 성희의 체위를 비롯한 모든 장면이 현대의 포르노그래피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들 다양한 성희의 춘화는 유교의 도덕 개념이 타락한 당대의 성 문란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중세의 엄격주의를 깨는 일”이었으며, “조선 몰락기의 신분사회에 대한 풍자와 농담이 짙게 깔려 있었던”(이태호, 같은 글) 것이다. 이태호 교수는 이 춘화첩에 대해“춘화의 생명력과 가치는 남녀 성행위의 과감하고 적나라한 묘사에 있다. 비록 현존하는 작품이 적지만, 『운우도첩』과『건곤일회첩』의 노골적인 표현처럼 조선후기 춘화의 체위는 현대의 포르노그래피 못지 않다. 우리 선조들이 상상 이상으로 성에 대한 의식이나 시선이 개방적이었음을 살피게 해 준다”라고 설명한다.

어젯밤 자고 간 그 놈, 아마도 못 잊을 거야.

기와장(匠)이 아들이었나 마치 진흙을 반죽하듯이, 뱃사공의 손재주였나 마치 노 젓듯 하듯이, 두더지의 아들이었나 마치 곳곳을 파헤치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마음이 야릇해지더라.

그간 나도 겪을 만큼 겪었으나, 정말 맹세하건대 어젯밤 그 놈은 차마 못 잊을 거야.(이정보(李鼎輔)의 사설시조: 박을수 편저, 『한국시조대사전』, 아세아문화사, 1991).

영조시대의 문인관료인 이정보의 이 사설시조는 여성을 화자로 하여 남녀의 성행위와 음란의 절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정 유교도덕이 승한 조선시절의 시조인가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 판소리계 소설「춘향전」의 몇 대목을 보면 또 어떻던가.

  • 용궁 속의 수정궁 월궁 속의 광한궁 너와 내가 합궁하니 한 평생 무궁이라 이 궁 저 궁 다버리고 너의 두 다리 사이의 수룡궁에 나의 힘줄 방망이로 길을 내자꾸나.
  • 이 도령은 춘향의 가는 허리를 후리어 담쑥 안고 기지개를 켜듯 아드득 떨며, 귓밥도 쪽쪽 빨며 입술도 쪽쪽 빨면서 붉은 혀를 물고, 오색단청에 순금으로 만든 장롱 속에 쌍쌍이 날아가는 비둘기같이 꾹꿍 끙끙거리며, 뒤로돌려담쑥안고, 젖을쥐고발발떨며, 저고리, 치마, 바지속곳까지 활씬 벗겨 놓으니 춘향은 부끄러워 한 편으로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 삼정승은 평교자 타고 육판서는 초헌 타고 각급 수령은 독교 타고 (…) 나는 탈 것이 없으니 오늘 밤 삼경 깊은 밤에 춘향이 배를 넌즈시 올라타고 홑이불로 돛을 달아 내 기계로 노를 저어 춘향의 오목샘으로 들어 가되… (「춘향전」에서)

마광수는「즐거운 사라」사건 항소 이유서 중에서“우리나라 최고 고전이라고 하는「춘향전」조차 혼전 성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춘향전」에서는 사춘기의 젊은 춘향이가 이 도령과 만나 혼전에 질탕한 성희를 벌일 정도로 당돌한 여성을 그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첫날밤에 벌이는 혼전 정사(情事)에서 길고도 요란한 성 놀이와 음란한 성적 언롱(言弄)은 보통인의 상상을 넘어선다. 「춘향전」은 음란소설이라고 한 이병렬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설하였다.

도저히 16세 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성행위가 적나라하게 묘사된 소설이 바로「춘향전」이다. 이러한 성행위 속에 춘향의 요부로서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한 발 더 나아가 능동적으로 나오는 춘향의 모습에서 열녀라든가 요조숙녀 혹은 정숙하다는 이미지를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방아에 비유한 사랑가를 듣고는“나는 어찌 이생이나 후생이나 밑으로만 된다는 법이 있소”라고 따지며 여성 상위(?)를 주장하고, 이에 그녀를 맷돌 웃짝에 비유해 노래하자“무슨 년의 원수로 평생 한 구멍(?)에만 잡혀 있으니”싫다고 말한다.(이병렬, 「춘향전은 음란소설이다」에서).

우리는「춘향전」보다도 더 과감하고 야릇한『변강쇠전』을 공부하고, 조선 중엽부터 시작된 조상들의 노골적인 성애의 폭소담을 모아 엮은 『고금소총(古今笑叢)』(원자료는 서거정, 홍만종, 강희맹 등 양반사대부 학자 문인들의 설화집들임)이, 책이 귀하던 1960년대 산간마을까지 흘러들어와 중학생 시절에 접하여 읽으며 자랐다. 가까이로는 방인근, 최인욱의 에로틱한 성희의 통속소설을 접해 왔고, 1970년대의 조선작, 조해일, 염재만 등 허다한 작가들의 야한 소설을 읽어 왔으며, 「즐거운 사라」와 같은 무렵에 나온 하일지의 과감한 소설「경마장 가는 길」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이희승『국어대사전』에까지 등재되어 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희승 사전에는‘매저키즘’으로 음역돼 있음)을 낳게 한 사드 후 작과 작가 마조흐, 희대의 호색한 카사노바 백작의 세계도 진작 접해 왔다. 18세기 프랑스의 작가이며 사상가인 사드(Donatien Alphonse de Sade) 후작은 프로방스 지방의 명성 있는 귀족가문의 유일한 상속자로 출생하였다. 그는 소설「쥐스틴」「쥘리에트」「소돔의 120일」등에서 온갖 성욕도착의 변태와 학대음란을 묘사하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매춘부 로즈켈리 학대사건(1768)으로 1차 투옥되었다. 얼마 못 가 매춘부를 상대로 한 최음제 오용으로 살인 미수 혐의(1772)를받고, 애인을 동반하여 외국으로 도피하게 되는데, 그 애인은 자신의 처제인 로네 수녀였다. 궐석재판에서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장모의 격분 속에 몇 번의 도피 생활을 한 후 사드는 1774년 부인과 함께 자신의 영지에 칩거하지만, 그의 기행(奇行)은 오히려 악명을 더해 갔다. 미성년자 시종들을 상대로 한 음란행위가 폭로되어 다시 체포, 수감되었다. 1790년 왕정이 무너지고 봉인장의 효력이 상실될 때까지 13년간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주로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빈털터리 신세가 된 그는 이혼을 하여 머물 집조차 없었다. 연예계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소설『쥐스틴』을 익명으로 간행하였으나 악평을 면치 못했다. 민주주의자를 자처하며 공무에 임하였으나 1793년 반혁명 분자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 또 음란물 유포 혐의로 투옥, 폐쇄병동(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결국 이 정신병원에서 1814년 12월 2일 사드 후작은 타계하였다.

사드는 자신의 무덤 위에 여러 과실나무를 심어 무덤의 흔적조차 없애 줄 것을 당부하며“사람들의 뇌리로부터 나에 대한 기억이 깨끗이 사라지는 게 더 없이 기쁠 따름이다”라는 유서를 남겼으나, 그의 이름은 세월이 갈수록 인구에 회자되고, 유명해져 갔다. 그의 사상은,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의 작품이나 음란한 행각과는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유물론, 무신론, 아나키즘적 요소로 무장되어 있어, 20세기에 들어 예술적, 학술적으로 다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사드 후작의 생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때늦은 국가권력의 조처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해인 1789년 7월경 사드 후작이 바스티유 감옥에 있을 때,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설이 있으나 아무튼 그는 습격사건 며칠 전에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으며, 그 와중에 문제의 소설「소돔의 120일」의 원고가 실종되고 말았다. 최고의 음란소설로 일컬어지는 그 소설의 원고는 요행이 사드 후작 사후에 발견되어 여러 수집가의 손을 거쳐 이리저리 매매되다가, 2017년 다시 경매에 나왔다. 이에 프랑스 정부가‘중요 국가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경매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국제 시세로 나랏돈을 주고 구매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당시 가격은 70억 원을 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대의 가학성음란자로 매도당하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사드 후작에 대해 짚어 본 것은, 그에 대한 세상의 이해가 너무 늦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의 당대 18세기에는 물론 오늘날의 일이라 해도 사드 후작의 행적에는 법망을 피해 가기 어려워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사드 후작은 문학과 행적이 두루 문제였지만. 마광수는 관능적 판타지의 성애 소설을 쓴 것이지 그 자신이 실제로 난잡한 성 문란 행위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다. 일본에서는 10만 부가 팔렸다는 문제의 소설「즐거운 사라」조차도 소문에 비해 별것 아니라는 반응을 보인 독자가 많았다고 한다. 연세대 국문과 제자들이『마광수가 옳다』라는 책자를 내며 마광수 교수 구명 운동을 벌인 것도 그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

사드와는 반대로 피학대음란증의 상징적 인물인 자허 마조흐(Leopold Ritter Von Sacher Masoch)는 사드 후작보다 근 100년의 격차를 두고 태어 난 오스트리아의 귀족으로, 작가이며 언론인이었다. 픽션과 논픽션을 두루 썼던 그는 젊은 미망인 파니 피스토어 남작 부인의 노예가 되어 실천했던 자신의 피학적인 경험을 모델로 한「모피를 입은 비너스」 (1870)를 내어 빗발치는 비난 속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그 무렵의 사회적 분위기는 마조히즘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상황이어서 그는 마조히스트들에게서 수많은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역사학 교수로 활동하며, 말년에는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기도 했다.

그의 소설과 문학사상은 19세기 독일 리얼리즘 문학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호색한의 전형, 세기의 바람둥이로 일컬어지는 카사노바(Giovanni Giacomo Casanova) 백작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사드보다 조금 먼저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다독하며 수학, 언어, 철학에 큰 재능을 보여 온 그는 청소년 시절 사제 수업을 받기도 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돈더미에 올라 권력 있는 귀족이 되어 여성 편력의 길로 접어들었다. 카사노바의 회고록『카사노바 나의 편력』에 따르면, 그는 73년간의 생애에서 고향 베네치아는 물론 로마, 런던, 파리 등 유럽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다니며 39년간에 걸쳐 122명의 여자와 애정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근육질에 180미터의 멋진 외모(?)를 지녔던 18세기의 사람 카사노바는 절륜의 호색한답게 자신을 일컬어“관능적 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을 인생 제일의 목적으로 아는 독신자”라고 규정했다. 그런 그는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유부녀로부터 사춘기 소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배우나 하녀 등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여성을 닥치는 대로 애인으로 삼았다. 그가 눈독들인 여자에게 혹시 약혼자나 남편이 있다 할지라도, 그에겐 그런 조건이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불굴의 정열을 더욱 솟아나게 하는 촉진제가 될 뿐이었다.”(마광수,「‘카사노바 콤플렉스’에 대하여」,『성애론(性愛論)』, 해냄, 1997, 139쪽).

그에게는 여러 특성과 특색이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많은 여자들이 천하의 바람둥이라는 걸 알면서도 카사노바를 미치도록 좋아했다는 것이다. 카사노바와의 연애 관계가 한때의 불장난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수많은 여인들이 불나방처럼 날아들어 그를 사랑했던 현상에 대해 마광수는“당시의 여자들이 자신의 잠재의식 속 에 감춰 두고 있던 바람기를 상대 남성에게 전이(轉移)시킨 것으로 해석 될수있다.”(마광수, 같은 책, 144쪽)라고 말한다. ‘마법과 무신론’혐의로 카사노바는 5년간 복역을 선고받고 탈옥을 결심, 1년 만에 성공하기도 하고, 부유한 귀족 마담 듀페를 속이는 사기 행각도 벌이는 등 파란 많은 생을 보냈다. 여행 중에도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불멸의 유혹』,『회고록』을 남기고, 1798년 6월 4일, 요로 감염 증상과 그간의 성병이 겹쳐 73세로 사망하였다. 에로티즘 문화와 문학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법관들이 에로티즘 문학과 문화사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에로티즘 문화와 예술이 근엄한 시대의 양반, 귀족에 의해 행해지고, 저술되고, 그려지고, 향수되었다는 사실(존재감이 없고 문맹이었던 서민층은 무얼 써서 남길 수도 없었다), 청소년용이 아니라 원본류「춘향전」과「 변강쇠전」이나, 현대의 작가 최인욱의「벌레 먹은 장미」류만 제대로 읽어, 변화하는 사회현상과 그 흐름을 이해했었더라도,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 소설「즐거운 사라」와 저자 마광수를 몹쓸 음란물, 외설스러운 죄인으로 낙인찍어, 파멸로 몰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6·25전쟁 이후 3류 통속잡지들이 성과 성행위에 대한 교육지 구실을 했던 것처럼, 「춘향전」의 성애 장면이나‘춘화’가 후기 조선시대 청소년들의 성교육 구실도 겸하였다고 하지 않은가. 혹시 소설책 천 권 만권을 읽었으면 무얼 하겠는가. 그들이 그토록 염려하는 청소년문학만 문학으로 알고 읽었을 터이니, 인간의 본능과 창조적 행위의 원동력인 에로티즘의 의의와 가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1950년대 초반 정비석의 소설「자유부인」이 서울신문에 연재,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 갈 때, 당시 서울대 법대교수이며, 여성 법학박사 1호였다는 황산덕 교수는 참다못해 쓴다며 정비석 작가를 향해, 세간의 풍문만 듣고, 정작 소설은 읽어 본 적이 없다면서‘(대학교수를) 갖은 재롱을 다 부려 가면서 모욕하고 있고, 양공주 앞에 굴복시키고 있다. (…) 귀하 개인의 자제의 장래 교육의 교육만이라고 생각하시고, (…) 대학교수를 사회적으로 모욕하는 무의미한 소설만은 쓰지 말아 주시길 앙망하나이다’라는 비판의 글을 대학신문(1954. 3. 1.)에 발표했다. 작가 정비석의 반론의 글이 서울신문(3. 11.)에 실리자 황산덕 교수는‘문화의 적, 문학 파괴자,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적 행위/ 북한이 이 소설을 들어 남한사회가 이렇게 썩었다라고 선전하자, 북한의 사주를 받고 쓴 이적물이 아니냐

라는 주장으로 반격을 가한 계층이 있었다)’이라고 맹비난하는 시대착오적 헤프닝을 일으켰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폭넓고 깊은 소양이 없이, 육법전서의 조롱 속에 갇혀, 기껏‘문화적 수구꼴통’의 입장과 한통속이 되어 행사하는 섣부른 평결은 문학이나 예술가를 향해 휘두르는 흉기나 다름없다. 그래서, 시대착오적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면, 문화현상은 그 방면의 전문가와 독자·관객에게 맡겨, 자정(自淨)의 기능을 다하게 하라는 것이 뜻 있는 이들의 지적인 것이다.

죠르쥬 바따이유는“동물성과 에로티즘은 어떻게나 관계가 깊은지 동물성 또는 야수성을 배제하고서는 에로티즘에 대한 언급이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성애 성희는 본질적으로 음란하고 속성적으로 변태적이다. 변태는 기교를 낳고 기교는 창조를 낳는다. 변태가 끝나는 자리에 권태가 있을 뿐이다. ‘변태(變態)’의 상대어는‘상태(常態)’라는데, 방사에 있어서 상태가 어디에 있는가. 변태적 상상력은 창조적 상상력의 전단계나 다름없다. 변태적 상상 없는 모방과 답습으로는 창조적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이 1917년 남성용 소변기에‘샘’이라고 제목을 붙여, 참가 요청을 한 미국 뉴욕의 전시회로 보냈으나, 전시되지 못했다. ‘샘’은 나중에 달리 전시되어 미술계의 시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마침내 그 작품은 현대미술의 판도를 바꿔 버린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뒤샹의 ‘샘’을 처음 본 당시의 사람들은 아마도 변태적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전위적 변태심리의 어떤 부분이 독창적 상상력의 세계로 승화된다

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바따이유는 말한다. ‘금기는 범해지기 위해 거기에 있다’. 혹은‘위반을 불허하는 금기란 없다’라고!“살인하지 말라” 라는 엄숙한 계명은 소가 웃을 일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군대의 축복과 찬양이 내장되어 있고, 그 금기는 살해와 공모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부터 전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는가. 성서에는 또‘간음하지 말라’고 하고, 심지어“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 곧“마음으로 하는 것도 똑같이 간음이니라”하고 상상으로 하는 간음도 죄악으로 여겨 금기시 했다. 평론가 김현은“사춘기 때에, 나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마음속으로 간음 하였다”(김현,『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 1989, 24∼25쪽)라고 썼는데, 그것이 어찌 김 현만의 현상이겠는가. 성서에서 말하는 그것이 왜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도 의문이거니와, 마음으로 하는 간음도 간음이라는 성서의 계명은 금기의 위반을 촉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숙한 어린아이를 빼고 나면, 마음으로 간음치 않는 자 누가 있을 것이며, 이왕 똑 같은 간음자로 낙인찍히는 이상 금기의 계율을 지켜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인들의 성 금기 위반마저 방송과 신문지상을 통해 심심찮게 듣고 읽고 하게 되거니와, 2010년과 2018년 사죄에 이어, 2021년 가톨릭 성직자들이 지난 70년 동안 약 21만 6,000명의 미성년자를 성추행(성폭행)했다는 획기적인 보도가 나오자 교황이 성직자(신부)들의 불미스러운 성추행 사건에 대해 거듭 사죄하는 일까지 벌어졌지 않은가. 인간의 성을 억압하는 금기는 자칫 위반을 유혹한다. 한 사회와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는 일정한 금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심정적인 것까지 금기시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시간 (視姦)이든 마음으로 하는 간음이든 그런 게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고 볼품없는 상상력의 인간사회가 되고 말 것인가.

억울하게 당한 마광수는 성 담론을 당당히 현실의 공론장에 올리고, 이중적 위선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성의 해방과 자유, 성의 민주화를 줄기차게 주창한 작가이고 학자였다. 그는 저서『성애론』의‘머리말’ 에서,“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고, 육체적 쾌락에 솔직할 수 있는 사랑만이 정신적 순수성을 유지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성애’와‘ 사 랑 ’을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성을 뺀 사랑은 자칫 공허한 개념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라

고한다음,

‘성의 자유’는이제‘음란’이나‘퇴폐’같은 애매모호한 말이나 수구적 봉건윤리에 의한‘모럴 테러리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이 시대의 당당한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성은 이제 쾌락의 문제이기 이전에‘인권’의문제요,‘문화적 민주화’를 추진시킬 수 있는‘합리적 지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또한 성은‘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정치·경제·문화 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라는 진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인간 정신의 최상위’인 에로티즘의 문화와 쾌락의 가치를 더 이상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모든 행동의 숨은 동기를 추적하면 그 심층의 밑바닥에는 성적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 것이 프로이드이다. 고래(古來)로 권력과 성을 둘러싼 사실들이 그 점을 잘 말해 준다. 왕과 수많은 후궁, 근래의 문단과 예체능계의 권력자들에 의해 벌어진 이른바 미투 사건, 작금에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광역단체장(안희정, 박원순, 오거돈)들의 성 추문 사건등등.

마광수는 원래 소설보다 시로 먼저 문단에 등단한 사람이다. 연세대학교 박사과정 중이던 1977년 월간『현대문학』에「배꼽에」「망나니의 노래」「고구려」「당세풍의 결혼」「겁(怯)」「장자사(莊子死)」등 6 편 의 시가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초기 시는 도발적이고 발칙한 상상력으로 신선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그의 자유로운 성 담론의 작품부터 살펴보는 게 좋겠다.

만나서 이빨만 까기는 싫어/ 점잖은 척 뜸들이며 썰 풀기는 더욱 싫어/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 가자, 장미여관으로!// 화사한 레스토랑에서 어색하게 쌍칼 놀리긴 싫어/ 없는 돈에 콜택시, 의젓한 드라이브는 싫어/ 사랑은 순간으로 와서 영원이 되는 것/ 난 말없는 보디랭귀지가 제일 좋아/ 가자, 장미여관으로!// 철학, 인생, 종교가 어쩌구저쩌구/ 세계의 운명이 자기 운명인 양 걱정하는 체 주절주절/ 커피는 초이스 심포니는 카라얀/ 나는 뽀뽀하고 싶어 죽겠는데, 오 그녀는 토론만 하자고 하네/ 가자, 장미여관으로!// 블루스도 싫어 디스코는 더욱 싫어/ 난 네 발냄새를 맡고 싶어, 그 고린내에 취하고 싶어/ 네 뾰족한 손톱마다 색색가지 매니큐어를 발라 주고도 싶어/ 가자, 장미여관으로!// 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

즈필링〔「가자, 장미여관으로!」(1985년작) 전문〕

시인이 가장 싫어하는 위선의 가면을 홀라당 벗어던지고,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성의 문제를 아무런 가식 없이 솔직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그만큼 그의 시는 일관되게 정직성의 공간에 위치한다. 지식인의 체면과 교수의 체통을 조금이라도 지켜야지 이게 뭐냐라고 하는 생각은 유미주의적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마광수에게는 통하지 않는 시각이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주기론자(主氣論者)인 그는 에로티즘의 가치와 생리적이고 실제적인 성격을 신념으로 삼는다. 우리가 가식을 버리고 심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내가 미처 드러내 놓고 하지 못하는 성적 담론을 참 솔직하고도 당당하게 대변해 주는구나 싶을 것이다.

당시 연세대학교 앞에‘장미여관’은 없었다는 말이 있다. 장미여관이든 동백장이든 그 여관의 이름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그 이름은 흥미롭게 잘 지어냈다 싶다. 어디엔가는 있을 법하고 또 있을 터인 ‘장미여관’은 섹스의 공간을 암시하는 기표로 작용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은 대개가‘모텔’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여관’,‘여인숙’이라는 간판을 간혹 만나게 되면 그리운 추억처럼 정겹기마저 하다. 대학 강단에 서던 시절 학생들에게 한자단어 쓰기 실습을 더러 시켰는데, 단어 중‘ 여 관 ’을 포함시켜 보곤 하였다. 한자 문맹 교육 덕분에 학생들 대부분이 한자로 못 쓰거나, ‘여관’의‘여’자밖에 못 쓰거나 하였다. 그마저도그쓴글자가‘女’자였다.‘여관’이 나그네가 머물고 가는 집〔旅館〕 이기보다는 여자를 데리고 들어가 통정하는 집쯤으로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마광수 시인은 그 같은 사회적 관습과 통념의 오해까지를 역용(逆用)하여“러브 이즈 터치/ 러브 이즈 필링”을 노래한 셈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거리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 (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 진짜 현실적으로〔「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79) 전문〕

이 시의 제목을 마광수는 첫 에세이집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그만큼 이 시는 마광수 시인의 심리와 성격, 그의 에로티즘 사상을 적실하게 보여준다. 이성(異性)으로서의 여자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송두리째 뽑아 던져 버리는 시인의 관능적 포즈는 독자의 심층을 발기시키고, 교양을 전복시킨다. 시인의 관능적 관점의 정직성은 은유의 기발성 따위는 걸치지 않고 있다. 은유가 있다면 시 작품 전체가 환기하는 시인의 사상적 관념일 것이다.

개처럼 사랑하고 싶다. 개는 언제나 어디서나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눈다. 번거로운 절차도, 체면도 없다. 사람들처럼 엉큼스럽게 사면이 벽으로 막힌 곳에서만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다. 큰 한길에서도 개는 누가 보든 말든, 순수한 정열로 사랑을 나눈다. 아무런 스스럼이 없다.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 티 없이 순진한 개의 눈빛, 사랑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혀 놀림. 기분이 좋을 때는 언제나 꼬리를 흔들어대는 그 솔직성. 나도 개처럼 정직하게 사랑을 나누고 싶다. 빨가벗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

〔「개처럼 사랑하고 싶다」(1982) 전문〕

이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한 표현이며, 화자 자신을 통해 인간의 가식과 체면을 걷어내는 화법인가. 사내들끼리 모이면 흔히 하는 음담패설 중 주고받는 일이고, 조선시대의‘춘화’에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으며, 에로물(잡지, 포르노그래피 등)에 나오는 단골 체위인 터라, 방사에서 실천해 보지 않은 이가 없을 그것을 시인은 너무도 진솔, 정직하게 드러 낸 것뿐이다. 황지우 시인도 그의 시「이태준(1946년 서울生,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근황」에서“제발 무슨 충격적인 일이 없을까? 여자를 개같이 엎드려 놓고 성교하고 싶어. 침 뱉을 거야? 추악이 즐겁지? 너를 신고할 테다. 제발 그래줬으면 고맙겠어”라고 쓴 대목이 있다. 마광수보다는 훨씬 기교적이고 심리적 장치가 결속되어 있지만, 바따이유가 설명한 에로티즘의 불가피한 동물성까지를 함축한 경우에 속한다.

수음(手淫)과는 이제 자동적으로 친숙해진 나에게/ 너는 대체 무엇 때문에 내려왔느냐/ 어째서 모든 거리마다에서/ 너는 내게 고독으로 다가온단 말이냐/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 내 가슴에는 네 몸뚱어리만이 남았다/ 끊으려 해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는/ 이 사랑, 이 욕정,/ 이 괴상한 설레임의 정체는 무엇이냐〔「사랑」(1979) 후반부〕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 내 가슴속에는 네 몸뚱어리만이 남았다”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마광수의 관능적 에로티즘의 사상이 여과 없이 표출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사랑한다’고수 없이 말하곤 하였지만, 그리고‘하늘을 향해 수만 번 맹세를’하며 그 말이 정신적인 것이리라 여겼지만, “내 가슴속에는 네 몸뚱어리만 남았다”는 것이다. 이 직설적인 화법은 그의 정직성의 철학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육체적 관계를 맺는 연인 사이의 남성에게는 이보다 더 솔직한 생리적 심리적 고백은 없다. 수음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이 동물적 본능과 욕정, 시인도 도대체 그 괴상한 정체가 궁금하고 또 궁금할 지경인 것이다. 생기 있는 동안의 인간에게는 운명의 굴레같은 것이“이사랑, 이욕정”인 것은 사실이다.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하여 더러는 금욕의 참선을 하기도 하고, 속죄의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인의 경우 이 욕정의 굴레로부터 쉬 벗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법으로 막고, 방송으로 떠들어 계도를 해도, 보다시피 성 추행, 성 폭행 사건이 늘어만 갈 뿐 그치질 않는다. 시「사랑」은 개인의 성 심리를 고스란히 말해 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적 인간, 특히 남성의 욕망의 특별성과 숙명 같은 것을 드러냄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노골적 표현이 시적 성과와 얼마나 결속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하루 종일 외로움에 시달린다/ 하루 종일 성욕에 시달린다/ 한평생 외로움에 시달린다/ 한평생 성욕에 시달린다// 차라리 죽고 싶다(「비가」부분)

자그마한 화장실의 공간은 나 혼자만의 공간,/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이 포근하기만 해/ 가끔은 애로틱한 잡지를 보며 마스터베이션/ 가끔은 내 똥을 섹시한 여자가 받아먹는 상상,(「밀회」부분)

나는 밤마다 몰래몰래/ 병원의 시체 냉동 보관소에 들어간다/ 그래서 힘겹게 시체를 꺼내어/ 차가운 시체와 성교를 한다(「네크로필리아」부분)

불과 세 편의 일부를 뽑아 보았지만「게이와의 사랑」「순간의 황홀과 만나다」「너무 섹시하다」「애널(Anal)의추억」등등, 이같은 유의 마광수 시는 너무 솔직하고, 외설스러워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가학적이고 극변태적인 장면들이란 사드 후작의 행각과 그의「소돔의 120일」등의 소설에 나타난 사례와 별반 다를 게 없어 신선감이 떨어지는 편이다. 이승하 시인은 마광수 시의 이런 부분의 양상에 대해 시적 성과를 찾아보기 어렵고, 마광수 시인이 줄곧 추구해 온‘인권’과‘ 민 주주의’와 부합하는지 의심스럽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쾌락주의자 마광수시의몇가지흐름」,『마광수 시대를 성찰하다』, 글과 마음, 2019).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린 서로가 어쩌다 얽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히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 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효도에」(1978) 후반부〕

마광수는「망나니의 노래」를 비롯한 등단작들과 그 무렵의 시편들에서 도발적이고 패기만만한 개성적 특성을 보여준다. 「효도에」도그무렵의 작품인데, 그의 시적 관점과 반어적 표현의 방법적 인식이 잘 드 러나 있는 작품이다. “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또 기르고 싶어서 기르셨나요? ”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게 강제되어진 존재’라는 실존주의적 사고(思考)마저 느껴지게 한다. 시인은 이 시편에서 철저하게 존재의 우연성과 무상성(無償性)을 파고든다. 하지만, 말미 부분에 가서는 반전의 상황을 드러낸다. 모든 동정 모든 연민,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이다. 인간의 실존적 운명과 존재에의 인연 및 현실적 사랑을 반전을 통한 구성적 기법으로 표상한 것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마광수 시인은 실제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한다.

천재적인 시인으로, 광기 어린 소설가로, 야한 에세이스트로, 시론 및 문학이론가로 길지 않은 생애에 영욕의 세월을 보낸 마광수는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타살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와 소설이 반드시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신을 까발려 가며 위선으로 가득찬 한국사회의 현실을 강타한 것은 기억되어 마땅할 것이다. 그는 누구도 드러내지 못했던 성 담론의 제문제(諸問題)를 당당하게 정직성의 공간에 올려놓음으로써 한국적 에로티즘 문학에 불을 붙였다.

생존과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인 에로티즘 논의와 연구, 그리고 에로티즘 문학의 발전 방향에 대한 과제는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금기와 위반,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창조적 개성을 추구하며 고독한 삶을 살다 희생된 마광수 시인, 하늘나라에서 영광 누리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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