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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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선조 2년) 강릉에서 태어난 허균, 동인의 영수인 아버지 초당 허엽, 큰형 허성, 둘째 형 허봉, 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허씨 5문장가로 이름 떨치며 명문의 좋은 환경에서 최고의 스승인 둘째 형 허봉, 둘째 형의 친구인 유성룡과 서얼 손곡 이달에게 시 공부할 때만 해도 행복했다.
천재로 추앙받던 시절은 짧고 인생지사 새옹지마의 굴곡을 몇 번이나 겪었던가. 천재적인 DNA는 어디에 가든 낭중지추(囊中之錐), 시험만 보면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기를 12번, 20여 년의 관직 생활 중 6번의 파직과 3번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28세에 장원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된 지 6개월 만에 기생들과 놀았던 이야기 「조관기행」으로 파직되는가 하면, 나라에서 금하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자들과 어울리고, 불교를 가까이하며 서산대사, 사명당 등과 교류하다 벼슬아치들의 원성으로 번번이 파직된다.
당대의 사대부들이나 벼슬아치들은 성격이 곧고 자유로워 세상과 화합할 줄 모르는 허균의 솔직함으로 본인들의 치부와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걸 꺼려 그토록 기를 쓰며 허균을 끌어내려 파직시키고 귀양 보냈던가.
인생은 새옹지마, 임진왜란은 허균의 지성이 필요했다. 허균은 명나라 원정군 사신과의 수창 외교(酬唱外交)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 사신들은 물론 선조와 광해군의 신임을 얻는다.
명나라에 최초로 조선의 시를 알리는 『조선시선』의 탄생에는 허균의 공이 크다. 삼국시대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112명의 시 340여 편 중 누이 허난설헌의 시 등 허균이 암송하여 줄줄이 적어준 시가 100편이 넘는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신 오명제에게 지어준 한시에 한글로 음을 달아 중국에 최초로 한글을 알렸고, 조선의 시가 명나라에 뒤지지 않음을 증명하며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오명제는 자신이 지은 『조선시선』의 서(序)에 “허균은 3형제 가운데 가장 영민해서 시를 한 번 보면 잊지 않아, 동방의 시를 수백 편이나 외워 주었다”며 허균의 천재성을 극찬했다.
허균은 27세에 요절한 누나의 유언에도 누나의 시가 아까워 불사르지 않고, 평소 암송한 시까지 합해 간행한 『허난설헌집』을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 전달한다. 중국에서 재간행된 『허난설헌집』은 장안의 종이값이 오를 만큼 인기가 많았다니 그 열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한류 열풍을 일으킨 예로 허균의 나이 35세 때 일이었다.
허균의 수창 외교, 즉 시문 외교(詩文外交)의 성공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몇 차례 다녀올 기회를 얻는다.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출장비 대신 나라에서 주는 인삼을 팔아 4,000여 권의 책을 들여오기도 하고, 천주학의 성경과 찬송가, 명나라의 금서인 이탁오의 책까지 구해 들여와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보인다.
시대를 뛰어넘는 개혁적 사고는 허균을 항상 위태롭게 했다. 당대 주종이던 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실용 학문을 주창하며 사회의 변화를 요구했으니 조선 왕조의 시각으론 눈엣가시였으나 실학사상의 겨자씨가 되지 않았을까.
천재 지성인의 불운을 살펴보면 허균의 자유로운 영혼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세 때 경상도 관찰사였던 아버지 허엽의 객사, 19세 때 아버지처럼, 스승처럼 따르던 둘째 형 허봉(외교관, 시인, 문장가)의 유배와 객사(38세), 20세 때 6세 위의 누나 허난설헌 요절, 23세 때 금실 좋던 아내가 임진왜란 피란 중에 첫아들 낳고 죽자 그 아들도 병사 등등 젊었을 때 겪은 불운으로 인해 초월적 삶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허균의 대표 작품으로 사회 모순을 비판한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꼽지만, 눈길을 끄는 이색적인 작품도 있다. 고깃집 앞을 지나면서 고기 씹는 시늉을 한다는 뜻의 『도문대작(屠門大爵)』은 유배 작품으로 분류된다. 이 작품집은 국내 최초로 남자가 쓴 별미 음식과 전국 팔도의 특산물, 토산품 등을 기록한 책이다. 허균이 유배 생활 중 평소에 먹어본 음식과 과일 등을 떠올리며 쓴 것이라니 씁쓸하면서도 그 발상에 숙연해진다.
그 외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성수시화(惺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남궁선생전』 등의 작품 속에는 허균의 사상과 당대 사회 분위기가 깃들어 있어 귀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교산, 성소, 학산은 허균의 호다.
1618년 천재 지성인, 영혼이 자유로운 자유인, 시대를 초월한 개혁 사상가 허균을 시샘하는 간신에 의해 재판도 없이 일사천리로 능지처참당했으니 이보다 더 파란만장한 인생이 또 있을까.
만약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관론, 후속론, 유재론, 호민론을 실천하고, 국제 정세를 꿰뚫는 혜안의 외교로 광해군과 의기투합하여 나라에 이바지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달라졌으리라. 끝내 복권되지 못한 유일한 천재 지성인, 48세로 떠난 허균의 죽음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