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7월 665호
112
0
작품을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는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문학사를 통해 변해 온 이 질문은 모든 문학인에게 적용되는 덕목이다.
그런데 우리 문인은 한 번쯤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흔히‘작품이 말해준다’고 한다. 각종 문학 미디어에 발표된 작품들을 보면 이 질문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문학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는 명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명제를 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분단 이후 우리 민족문학의 가장 큰 과제는 남북이데올로기를 해소하는 일 이다. 더불어 자본주의의 모순과 욕망으로부터 여러 가지 사회적 명암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전 지구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기후 온난화 현상은 오늘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거대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폭력 또한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대한 문인들의 목소리를 들려줄 때다. 인구감소와 다문화 문제 또한 도외시할 수 없는 엄연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중심으로부터 이탈되고 소외된 수많은 기층민의 삶도 우리 문학인들이 위로하고 껴안아야 할 문제이고 덕목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이러한 제문제를 문학을 통해 해결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이것들을 가시화시켜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는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성이고 본질이다. 문학은‘가
치 있는’그래서‘유익한’메시지를 던질 책무가 있다. 때로 문학은 우리가 잃어버린, 잊어버린 근원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을 독자들에게 제공함으로부터 감흥과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한다.
필자는 동료 문인들로부터 보내오는 작품집을 받는다. ‘참으로 많은 책이 생산되고 있구나’를 체감하면서도‘안됐지만 왜 이렇게 쓸모 없는 책들이 생산될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더불어 내가 누군가에게 보낸 책이 고물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함부로’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서‘함부로’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쉽게’,‘습관적’,‘알지 못하고’등의 의미로 읽힌다. ‘쉽게’글 쓰는 것은‘어렵지 않게’라는 뜻이 아니라‘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라고 읽는다. 아는 만큼만 글을 쓴다는 것을 말한다. ‘습관적’이라는 것은 관습적으로 글을 쓸 때를 지적한다. 이는‘자동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는 앞에서 한 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 옛날 천재적인 문학인들이 즉흥적으로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충분한 공부가 된 사람들이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필자는‘천재’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노력과 수고가 없는 대가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훌륭한 문인들은 밤새 고치고 또 고쳐서, 그래서 많은 사색의 결과로 좋은 글을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수백 종의 문예지에서 대량 상품 찍어내듯 생산한 문인들이 넘치는 시대여서 자질이 부족한 문인이 많아진 것은 문예지 발행인과 이에 호응한 문인들의 헛된 욕망 탓이다. 쉽게 문인이 되어 질이 떨어지는 작품들을 써내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문인을 우습게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문단의 폐해는 이미 고질병이 되어 문학이 오히려 공해가 된 부분도 없지 않다. 문학작품이 작가의 정서나 욕망의 배설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문학인은 본래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 야성을 필자는‘진보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문학이 늘 독자들의 상상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데도 많은 문학인이 창조적인 측면에서 게으르고 보수화되어버렸다. 자신이 보수화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문인이 태반이다. 여기에서‘보수’ 와‘ 진 보 ’는 정치성을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상상력으로 세계를 읽고 인간의 삶과 자연, 그리고 사물을 참신하게 인식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지회의 경우 해마다 이른바‘환경문학’을 문집으로 펴내고 있다. 환경문학은‘생태문학’또는‘생명문학’의 한 갈래일 뿐이다. 생명성의 본질을 따져 묻는 것이‘생태문학’,‘생명문학’이다. 그런데 환경문집을 해마다 펴내고 있는 것은 생명의 근원을 보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지극히 외피적인 시각의 결과이다.
‘디카시’또한 문제를 안고 있다. 본래 디카시학이 주장하는 지점에 다다른 시를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시와의 변별은 5행 이내의 짧은 시라는 형식뿐으로 함량에 미달한 작품들이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사진이 시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디카시의 본질인‘날것의 언어’와‘ 영 상 이미지와 문자 시의 동등한 기호성’이라는 원칙에 이르지 못한 경우가 허다한 현실이다. 디카시는 과학과 문학은 절대 융합할 수 없다는 오랜 생각을 깬 사건이다. 이렇듯 기존의 관념을 깬 기발한 아이디어처럼 디카시가 제대로 발호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인접 예술과 문학의 융복합을 위해 연구해왔다.
미술과 문학이 어떻게 소통하고, 서로가 어떤 친연성을 갖는지를 통해 새로운 상상력의 발현을 꿈꾸어 왔다. 단순한 장르비평을 떠나 사진·회화·음악 등 인접 장르가 서로 교감하여 새로운 예술로 거듭나는 데 일조하고자 하는 발로이다.
문학이 정서적 욕망을 배설하는 단순한 기제로 머물러야 하는가에 대한 염려가 시름이 되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늘 모험하고 도전하는 창작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문학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