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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에 천리를 가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안혜초

시인·한국문인협회 대외협력위원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사년 봄호 2024년 3월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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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봄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봄의 첫날, 3·1절은 국가기념일이기도 하지만 내겐 개인적으로 나의 친조부 민세 안재홍의 기일이기도 하다.

“때와 곳, 시간과 공간, 역사와 향토, 20세기 오늘날에 조선인으로 되어있는 천연(天然)의 약속, 출생과 인과(因果), 즉 시(時)와 공(空)과 고(故: 왜? 무엇을 하려고?)에 말미암아서 내가 살고, 생각하고, 일하고, 조심하고, 기뻐하고 그리하여 죽는 종국의 날이 나의 턱 밑에 다가들 적까지 허무에서 방랑하는 약지박행(弱志薄行)의 도(徒)가 단연 아닌 대신 줄곧 꾸준히 인생의 힘드는 봉사의 길을 나아가는 정진(征進)의 순도자(殉道者)가 되는 것이, 인생으로서 그리고 충실한 조선인으로서 타고난 신비를 초월한 신비의 약속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요, 이들에 응해서의 독서, 사색과 및 그에서 편달되는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안재홍, 『讀書開進 論』, 1935)

그분 자신의 인과론 그대로, 돌아가신 날도 절묘하게 3월 1일인 나의 할아버님 민세(‘민족과 세계’란 뜻) 그분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야말로 이 나라 우국지사의 운명, 바로 그것이었다. 일제 치하에서의 항일독립운동과 옥고 생활, 해방 이후의 건국대업 활동,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은 납북과 그곳에서의 15년간에 걸친 오랜 시달림 끝에 맞은 비운의 별세.

민세 안재홍 선생(1891∼1965)은, 민족운동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역사가로서 그리고 뒤에는 정치인으로서, 그 분야에서마다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절(孤節)의 국사(國士) 이었다.

우리의 풍토와 역사적 조건 속에서 민족의 살길을 찾으려고 고심한 그 독자적인 사상, 외세 강점하에 전후 9차에 걸쳐 8년 3개월의 옥고를 겪은 (제9차 ‘조선어학회 수난’이 마지막 옥고) 그 도저(到底) 한 행동, 가히 지행합일이랄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선생의 상(像)을 우리 현대사에 흔치 않은 민족지도자의 한 분으로 부각케 하고 있다.

특히 선생이 신문을 통하여 발휘했던 줄기찬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면모, 또 때로는 민세체(民世體)라 불러 좋을 만큼 특유했던 웅려장중(雄麗莊重) 한 문장은, 당년의 많은 독자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민세안재홍선집』(이하 『선집』) 간행을 수년에 걸쳐 주관하여 오신 천관우(언론인, 사학자) 선생께서도 『선집』제1권 첫머리에서 위와 같이 역설하고 계시거니와 할아버님을 생각할 때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분의 그 굽힐 줄 모르는 항일민족운동의 투지와 ‘붓 한 자루를 무기 삼아’ 그야말로 종횡무진 정진에 또 정진을 거듭한 그 꿋꿋하신 언론 투쟁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 그분을 뵈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나이 겨우 9살 무렵까지여서 거의 모두가 듣고 읽어서 아는 사실이기는 하나, 할아버님은 30대 초의 나이에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시작해서, 주필 겸 사장, 발행인 등 육순이 되시던 해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납북되시기 직전까지 직접이든 간접이든 결코 할아버님 자신의 의사에 의해 언론 활동을 중단해 본 적이 없으셨다.

1980년대 초 오랜 세월 그처럼 염원하던 그분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막상 그분이 남긴 유고(遺稿) 보따리를 풀어 보았을 때, 무엇보다도 우선 그 실로 방대하달 수밖에 표현할 수 없는 원고량에 그만 질려 버릴 지경이었다.

할아버님이 8년 동안 조선일보사 재직 시에 쓰신 논설과 시평들만도 무려 1천5백 편 가량이 되었으며, 민세 필담·수필·기행문·정계 회고록·공한·성명서·연구논문과 저서들까지 합치면 우리 유족 측이 보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권당 6백 쪽 정도로 10권이 될 만한 분량이었다.

〔「춘풍천리(봄바람에 천 리를 가다)」,「목련화 그늘에서」 등 1950년대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널리 알려진 수필이며, 그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민세필담」 「백두산등척기」 「文神을 찾아서」 등 기행문, 수상록들은 『선집』 제5권에 수록하였다.〕

어쩌면 할아버님도 그분이 34살에 논설위원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시어 해방을 맞아 정계에 뛰어드신 55살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가까운 집필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기는 하나, 그간 옥고 생활만으로도 8년 3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옥중 고문으로 허리를 다치시고 위장에 냉상을 입는 등 수감생활 후유증으로 시달리셨을 기간 등을 헤아리면 제대로 글을 쓰실 수 있는 기간이란 10년이나 될까 말까 하였을 터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많고 많은 글들을 쓰실 수 있으셨는지!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은 드디어 감격의 해방을 맞이했다. 바로 그 다음 날 민세 안재홍은 국내민족지도자대표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에 나가 <해내 해외 3천만 동포에게 告함>이라는 감격의 첫 해방연설을 했다.

민세 같은 인물이 편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방법과 길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아마 그에게는 남다른 유혹과 회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그는 8·15 행방을 맞았다. 거의 걸인과 같은 그 초췌한 민세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민족의 양심을 발견한다.(언론인 송건호, 『한국현대인물사론』 한길사, 1984)

이 연설에서 광복당시의 정세에 대한 설명과 치안유지, 그리고 조선인들의 大國民道로서 냉정침착하여 일체의 개인보복을 삼가고 재일교포들의 신변보호를 위해서라도 일본인들의 무사귀환을 호소했다.(천관우의「민세연보」에서)

광복 후에는 미군정의 행정부 한국인 최고책임자인 민정장관직에 재임하셨으며,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김구에 이어 3위를 하시기도 했다. 이어, 제2대 국회의원에 압도적으로 당선된 지 한 달도 못 되어 6·25전쟁이 발발, 그만 납북되는 참변을 당하신 것이다.

북녘땅에서 영면하신 그 분의 유해를 모셔오진 못했으나 정부에서는 할아버님의 공적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을 추서했으며 1991년에는 납북독립유공 민족지도자 추모제 전위가 결성, 동작동 현충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별도로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조소앙, 김규식 등 15명 중 한 분으로). 이로 인해 3·1절, 현충일, 광복절 등 국가기념일에는 애국지사 민세 유족대표(2012년 작고하신 오빠의 뒤를 이어)로 정부행사에 초대를 받고 참가하곤 하는데 3·1절에는 민세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할아버님 민세 추모행사에도 참가해야 하기에 오전 오후 하루종일 바쁘게 지내고 있다.

이래저래 3월은 할아버님 민세의 잘 알려진 기행문 「봄바람에 천 리를가다(춘풍천리)」가 자주 생각나는 계절이다. 혜초(惠初)라는 내 이름은 첫은혜, 첫손녀’란 뜻으로 할아버님께서 지어주셨다.

푸른 용의 해,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한꺼번에 밀려드는 그리움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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