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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하고 슬펐던 긴 잠

한국문인협회 로고 아이콘 강외숙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6월 6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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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별처럼 아득하여 아름답고 아팠던 문학 이야기이다. 벚꽃잎 지는 저녁의 한숨 같고 낡은 풍금에서 나는 리듬같이 애잔하던 나의 시는 우체통을 서성이다 보내지 못한 한 장의 엽서처럼 아련한 슬픔으로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며 싹튼 문학소녀의 꿈은 대학 입학 직후 백일장에서 차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게 되고 학보사 특집기자로 선발되면서 가일층 부풀기 시작했다. 일요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며 김선굉 오승강 배익천 권석창(권서각) 등과 찻집을 빌려 시화전을 개최하기도 했고, 밤새워 등사기를 밀어서 일요문학 동인지를 만들고 인생과 문학을 논하던 그 시절의 낭만은 아직도 풋풋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지 문경에서 고독한 습작을 할 무렵 우연히 문살문학에 합류하여 동인활동을 하게 되었다. 훗날 동아일보 파리특파원이 되어 떠난 남찬순 기자가‘헌 문살이 새 문살에게’라는 격려의 엽서를 보냈던 기억도 난다. 그 무렵 정재호 김정일 이용우 시인이 중심이 된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가 설립되었고, 지부장으로 김시종 시인이 추대되었다. 등단도 하지 않은 나도 준회원으로 초대되어 백화문학 창간호부터 동참하게 되었고, 국어교사였던 권형하 시인과 서경희 수필가도 함께 활동했다. 백화문학 창간호를 읽은 김종문 시인께서 참신한 규수시인의 탄생을 예감한다는 덕담의 편지를 보내주신 것도 잊지 못할 고마움이었다.

그러나 문학적 자극도 합평회라도 할 문우도 없는 시골 학교 교사로 외톨이가 된 좌절감과 소외감에 위축되어 갈 무렵 일요문학 동인들이 하나 둘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화려하게 등단한 소식을 접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자괴감과 열패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지 1977년 12월 매일신문 신춘문예공모에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나는 겨울방학을 하자마자 상경하였고, 신춘문예에 응모한 사실도 잊은 채 4월의 신부가 될 꿈에 젖어 마냥 들떠 있었다.

심지어 서울 체류하는 동안 대구 집으로 한 차례 전화도 하지 않았으며 결혼준비로 웨딩드레스 숍과 백화점을 드나들며 분주하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날마다 약혼자의 퇴근시간을 기다렸고 달콤한 데이트를 했으며 지금의 남편은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듯 열렬하던 그 무렵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벌어진 줄은 상상조차 못한 채 달콤한 꿈에 젖어서 지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당선은 언감생심이라 원고를 보내며 당선의 기대가 없었고, 가족 누구에게도 응모한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근엄했던 어머니가 아시면 맹렬한 비난이나 받을 게 불 보듯 뻔해 동생들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에도 어머니는 외부에서 오는 남자의 전화는 무조건 바꿔 주지를 않았었다. 여자가 교사생활 3년이나 했으면 됐고 조신하게 결혼하고 남편 내조 잘 해서 부모 망신 가문 망신 시키지 말라는 훈계를 하던 무렵이었다. 그렇게 신춘문예는 응모한 사실조차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개학이 다가오자 대구 집으로 내려갔다. 날마다 어머니는 평소처럼 정숙한 여자의 덕목을 훈계하셨고 꼼꼼히 귀한 먹거리를 챙겨 가방을 싸 주셨다. 문경으로 가기 전 막냇동생이 살짝 나를 부르더니 신문을 펼쳐 보였다. 엄마 알면 혼난다면서…. 매일신문신춘문예 최종심 기사였다. 심사위원 김춘수, 신동집. 나의 시「침몰(沈沒)하는 도시」가침몰 된 기사였다 . 그저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신문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문경에 돌아가자 백화문학 동인들이 나를 보자마자 이구동성 안타깝다는 위로를 건네던 중 매일신문 문화부에 친구가 있다는 소설가가 제법 소상하게 에피소드를 전해 주었다. 최종 두 작품 중「침몰하는 도시」는 김춘수 시인이 천거하셨고, 다른 한 편은 S시인이 제자의 미래를 위해 강력히 당선을 주장하셨다는 후문을 전하며 안타까워하셨다. 끝까지 의견이 엇갈리자 주심이셨던 김춘수 선생님이 문화부 기자들에게 “나는 침몰하는 도시네! ”라고 크게 말씀하시고 나가셨다는 사연이었다. 그 후 문화부 기자가 신암동 집으로 전화를 해서 문화부 기자라고 밝혔으나 어머니는 역정을 내시며 전화를 끊더라고 했다. 다른 기자가 재차 전화를 했을 때 어머니는 격앙된 소리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며 끊었다는 후문이었다. 당시 나는 김춘수 시인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 감격스러웠지만 어머니 때문에 부끄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스승 없는 서러움도 엄격한 어머니로 인해 놓친 기회도 슬프기만 했다. 소문은 대구에서 문경까지 퍼졌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문화부에서 걸려온 전화사건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아직도 모순으로 규정할 밖에 없는 건 수재였던 어머니가 심한 남녀차별을 받았고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음을 일생 한탄하면서도 어머니 스스로 여성의 역할을 한정하는 괴리에 나는 박탈감을 가졌고 어머니를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 앞의 나는 그저 착한 모범생이어야 했다. 결혼은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지상 최고의 탈출구였다.

자상한 남편과 살면서 더 이상 두려울 것도 걱정할 일도 없이 나는 불안으로부터 해방 되어 일상이 편안했고 문학은 멀어졌다.

나는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나는 어머니와 패배한 시를 떠나 자유로웠으나 먼 바다에서 오래 표류했다. 두세 번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나 최종심조차 오르지 않았고 하 나밖에 없었던 여동생의 죽음은 영혼의 지진처럼 견디기 힘든 상실의 아픔이었다. 동생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나는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드라마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낮엔 학교에 근무하고 저녁엔 여의도로 차를 몰고 달려가 기초과정 연수과정 전문가과정을 거치며 열심히 공부했다. 운이 좋았던지 연수과정 때 썼던 드라마게임 <그 여름의 변주곡>의 시청률이 높게 나와서 드라마국장의 칭찬과 격려를 받자 감독이었던 김종선PD는 입버릇처럼 학교도 방송개발원도 다 접고 역사드라마를 하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호흡 긴 역사드라마 작업은 가정을 돌봐야 하는 나로선 적절치 않아 사양하고 60분짜리 단막극 원고를 넘겼다.

그 대본의 결말 부분을 두고 김PD와 나는 의견이 맞지 않아 저녁마다 긴 통화를 하며 조율을 하던 중 김PD의 책상에 꽂아둔 대본을 젊은 PD가 허락 없이 갖고 가 데뷔도 하지 않은 어린 작가 이름으로 방영되었고, 그 스토리를 합평했던 작가들이 내게 전화를 하였고 여의도에는 표절사건으로 난리가 났다. 그 작품을 합평했던 연수과정 교수 김충길 제작위원과 방송작가협회 회장이셨던 이재우 선생은 엄중하게 대처하라 했고, 나는 드라마제작국에서 영혼의 피를 훔친 죄 용서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신출내기 PD는 벌벌 떨다가 전화기를 떨어뜨리며 휘청거렸고 어린 작가는 꿇어 앉아 빌었다. 김충길 제작위원이 그녀에게 강 작가가 당신을 용서해도 당신은 앞으로 절대 발표할 수 없고 강 작가는 얼마든지 쓰니까 당장 나가라고 했다.

어느날 은사였던 양근승 선생이 가든호텔에서 나를 보자고 하여 나갔더니 잠시 후 문제의 PD가 왔다. 양 선생님은 어린 시절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 얘기로 운을 떼었다. 주전자를 기울여 한 모금 마신 다음 샘물을 조금 탔는데 점차 양을 늘려 마시다 보니 점점 물을 더 넣게 되어서 호되게 매를 맞았다는 얘기로 나를 웃게 만든 다음 감독을 혼냈다.

대놓고 베끼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벌벌 떨던 PD는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그들은 필연적 관계임이 분명했다. 용서를 한 건 아니었지만 한 청년의 인생을 꺾고 싶지 않아 고소를 하지 않았으니 그는 구사일생한 거였다. 그후 나는 여의도 쪽을 지나가기도 싫어서 키만큼 쌓아두었던 대본을 몽땅 버렸다. 모 유명작가는 같은 사고를 당했을 때 일일 드라마로 딜을 했다는데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린다던 시인처럼 완벽하게 뒤돌아보지 않기로 작심하고 여의도를 떠나 버렸다.

그 후 일상은 아주 자유롭고 여유로웠으며 평온했다. 어느 날 골프장에서 귀가한 남편이 전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필드에서 우연히 만난 모PD가 강 선생님 아드님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고, 남편은 강 선생 학교 잘 나가고 우리 아들도 여기서 전교 1 등 한다고 응수했다고 하기에 그 사람들 나를 미국 유학까지 보냈다며 한참 웃었다. 누렇게 찌든 삼십년 된 시작노트와 내가 버린 드라마는 의식의 심층으로 가라앉은 듯 했으나 어쩌다 꿈에서 시를 쓰고 깨어나 울던 밤이면 가슴 위로 모래바람이 아리게 스치곤 했다.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듯이 운명도 그렇게 오는가 보다. 2008년 가을 어느 날 오후, 당시 교무부장이던 나는 홀로 교무실을 지키다가 전화를 받았다.

“거기 강외숙 선생님이라고 계십니까? ”

무뚝뚝한 경상도 억양의 남자 목소리였다.

“예, 제가 강외숙입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

“아, 저는 김시종입니다! ”

“어머나 어머나, 반갑습니다! 어떻게 제 연락처를 아셨는지요? ”

“서울시 교육청에 문의해서 알았지요. 그런데 강 선생님, 그렇게 사시면 안됩니다! ”

“예?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어느 문학지를 봐도 강 선생님 작품을 본 적이 없어요! 강 선생님,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

그렇게 호통을 치신 김시종 선생님의 훈계는 한참 이어졌고, 문예지 등단이든 신춘문예든 뭐라도 노력을 하라는 말씀이었다. 삼십 년의 잠을 깨우는 놀라운 인연이었다.

그날의 충격은 삼십 년 잠들었던 문학의 혼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고 그해 겨을 메이저 신문사에는 자신이 없어 상주시민신문신춘문예에 습작 시 5편을 보냈다.

습관처럼 기대는 접고 있었지만 졸시「오이도 가는 길」이 당선작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무튼 설레고 기뻤다. 시상식 상품도 융숭하여서 동반한 남편도 무척 즐거워했다. 지방신문이지만 신춘문예 응모자 숫자는 중앙지 못지않음을 알고 내심 놀랐다. 시상식을 마친 후 대구 친정집에 들러 부모님을 뵙고 수상소식을 말씀 드리자 어머니는“이기 무슨 일이고? ”하시며 기뻐하셨고 아버지는 큰일 했다며 인자하게 등을 두드려 주셨다. 김시종 선생님께서는 서울 가서는 상주는 빼고 시민 신문신춘문예라고 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아마도 지방을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김시종 선생님 말씀대로 문학지 약력에 시민신문신춘문예 등단이라고 기록한다. 아무튼 삼십 년의 잠을 불호령으로 깨워주신 김시종 선생님께 이 지면을 빌려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선생님, 처음의 마음으로 시와 함께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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