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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달이 보고 싶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윤혜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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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을 앞둔 며칠 전 택배가 왔다. 발신인은 생각만 해도 그리운 고향 친구의 이름이었다. 꽁꽁 싸맨 상자를 열어보니 보름에 해 먹을 나물 등과 연한 보리를 잘 다듬어 신문지에 정성스레 싼 그녀의 정성이 들어 있었다.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비닐에 싸고 또 싸서 얼음을 위아래로 넣은 은박지 속의 홍어 애가 있었다. 홍어 애는 벌써 물컹거렸다. 전화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전화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문자를 보내려는데 삐죽이 솟아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가시나야! 정월대보름에 해 먹을 이것저것들이다. 이맘때쯤 보릿국을 먹으면 니가 생각나서 암만 세월이 가도 안 잊히니 빙이다. 니가 우리 밭에서 보리를 몰래 캐다가 울 엄니한테 들켜서 바구니를 빼앗기고 혼났던 그 모습을 본 그때 얼마나 내가 미안했는지 아니? 하도 많은 사람이 우리 밭에서 보리를 캐 갔던지라 울 엄니도 독이 올라서였을 게다. 지금도 보리만 보면 니가 생각나서 올해 엄마 집에 갔다가 연하길래 너한테 보낸다. 마침 장날이라서 홍어 애도 사서 같이 보내니 보름에 맛나게 끼레서 묵어라. 홍어 애가 가는 도중 다 녹을까 봐 애가 탄다. 아프지 말그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그녀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나는 몇 년에 한 번 친정 나들이에나 그녀를 만날 뿐 마음속에 그리움만 간직하는 친구다. 보릿국, 내가 참 좋아하는 그 국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친구의 마음씀씀이에 한동안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홍어 애가 녹는다며 그녀의 애가 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선뜻 움직일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해 설 명절이 지나고 얼마 후, 정월대보름이 다가왔다. 어머니는 보릿국을 끓이겠다시며 어디 밭에 가서 보리를 캐 오라 하셨다. 농사를 짓지 않았던 우리 집에는 보리밭이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밭에 가서 몰래 한 바구니만 캘 작정이었다. 그땐 많은 사람이 그렇게 남의 보리밭에 가서 보리를 캐곤 하였기에 그렇게 나쁜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바구니가 절반쯤 찼을 때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았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당연히 내가 자신의 딸 친구인 줄 알았는데도 바구니를 빼앗고 험한 욕설을 하였다. 그 모습을 멀리서 그녀가 보고 있었다. 나는 호되게 혼나고 집에 와서 어머니한테 화를 냈다. 어머니는 되레 친구의 엄마에게 매정하다며 혼잣말로 욕을 해댔다. 생각하면 도둑질을 한 셈이었는데 참 당당했던 배고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남의 집 보리농사를 해친 짓이었는데 말이다. 그날 보릿국에 바지락을 넣고 끓일 심산이었던 어머니는 보리 대신 무만 썰어 넣고 국을 끓였던 기억이 새롭다.
암울했던 시절이었지만 우린 나이를 먹었고 각자 친정집을 벗어났다. 난 직장을 구해 도시로 왔고 그녀는 부모의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친정 언저리로 시집을 갔다. 결혼을 한 후로도 가까이 지낼 것 같았던 우리는 내 생활이나 그녀의 생활이 녹록지 않았던 듯 연락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결혼하여 첫아이를 낳고 친정에 갔을 때였다. 그때도 아마 정월대보름을 앞둔 때였을 것 같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 구경 간 장터에서 각종 나물 등을 놓고 팔고 있는 낯익은 얼굴에 걸음을 멈추었는데 나를 알아본 그녀는 내 손을 덥석 잡아줬다. 나보다는 열 살은 더 먹게 보인 그녀는 좌판에 있는 나물을 한꺼번에 쓸어 담고 머리에 이고선 우리 집으로 가자며 앞장을 섰다. 집에 와서 나물을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보름에 맛나게 해 잡수라는 말과 함께 “엄니! 보릿국 끼레서 믹이시오. 겁나 연하고 보드랍소야. 야가 보릿국을 잘 묵었어라” 하고 누가 친정어머니인 줄 모르게 나를 내 어머니에게 당부한 후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총총걸음으로 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학교 졸업 당시를 떠올리며 울컥 잊었던 시절이 슬픔으로 요동쳤다. 그렇게 다시 연결된 그녀는 고향에 친정엄마처럼 가끔 콩이며 참기름이며 귀한 걸 보내주곤 해서 염치없는 난 덥석덥석 받아먹기만 한다. 죽었다 깨어나도 난 그녀의 베풂과 아량을 못 이길 것 같다.
식탁에 펼쳐 놓은 각종 나물이며 보리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내 등 뒤에서 남편의 근엄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쳐다보고 있으면 나물이 무쳐지냐며 ‘아이쿠! 저거 봐, 홍어 애가 홍시가 되어 버렸네’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 친구가 이걸 캐느라고 시린 손을 몇 번이나 불었을 것을 생각하니 먹기도 아까워서 그랬소! 이건 나 혼자 먹을게요.”
언젠가 보리로 국을 끓여주니 소여물을 먹는 것 같다 했던 남편의 말이 생각나서 소심하게 뒤끝 있는 소리로 응대했다. 저녁에 맛있는 보릿국을 먹을 생각에 다셔지는 내 입가에 웃음이 질질 샜다. 멀리 보이는 수락산 꼭대기의 눈은 아직 군데군데 있었다. 또 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에 보름달은 뜨지 않는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꼭 환한 보름달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아직 저물지 않은 산꼭대기에 눈을 멈춘다.
달! 달! 달! 쟁반 같은 둥근 달이 떴으면 좋겠다. 그 달 속에 어머니의, 친구의 얼굴이 보일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들을 자꾸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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