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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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화엄사 템플스테이 가려냐고. 반가움에 템플스테이가 버킷리스트였다며 호들갑을 떤다. 실은 코로나 전에 계획을 잡았었다. 3년이 넘도록 물러날 기미가 없어 취소했다. 딸이 얼마 전에 먼 길 가신 외할머니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고, 먹먹한 마음 내려놓
고 오란다.
다 저녁에 여행 짐 싸다 말고 친구가 선물한 연두색 머플러를 목에 두른다. 전신 거울에 비춰보다 예뻐서 셀카 찍어 친구에게 보낸다.
‘내일, 여행 이러고 갈 거야. 봄 처녀 같지?’
고맙다는 인사 대신이다. 작은 지퍼 팩에 나누어 먹을 사탕과 과자를 담고, 다른 지퍼 팩에는 샤인 머스캣을 알알이 떼어 담는다. 선글라스도 챙기고 딸이 준 여비도 배낭 깊숙이 찔러 넣는다. 짐 쌀 때부터 설레는 걸 보면, 마음은 이미 여행 시작이다. 현관 쪽 벽에 기댄 배낭이 풍선 처
럼 빵빵해 터질 것만 같다.
잠이 드는 듯 마는 듯 선잠을 잤다. 광명역에서 KTX 타고 빠르게 흐르는 풍경을 보며 2시간여 만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얼마 만의 콧바람인지 모르겠다.
화엄사 템플스테이는 외국인에게도 인기다. 예약 오픈 시간에 맞춰 예약을 하는데 얼마나 손끝이 떨리던지. 체험형과 휴식형 중에 체험형을 선택했는데 108배는 생략된 일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108배는 영 자신이 없다. 예불, 사물 연주, 발우 공양, 연꽃 만들기, 숲길 포행, 스님과 차담 등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절에서 내준 ‘보시방’에서 연두색 반팔 티셔츠와 세상 편해 보이는 펑퍼짐한 바지로 갈아입는다.
첫날, 어스름한 시각에 사물놀이를 보고 저녁 예불을 마쳤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진언을 읊조리며 법당을 나오는데, 스님이 숲길 포행 갈 사람은 내일 5시 52분에 아침 공양하고 7시까지 앞마당에 모이라고 한다. 산사의 아침은 퍽 이르다.
화엄사에 ‘어머니의 길’이라는 순례길이 있다. 신라시대에 화엄사를 창건하신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모시고 연기암까지 오르던, 그 옛길에 큰 돌을 깔아 만든 길이다. 스님 이야기에 엄마 생각을 한다. 엄마 손잡고 같이 걸어도 좋을 길이다. 엄마와의 이별의 슬픔은 시간이 흘러도 옅어질 것 같지 않아 마음 아프다.
오르는 길은 돌길이고, 내려오는 길은 넓고 평평한 흙길로 2시간 코스다. 좌우로 높게 자란 나무들이 맞닿아 생긴 나무 터널이 하늘을 가린다. 햇빛 피하려고 쓴 밀짚모자를 벗어 들고, 경사가 완만한 돌길을 걷는다. 새소리의 울림이 크다. 계곡물 소리가 유난히 깊다. 살결에 스치는 바람이 곱다. 오르다 만난 대나무 길에서, 녹차나무 길에서 또, 계곡물이 흐르는 다리 밑에서 스님 말씀 들으며 숨을 고른다. 스님 바로 뒤에 따라붙어 두 번째로 걷다가, 연기암 코앞에서 결국 꼴찌가 되고 만다. 발걸음이 쉬엄쉬엄 느리다. 연기암은 국내 최대 규모의 마니차가 있는 암자로 유명하다. 마니차를 한 번 돌리면 한 권의 경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연기암에서 누워 구르면 화엄사에 도착한다는 스님 말씀에 다들 웃으며 오르막보다 수월한 내리막을 구르듯이 편히 걷는다.
점심 공양이 기다려진다. 공양간 앞 계단에 턱 받히고 앉았다가 공양 종소리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사찰 음식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요리 교실에서 사찰 음식을 배운 적도 있다. 국, 밥, 반찬 6가지를 뷔페식으로 차려 놓았다. 자기가 먹을 양만큼 큰 접시에 덜어 담는다. 싱싱한 상추를 보자마자 빗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삼겹살이 떠오른다. 이내 ‘무엄하다! 여기는 화엄사란다’ 따끔히 이르고는 상추에 밥 얹고 무생채와 버무린 새송이버섯을 고기 삼아 넉넉히 얹는다, 화룡점정으로 된장 한 점 올린 상추 보따리를 입에 넣는다. 미어진다.
배추김치가 특별하다. 늙은 호박 갈아 넣은 듯 주황색 건더기가 흘깃 흘깃 보이는 허연 김치다. 배우고 싶은 맛이다. 절밥이 맛있다더니, 다 맛있다고 앞에 앉은 언니에게 말 걸고 싶다. 하지만, 벽에 적힌 ‘공양 하실 때에는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묵언 글귀에 눈치 보인다. 다들 화난 모양새로 밥만 먹는다. 이 공양이 있기까지 수많은 인연에 감사하라는 공양 기도문을 떠올리며. 음식 한 점 남기지 않은 빈 접시를 설거지 해서 바구니에 엎는다.
전국으로 템플스테이만 28회 다녀온 지인에게 물었다. 공양 때 말없이 밥 먹는 게 어렵다고 했더니, 그간 다닌 절 중에 서너 곳만 묵언을 하고 대부분의 절은 조용히 이야기 나누며 식사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녹차 한 잔 앞에 두고 스님과의 차담 시간. ‘우리는 내일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할지 생각하며, 내일 말고 오늘 행복하게 사세요’라고 하시던 스님 말씀에, 요즘 그리 살아 보는 중이다. 객이 아닌 주인으로 내 마음을 먼저 살핀다.
화엄사에서 쉬는 시간도 갖고, 먹먹한 마음도 덜어냈다. 선물 같은 숲길 포행이, 소풍 갔다가 보물을 찾은 것처럼 좋다. 언니와 마음 공부하며 버킷리스트 하나 해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