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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난 마음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영희(마산)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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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하게 쌓인 샛노란 은행잎이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발에 짓밟히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처량한 몰골이다. 남은 생을 본인의 의지와 달리 자식들에 떠밀려 요양원으로 가야 될 친구를 생각하게 된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그녀는 감정의 폭이 심하지 않아 믿음을 주는 친구다. 들꽃처럼 성품이 온유하고 착하다. 누구에게나 먼저 웃음을 건네는 푸근한 마음을 지니기도 하여 인기 만점이다. 그렇던 그가, 넘어져 무릎과 고관절 골절로 수술 후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웃음기도 사라지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을비 내리는 스산한 날 친구 집을 방문하였다. 퇴원 후 몸은 볼품없게 여위어 갔고 넋이 나간 듯 눈길은 초점이 사라져 버렸다. 의지도 강하고 심지도 굳던 친구인데, 무엇이 작용하여 탄탄하던 이 친구의 마음에 구멍이 생겨났는지 애석한 마음이 든다. 친구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내려앉은 묵직한 눌림에 할 말을 잃고 말머리를 쉽게 꺼내지 못하였다. 잠시 후 요구르트로 입을 적시게 하고 호두파이를 입에 넣어 주었다. 억지로 어설프게 입을 벌려 웃음 짓는 그를 가슴으로 안아 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같이 잠자고 맛있는 것도 먹자고 속삭여 주었다. 그동안 찌들었던 모습이 순식간에 밝은 얼굴로 바뀌더니 손뼉까지 친다. 속이 텁텁하였는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말에 사 가지고 가자고 하니 어린 손녀처럼 좋아했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음식에 대한 관심도 옅어지고, 정성이란 마음도 기울이지 않고 지내온다. 그러나 생일날은 좋아하는 각가지 음식으로 성찬을 준비하여 자축하기도 한다. 오늘이 꼭 그날 같다. 친구를 초대할 마음으로 예쁜 그릇을 꺼내 놓고, 오랜만에 음식 준비하며 조신했던 옛모습이 떠올라 웃음기를 머금고 즐길 수 있었다.
친구 오면 기다리지 않게 준비를 대강 해 놓은 터라 쉽게 상차림을 할 수 있었다. 평소 매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하여 해물찜을 만들었다. 나의 실력을 스스로 점검하려는 듯 한껏 솜씨를 부려 본 음식이다. 콩나물과 미나리가 듬성듬성 섞인 사이로 보이는 새우, 낙지, 전복, 키조개까지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럽게 만들어진 찜은 군침을 돌게 하였다. 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성취감에 기분은 한껏 부풀어 짐을 느꼈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말처럼 곁에서 수저를 놓아 주고 물컵을 챙기며 도움 주려고 애쓰는 친구를 쳐다보며 웃어 주었다. 마음이 편해 보였다. 친구는 앞 접시에 찜을 덜어내어 게걸스럽게 먹다가 흠칫 나를 보더니 민망한 듯 멈춘다. 가자미 살을 발라 밥수저 위에 얹어 주었더니, 목례를 한다.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그는 그냥 웃는 것이 아니었다. 웃음 반, 울음 반인 얼굴로 고맙다며 내 손을 잡고 우는 그녀의 울음이 전이되어 한동안 같이 울었다. 물수건을 건네고 따뜻한 모과차를 앞에 놓아 주며 우린 같은 편이니까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같이 해답을 찾아보자고 진정 어린 말로 마음을 달래었다.
그녀는 굳은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입원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큰아들이 “어머니 동생과 의논했는데 퇴원하시면 혼자 지내실 수 없으니 요양원에 가셔야 될 것 같아요. 마음 준비하세요” 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전신에 마비가 온 것처럼 숨쉬기도 힘들었다고 말한다.
초록은 동색이듯 그녀와 나는 딸이 없다. 아마도 딸이 있었다면 그렇게 상처를 안겨 주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둘인데 작은아들은 실직으로 고정적인 수입도 없고, 큰아들은 유학 4년 차인 손자 뒷바라지에 힘겹게 지낸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친다. 자기 부부가 살던 아파트를 팔아 1억씩 건네주고, 원룸에 거처를 옮긴 지 삼 년째라고 하였다. 다행스럽게 직장 다닐 때 연금 보험을 들었기에 풍족하진 않지만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한다.
걷기조차 힘들지만 요양원에 가기 싫다고 거듭 강조한다. 마음에 두고 있는 친정 조카딸과 의논하여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결기를 보이는 모습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 외로움은 정신 영역에 깃든 병의 초기 단계라고 생각된다. 외로움은 마음이 허할 때 생겨난다. 구멍이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또한 그로 인하여 정신에 자극이 되어 큰 병을 유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친구는 잠시 함께 지내며 마음이 순화되고 전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고마웠다.
구멍 나고 눅눅했던 그녀의 마음에 따사로운 햇살이 스며들기를…. 그러므로 파란 새싹의 희망나무가 쑥쑥 자라나 구멍 난 마음을 채워 주는, 그녀의 봄날을 꿈꾸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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